비빌기지의 자발적 공동운영안
안연정, 홍윤주 × 박성태
분량9,917자 / 2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유형인터뷰
마포석유비축기지 내 비빌기지는 한동안 격랑에 휩싸였다. 사용자 주도의 생활밀착형 비빌기지가 ‘불법 점유’를 이유로 서울시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빌기지는 비공식적인 공간이 맞다. 그래서 마포구, 서울시 등의 행정과 공식화를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자발적 실험과 공식 논의는 진행 중이다. 비빌기지의 내일을 위해 이곳을 함께 운영하는 안연정 대표와 비빌기지를 설계한 홍윤주 건축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또한 해외에 참조 모델은 없는지 영국에 있는 최영숙 연구자를 통해 영국의 도시재생 사회적기업 지원 및 활용의 구체적인 현황을 소개한다.
안영정 비빌기지의 가장 오래된 주민. 업사이클링 제작소 문화로놀이짱의 공동대표. 사회적 자원으로써 제작소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이 삶을 바꾸었고, 그 에너지로 비빌기지라는 이행기 공간 만들기 활동을 조직하고 지속하며 사람들과 살고 있다. 스스로 조직하는 삶과 활동에 관심이 있다.
홍윤주 ‘生活 살아 움직이는 건축’을 주제로 ‘생활건축연구소’를 운영하며 생활밀착형 웹진 ‹진짜공간›을 통해 도시와 공간을 연구하는 방법론을 실험하고 일상을 읽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건축가 주도의 멋진 공간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공간을 편성한 개인에 집중한다. 전문가에게 실려 있는 힘을 일상을 구성하는 사용자에게 전도한다.
인터뷰어 박성태
인터뷰 일자 2016년 9월 26일
민간이 아닌 시민의 공유공간
박성태 ‘문화로놀이짱’ (이하 놀이짱)에서 ‘비빌기지’로 확장되었죠. 공간이나 일의 성격이 변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연정 ‘놀이짱’이 만들어진 것은 10년이 넘었죠. 2014년 ‘마포석유비축기지 재활용 사무소 라운드테이블’이란 이름으로 현재의 비빌기지 구상이 시작되었어요. 마포석유비축기지(이하 비축기지) 국제공모가 진행된 해 가을의 일이에요. 그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과 ‘마포석유비축기지 재생 및 공원화 사업’ 제안을 했고, 당시 대형버스 주차장 부지를 비축기지의 배후기지로서 시민활동을 위한 모색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외연을 갖추게 되었죠. 놀이짱은 ‘업사이클링 제작소’를 자립 운영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보니 1년 내내 작업하는데, 어떤 면에선 환기가 필요해요. 새로운 쓸모를 만드는 일은 ‘돈 버는 일’에 밀리기도 하거든요. ‘마르쉐@친구들’이 비빌기지 주민이 되면서, 그들의 에너지를 가까이서 알고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어요. 비빌기지라는 ‘이행기 장소’를 만들면서도 마르쉐@를 준비하며 농부와 요리사와 함께할 수 있는 사물을 상상한 거예요. 제작에 대한 새로운 호흡과, 느슨한 공동체이자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게 느껴져요.
2015년부터는 놀이짱이라는 조직의 운영 방식에 고민이 생겨 2016년 초, 긴 논의 끝에 공동운영 방식으로 새로운 운영 룰이 생겼어요. 처음엔 경제적 지속가능성이 어려운 조직에서 구성원들에게 부담이나 책임감만 지우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 작은 조직에서도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함께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가고 있어요. 효율성은 물론 지속가능성도 더 커진다고 생각해요.
박성태 마포구가 비어있던 이 공간을 사회적 가치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제공한 건가요?
