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삶것에서 의미심장한 프레젠테이션 자리를 열었습니다. ‘말(로)하는 건축가’라는 재밌는 부제를 붙인, 인공지능 건축설계 실험의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였습니다. 실험의 방법이자 목표를 한줄요약하면 ‘마우스 입력 없이 자연어 소통으로만 설계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건축 컴퓨테이션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건축설계는 어떻게 달라질지를 건축의 보편적 산출물을 통해 보여줬습니다. 이어진 토론 속에는 새로운 가능성의 출현을 환영하는 박수소리, 미지의 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 신기한 기술의 작동방식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질문이 뒤섞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삶것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가 디지털 전환의 맨 뒷줄에 멈춰 있는 건축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시도는 이전의 건축가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설명하지 못했던(않았던) 것을 설명하게 해줄 겁니다. 조금 과장하면, ‘건축의 언어’와 ‘자신만의 건축 어휘’라는 것이 정보화되고 구조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공지능의 잠재 성능은 입력된 과거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과거 총합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기에 인공지능의 힘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거는 수많은 ‘현재였던 것’의 누적이고, 인공지능은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현실엔 직접 닿을 수 없습니다. 60억 인간의 온갖 입력 활동이 인공지능에 피드를 먹여주기 때문에 과거의 최말단(방금 전까지 현재였던 곳)에서 초고속 업데이트가 계속 일어날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입력 활동 앞단에는 리얼 월드가 쉴 새 없이 생성되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처럼 말이죠. 인공지능 입장에선 리얼 월드의 속도는 빛의 속도나 다름없습니다. 인공지능의 연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실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주 전체의 현재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요. 우리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이로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이자 정보처리장치기 때문이고, 현실세계를 가상세계에 인식시키는 인터프리터이자 가상세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제너레이터기 때문입니다.
‘구 트위터’라고 쓰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냥 트위터라고 부르는, 엑스가 그 소유주 일론 머스크의 나치 경례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머스크의 전횡과 횡포는 트위터를 전격 인수한 2022년 10월부터 계속 이어졌고, 2025년 1월 트럼프 취임식에서 흥분을 참지 못한 격정의 손짓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곧바로 트위터가 엉망으로 망가져가는 모습을 꾹 참아가며 남아 있던 ‘트위터리안’들의 분노의 대이탈이 발생했습니다. 더 이상 서비스 관리 부실이나 불합리한 운영 정책, 마구잡이식 기능 추가, 도통 셈법을 알 수 없는 유료화 같은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과 신념의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엑스는 최근 xAI라는 머스크 소유의 인공지능 회사에 다시 매각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사람이 만드는 플랫폼에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플랫폼은 중립성을 ‘지향’할 뿐입니다. 소위 플랫폼이라고 불리는 곳, 특히 플랫폼 경제나 플랫폼 서비스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매커니즘을 보면 중립 지향성마저 허상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플랫폼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중립적이고, 건강하고, 공정한 것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택과 결정이 중요하고, 그것은 이용자의 ‘이동’과 ‘움직임’으로 드러납니다. 플랫폼의 중립성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자기 복원력을 잃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플랫폼 위의 이용자는 대안과 차선을 찾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 무너져내리는 플랫폼에 휩쓸려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받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엑스의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말과 정보를 경계합니다. 모든 타임라인 위에는 머스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정확한 말과 중성적인 정보도 엑스라는 플랫폼 위에 있는 한 의심받고 평가절하됩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트위터만의 이야기도, 소셜미디어만의 사정도 아닙니다. 통신, 방송, 미디어, 운영체제, 웹브라우저, 검색엔진, 인공지능 챗봇 등은 하나하나가 트위터보다 훨씬 거대하고 중대한 플랫폼입니다. 국가 운영을 위한 국회, 법원, 정부라는 것도 각각이 하나의 플랫폼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중립성, 혹은 힘의 균형을 어렵지 않게 연관 지을 수 있고, 이것들에 어떤 식으로든 용납할 수 없는 편향이나 무법이 나타났을 때의 심각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트위터의 몰락을 보며 칼날 위에 선 플랫폼의 운명을 생각해봤습니다. 건축계로도 눈을 돌려봅니다. 건축계에도 여러 성격과 형태의 크고 작은 플랫폼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제공하고 있나요? 우리는 그것에 무엇을 기대하나요? 우리는 어떤 플랫폼을 만들어왔나요? 혹시 폐기해야 할 플랫폼은 없나요? 잃어버린 플랫폼은 없나요? 무엇보다 우리는 그것들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걸까요?
자유와 행복, 평화와 안전, 헌법과 질서, 민주주의. 2024년 12월 우리 몸과 마음에 매일매일 새겨넣는 한마디 한마디입니다.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울려 퍼지는 시민들의 맹렬한 외침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그저 공기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힘겹게 쟁취해낸 것이었다는 각성과 깨달음이 우리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고 종일의 피곤을 짊어지고 여의도로 향하게 합니다. 건축이 오랫동안 말해온 ‘공공’이라는 가치 속에도 모두의 자유, 평등, 행복, 안전, 질서를 추구하길 바라는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사회의 일반 구성원에게 공동으로 속하거나 두루 관계되는 것’이라는 밋밋한 뜻의 공공이라는 말은 사실 별로 재미없고, 잘 나아지지 않고, 좀처럼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는 상기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잃어버리게 되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상을 좇고, 퇴보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반이 없다면 공공이라는 가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건축의 공공성’이라는 기치가, ‘건축과 사회’라는 연결 쌍이, ‘건축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말이, ‘사회를 담는 건축’이라는 수식어가 무의미한 관용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건축신문』도 엄중한 시국을 마주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힘과 목소리를 보탭니다.