안연정 그건 아니고요. 사회적기업 모델을 구상할 때 업사이클링 제작소를 운영하기 위한 지속가능 전략의 세 개의 축이 ‘유휴공간’, ‘현대판 장인이 되고픈 제작자’, ‘재활용 재료’였어요. 우연히 마포구에서 우리 사업모델을 알게 되어 만났던 거예요. 우리는 재료들을 수집, 해체, 보관, 업사이클링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더불어 새로운 제작소 모델을 시민과 공유하는 견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라며 주장·설득·요청했죠. 2010년 봄부터 마포구와 구유지와 시유지 중 활용 가능해 보이는 공간들을 4개월간 찾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이 비축기지를 발견한 거예요. 당시는 시유지였는데, 문제는 잠시 행정공백이 생겨 담당자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문의 및 허가에 대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 아주 드문 사례였죠. 그래서 마포구에는 비공식적으로 놀이짱이 이곳을 점유하고 공간모델을 만들어 보겠다고 요청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이제 꽉 채운 6년, 햇수로 7년이고요. 이후 비공식 점유(행정에서는 ‘불법 점유’라 표현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놀이짱이 사용하던 벽돌건물은 지적도상에도 나오지 않는 공원부지에 있었는데, 공유재산법 관련 조례와 공원녹지법 등을 검토해도 근거를 찾지 못했어요. 그런 가운데 놀이짱이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업사이클링 제작소로서 하나의 모델로 알려지기 시작한 거예요. 우연과 필연, 자체적으로 기반시설을 갖추며 일상을 지내던 시간들이 만났고, 2014년 가을에 공원화사업이 발표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행기 활동의 제안
박성태 그럼 비빌기지를 확장한 게 수도와 전기까지 완전히 들어온 2014년인가요?
안연정 네. 놀이짱이 사용하던 벽돌건물 물탱크실에 물을 받아 사용하기도 하고, 전기는 건너편 삼성물산 공사현장에서 가져온 적도 있고, 중간에 6개월 정도 수도가 끊겨 물 없이 활동한 적도 있어요. 2015년 6월에야 건너편 월드컵대교 공사현장에 부탁드려 수도를 연결했어요.
비빌기지라는 물리적 공간을 만들게 된 이력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경로에서 시작한 구상이 만나면서 시작됐어요. 먼저 하나는, 놀이짱이 비축기지에서 점유 활동을 지속하면서 시민 주도적 활동을 위한 융합제작소를 구상한 것이에요. 현재 마포석유비축기지 재생 및 공원화 사업 MP이신 임정희 선생님과 2013년부터 ‘생활기술융합제작소’를 구상했어요. 다른 하나의 경로는, 2014년 비축기지 재생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놀이짱이 주변에 ‘이행기’ 활동을 제안하는데요, 그때가 베를린의 이행기 공간을 탐방하고 온 직후로 비축기지 국제설계공모가 끝난 이후였어요. 탐방 공유회를 시작으로 이행기 공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떤 시민 자원을 갖고 운영하며, 어떤 논리로 자본과 공공개발 계획에 맞서는 활동과 대안 그리고 성과들을 만들어 갔는지를 공유했어요. 그러던 중 사회적경제지원센터로부터 이미 2013년 놀이짱이 제안하기도 했던 ‘생활기술 융합제작소’를 비축기지 주차장에 만들어 경과적 활용을 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시민이 스스로 공유지를 관리·운영하는 ‘아래로부터 개발하는 공유지’를 꿈꾸게 된 것이죠.
박성태 예산이 어느 정도였어요?
안연정 1억 2천이에요. 놀이짱 옆 주차장 부지 10칸을 마포구 협조로 임대하고, 컨테이너 10동으로 가설 건축물을 조성했어요. 3개월 정도 라운드테이블에 모인 주체들과 ‘이행기’, ‘지속가능한 삶을 상상하는 삶터, 일터, 놀이터’를 구상했고요. 이 활동을 지원하는 공유시스템으로 목공, 철공 등 다양한 제작소와 텃밭과 부엌을 연결하는 키친팜과 생태도서관 및 다목적 공유공간, 개별 작업공간도 설계했어요.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한 홍윤주 건축가가 설계하고 비빌기지 사람들이 손수 공간을 조성했어요. 그때만 해도 비축기지 주차장 부지는 모 기업의 미디어클러스터 조성 계획이 소문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비축기지 재생사업이 성공하려면 탱크를 문화공간으로 전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마당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2014년 여름부터 서울시에 비축기지 공원화 사업에 마당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도 그 이유에요. 다행히 서울시가 ‘시민이 운영하는 공원’이란 비전으로 사업을 추진했고, 민간 워킹그룹을 거쳐 2015년 민·관 추진단까지 거버넌스를 결성·협의하는 시도를 했어요. 물론 행정과의 협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죠. 2015년 봄에는 컨테이너 공사가 중단됐고, 여름에는 마당부지가 공원화 사업에 포함되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비빌기지라는 이행기 공간이 공사현장에 남을 수 없다는 행정적 입장과 대치하는 등 여러 차례 활동이 중단되는 아이러니가 계속 발생했어요.
박성태 제대로 작동한 건 1년이 조금 넘은 거네요.
안연정 네. 2015년 1월 서울시는 놀이짱과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 퇴거 공문을 보냈어요. 비축기지 공사가 시작된다는 이유였죠. 그때부터 행정을 설득하는 협의과정을 7개월간 보냈고, 그런 중에도 비빌기지 주체들은 활동을 지속하며 장소가 갖는 가능성과 콘텐츠를 만들었어요. 공사 마무리는 2015년 9월이고요. 완공 전 전기, 수도도 제대로 연결 안 된 곳에서 청소년 캠프, 이행기 텃밭 만들기, 소규모 워크숍과 토크 이벤트 등을 계속했어요. 이곳은 이행기 공간이니까요.
비빌기지 조성에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야외공간이었어요. 사람들이 만나고, 대화하고, 무언가 끊임없이 생산하는, 정원이자 식당이자 카페와 시장으로서의 활동들이 야외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길 원했어요. 개방된 공간이 갖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서울시는 비축기지 공사를 위해 2015년 10월에는 나가라는 입장이죠. 3년의 경과적 활동의 기대가 사라졌고, 1년 내내 공간을 조성해온 사람들에겐 큰 시련이었어요. 그럼에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발적으로 품을 내어 함께 일한 경험이 무척 소중하니 단 한 번의 여름이라도 함께 일구면서 지내보자 했기 때문이에요. 마르쉐@ 이보은 대표의 위와 같은 격려가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힘이었어요.
박성태 현재 상황은요?
안연정 8월 10일 현재, 비축기지 내 마당부지에 대체부지를 마련하는 안이에요.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2017년 개관 예정인 이곳 사업명은 ‘마포석유비축기지 재생 및 공원화’이지만, 공원이란 이유로 활동제약이 많다는 것은 민·관 모두 인지하는바, 마당부지는 문화 및 집회시설로 설정되었어요. 재산 관리는 서울시 푸른도시국이 맡고요. 우리가 대체부지로 이전하며 행정에 제안한 내용은 재산관리를 기존의 푸른도시국에서 사회적경제 담당관으로 이전하는 것이에요. 서울시도 놀이짱에서 비빌기지로 전개된 활동을 인정하고 새로운 부지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가능하게끔 출발점을 마련해준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전 후 비공식적으로 점유활동을 해온 놀이짱과 민간자원과 행정자원이 섞여 조성된 ‘생활기술융합제작소’가 향후 합법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해요. 현행 제도에서 민간의 자생적인 움직임과 사회적 자원으로 확보해 온 자산들이 공유지에 자리 잡을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넘어야 하는 거죠. 비빌기지가 자치력을 키워 공간을 조성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큰 가능성을 보았어요. 자립구조를 만들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활동하고 성장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공간이 장소가 되는 요인
박성태 놀이짱에서 비빌기지로 넘어가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떤 역동이 작동하길 바라나요?
안연정 가장 많이 배운 것이자 성공 요인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물리적, 문화적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공간’이 ‘장소’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임하는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공간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콘텐츠만 가지고 공간을 활용하는 것과는 달라요. 왜냐하면 비빌기지 활동 대부분은 청소하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텃밭을 가꾸고, 싸우고, 운영 방식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에요. 업종 간 시너지를 기대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다른 삶을 꿈꾸고 시도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곳이요. 새로운 부족이 탄생하는 느낌이랄까? 이곳이 누군가의 비빌기지가 되길 기대도 하고요. 실재 이곳을 방문하는 해외 손님들과 전국의 활동가들이 이곳 에너지에 감명 받기도 하거든요.
박성태 놀이짱에서 비빌기지로 확장했고, 콘텐츠도 다양하게 서로 결합하고 있죠. 점유 전략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기획으로도 보이는데, 오해를 받기도 하죠?
안연정 오해의 문제인지, 신뢰의 문제인지 생각하고 있어요. 서울시는 비빌기지 주체들을 ‘기득권’이라 표현해요. 지난 7년간 비축기지를 통해 배운 것은 책임과 권한을 스스로 부여하면 참여한 시민도 스스로의 ‘시민력’을 엄청나게 키운다는 것이에요. 도시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 생산양식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토대를 직접 만들어요. 그런데 하나의 실험이 성과를 만들고 확산·복제되는 데 필요한 숙성의 시간철학이 아직 행정에는 없는 것 같아요. 기득권이란 표현에 강한 문제의식으로 해결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고요. 비축기지 재생 사업에 마당부지가 포함된 점, 민간 추진단을 구성하고, 콘텐츠 생산 및 활동 거점이 필요하다는 당위가 생긴 것도 놀이짱과 비빌기지 활동의 성과라고 생각해요. 공공성에 대한 공론장도 더 필요하고요.
권한과 책임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앞으로의 시민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공공성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조직의 성격이 아닌 커뮤니티 안에서 어떻게 협력하고 자치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시작한 사람에게 권한을 주고 격려해주는 게 맞고요. 그래야만 시작한 사람들이 더 개방하려는 의지를 만들어요. 그게 아니라 자원을 소유, 분배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는 게 지금 저의 입장이거든요. 놀이짱이 지금도 제작활동으로 자립경제를 유지하지만, 제가 더 집중하는 활동은 2013년 이후의 이행기 공간 구성이에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제작문화’라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기술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기도 했고, 실제로도 문제해결에 많은 도움이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놀이짱에는 기술을 공유하고 촉발시키는 일을 매개하면서 다른 생산자와의 협업을 연습하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박성태 그런데 여기에 지금과 같이 모였을 때의 역동과, 공공시설물이 들어오고 관이 개입했을 때는 비빌기지의 역동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홍윤주 비빌기지는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더 실험적이고 자유로웠다고 생각해요. 수년 전 놀이짱에서 이 공간들을 행정과 함께 몇 차례 공식화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비공식적으로 남아야 했어요. 2014년, 서울시와 건축가들은 유휴공간이었던 이곳에 그들의 계획을 세웠고 더 이상 비공식적이면 안 된다고 했어요. 맞아요. 하지만, 공식적인 행정 절차들은 바꾸지 않으면서 비빌기지의 활동만을 기존 틀 안에 넣으면 어떻게 될지 우려돼요. 비빌기지를 공식화 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컨테이너 개수가 몇 개냐? 공간면적이 얼마나 되냐?’ 이런 것만 물어요. 이곳에서 어떤 이들이 뭘 하는지는 질문 받은 적이 없습니다. 비공식적이어서 가능했던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활동들을 공식화하면 과연 이어갈 수 있을까요?
저는 활동가나 행정가가 아니라서, 공공기관과 대면할 기회도 별로 없고 절차도 잘 몰랐는데 ‘서울시’는 하나가 아니더라고요. 각 부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오래 걸렸고, 이후 행정절차라는 건 더 복잡해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이 많았어요. 협의 중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이런 방법은 어떤가?’ 하면, ‘조례에 없다’ 하고, 그래서 다른 방식을 제안하면 또 안 된다고만 해요. 그래서 국내외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도 듣고 사례도 조사했는데, 그러면서 한국의 조례들은 시민을 믿고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으로 둔다는 것을 알았어요. 조례가 그러하니 행정기관이 시민을 대하는 것도 다르지 않은 거죠. 조례와 행정가의 관계를 두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건지 몸통이 꼬리를 흔드는 건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안연정 비빌기지는 놀이짱과 사회적 후원이란 자산들로 형성한 공간, 서울시가 사회적경제지원센터를 통해 조성한 공간, 그리고 비빌기지 주체들이 형성한 공간으로 조성되었어요. 이전 후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민간이 공유재산을 임대해서 운영하는 자치공간, 그리고 공적자원으로 조성된 공유공간, 이렇게 두 개의 레이어가 공존할 거에요.
박성태 그럼 그 안에서 만든 콘텐츠로 공공성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요.
안연정 네. 시민들이 이 땅의 권한과 책임을 지고 ‘탈석유시대’를 준비하는 활동들을 지속한다면 다양한 대안도 나오지 않을까요? 비축기지라는 석유시대 산물을 재생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석유시대 이후를 생각하는 콘텐츠들이 당연히 생성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좋은 콘텐츠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니까요. 지난 7년간 행정 공백으로 만난 행운과 그로 인한 시련들을 겪으며 생각을 확장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해요. 이곳 실험을 통해 저는 여기서 ‘환대와 우정’을 경험했거든요.
탈석유 시대에 필요한 콘텐츠
박성태 서울시가 최근 여러 공공시설물과 관련해 운영전략과 공간기획을 내놓잖아요. 몇 년을 계약하면 그 주체가 자체적으로 하는 쪽으로요.
홍윤주 제가 처음 이곳 라운드테이블을 제안 받았을 때 설레었던 이유가, 보통은 공공이 공간을 만들어놓고 일단 들어와서 쓰고 나가라고 하지만, 이곳은 오히려 아무런 계획이 없어 상상의 여지가 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모두가 손에 흙 묻혀가며 애정을 쏟는 게 보여요. 여전히 외부 프로그램들이 결합 중이고, 지속적으로 있는 이들도 계속 대면하면서 관계가 생기거든요. 내가 알던 친구가 아니라, 이곳에서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저도 더욱 적극적으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으니 이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도 책상 하나 더 내어주게 돼요. 확장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봐요.
박성태 지금 형태는 여기 모인 분들이 일시적인 장소가 아니라 자기와 밀접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럼에도 ‘이행기’ 공간이란 표현을 계속 쓰는 이유가 있나요?
안연정 2014년 비빌기지를 상상하는 모임이 시작된 시점부터가 이행기 활동이었죠. 놀이짱이 비축기지 점유 활동을 해 온 것은 유휴공간의 활용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행기 공간이 개발이 묶여있거나 개발 예정인 공유지를 시민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활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유지 모델을 제시하고, 책임 있게 운영하는 것까지라고 생각해요. 행정은 비빌기지의 경과적 활용과 이행기 과정이 끝났다고 인식하는데, 이는 비축기지 개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박원순 시정이 얘기하는 ‘시민 주도의 정책’, ‘시민 주도의 행정’, ‘시민력’이 실제화되려면 주도적 운영 사례가 나와야 하는데, 그전까지는 이행기 공간이라고 봐야 한다는 거죠.
박성태 공원 안에 전시장 사이즈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안연정 ‘탈석유 시대’를 준비하는 비축기지라는 문화공간에는 무엇이 채워져야 할까요? 전형적인 미술관이나 공연장과는 분명 다른 지혜가 담길 거라 예상해요. 탈석유라는 키워드가 함의하는 것들을 상상해보면 바텀업 방식의 콘텐츠만으로 성공하지는 못할 거예요. 추진단 (문화비축기지 운영모델을 만들어 온 민관 거버넌스 구성체)에서는 생태와 공유라는 패러다임의 변화,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시민들의 기지를 조성하기 위한 운영원리와 방식을 만들어 왔어요. 비축기지와 비빌기지에서 건축학교를 만들면 좋겠다고 상상하는 이유도, 고정된 건축물이 아니라 쌓고 허물기가 가능한 유연한 공간, 빈 공간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삶의 기술을 익혀 공급을 당연하게 수용하는 삶의 전환을 시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박성태 비빌기지가 마당을 확보하고 가는 당위도 있는 거네요. 한정적 점유가 아니라 상호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큰 전략의 틀도 있고요.
안연정 네, 시민력이 발현되는 공유지의 기운과 활동이 계속해서 틈새를 만들고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성장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정치·사회·경제·문화·환경적 문제들에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줄 마당이 비축기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박성태 결국 비빌기지나 놀이짱이 지향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키워가게 하는 거죠? 관계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공공 프로그램의 실험실로 밀어붙여도 될 것 같아요.
홍윤주 커뮤니티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그들이 알아서 연구하고 계획을 세운 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좋겠어요. 통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것이고, 지역과 함께 균형을 찾을 테니까요.
박성태 공공이 민간에게 넘기는 땅이 있잖아요. ‘서울혁신파크’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서울시가 보증을 서고 저리에 넘겨받아 운영하는 거죠.
안연정 건축과 조경 중심의 물리적 재생으로 인해, 예산은 시설관리 위주로 편성되고, 대기업 중심의 민간위탁은 수많은 공공공간의 적자를 양산했어요. 비축기지와 비빌기지는 시민들이 이니셔티브를 획득한 과정을 지지하고 허용해, ‘민간’이 아닌 ‘시민’이란 이름으로 공유지를 개발·관리하고 키워나간 선례가 되면 좋겠어요. 공공공간에서 시민들이 ‘시민고객’이 아닌, 운영 주체이자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비빌기지의 자발적 공동운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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