매스스터디스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이야기로 건축계가 떠들썩합니다. 지난 1월 선정작 발표 때 한 번, 6월에 완공과 오프닝 소식으로 한 번, 그리고 7월부터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리는 역대 서펜타인 파빌리온 사진전으로 또 한 번 회자되고 있습니다. 프리즈가 열리는 9월에는 서펜타인 갤러리 관계자들과 아시아 건축가들이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글로벌 무대를 갈망하는 건축계로서는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겠죠. 작은 갤러리 앞마당에 임시 가설물을 하나 만든 것에 이렇게까지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여느 파빌리온들과 다른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높은 선정 기준, 프라이빗한 초청 절차, 오랜 역사와 전통, 시민과 방문자를 맞는 개방성, 운영 이후의 처분과 활용 정책까지가 한데 어우러져 세계 건축계에서 명예로운 위치를 점합니다. 초청 건축가 중 다수가 이후에 프리츠커상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건축계에 함께 몸담고 있는 일원이라면 이 자리에 초청받은 건축가에게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게 됩니다.
이와 별개로 ‘파빌리온’이라는 키워드 차원에서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려봅니다. 파빌리온이라는 존재가 어쩌다 곳곳에서 지금 같은 권위들을 갖게 되었을까요. 가볍고 재미있고 젊었던 파빌리온이 무겁고 진지하고 나이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파빌리온은 어쩌다 미술관의 언어와 도구가 되었을까요. 건축가는 어쩌다 파빌리온에 기대어 자신의 건축을 대변하고 종합하고 갱신하게 됐을까요. 최초의 파빌리온은 어땠고, 지금의 파빌리온은 어때야 할까요. 파빌리온이라는 단어에서 여러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올해 프리츠커상의 영예는 야마모토 리켄에게 주어졌습니다.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심사위원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언론이 전한 심사평을 보면 야마모토의 작업들 속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경계 흐림과 이를 통한 공동체성의 성취가 주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리츠커상 심사의 무게추는 2000년쯤부터 건축가의 작품이나 담론 중심에서 건축의 지역성과 공공성으로 서서히 옮겨져왔습니다. 이번 시상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야마모토 리켄은 판교 월든힐스 2단지(2009)와 세곡동 아파트 3단지(2014)를 설계하면서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여기서도 공동주택의 공용 공간, 공/사의 경계 영역에 주민들이 같이 모여 살고 있다는 인식, 모종의 커뮤니티를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곳곳에 넣었고, 이런 시도가 지금까지도 건축계에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프리츠커상 소식을 놓고 건축계와 언론에 올라오는 말과 글에는 ‘또 일본 건축가’, ‘한국 건축은 언제’ 같은 시기 어린 푸념이 깔려 있습니다. 수상자의 국적만 세보면 일본이 가장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1987년 단게 겐조를 시작으로, 1995년 안도 다다오, 최근 2014년 반 시게루, 2019년 이소자키 아라타 등 37년 동안 아홉 명의 일본 건축가가 이 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홉 명의 면면을 보면 세계 건축계의 흐름과 역사 속에서 점하는 위치나 의미가 매우 넓고 다채롭습니다. 상이 시작된 1979년 이후 일본의 건축이 그만큼 세계 건축의 동향과 지형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프리츠커상은 건축가 개인의 영광이니 국가적 과업나 자존심 대결로 여길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인류 문화와 환경에 공헌한 건축이라는 것이 한 개인 건축가의 역량만으로 성취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해마다 우리가 안으로 밖으로 쏟는 푸념은 그저 우리 발 앞에 떨어질 뿐입니다. 그동안 쌓인 푸념들이 체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공공건축은 포퓰리즘에 취약합니다. 정부가 펼치는 정책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모든 공공건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정치적 도구이자 표현입니다. 정치는 우리 생활의 일부이고, 공공사업이 다 포퓰리즘의 산물은 아닙니다. 최근 있었던 서리풀 개방형 수장고 설계공모도 미술관과 전시의 시대에 발맞춘 정치의 행보이고, 노들섬에 “글로벌 예술섬”을 새로 그려보는 것이나 ‘민주적 건축’이라는 꿈을 펼쳐보는 것이나 정치적 시도의 서로 다른 양상일 겁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물음표가 생깁니다. 노들섬 재공모는 운영을 시작한 지 2년을 갓 넘긴 시설을 덧씌우는 무리하고 부당한 처사로 보이고, 서리풀 국제 공모는 애초에 그것이 그럴 만한 사업인지, 또 그렇게 필요한 사업인지 의구심도 듭니다. 공모와 심사 과정 일부를 이벤트로 만들어 유튜브로 중계하고, 선정 결과를 뭉뚝하게 요약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은 둘 다 허공에 쏘아 올린 요란한 폭죽 같다는 것입니다. 이 사업들의 부당함, 과도함, 의구심에 대해서는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고, 시민들도 건축계도 그저 경연 예능 프로의 구경꾼이 되어 있습니다. 공공건축이 포퓰리즘으로 미끄러지느냐 마느냐는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세금과 사회적 비용, 환경적 부담,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몰고 올 효과를 떠올려보면 더 그렇습니다. 설계 공모(公募)가 부지불식간 공모(共謀)로 전락하는 것도, 공개 포럼과 공개 심사가 여론을 호도하는 선전 도구가 되는 것도 한순간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놓지 않고 밝은 눈과 귀로 예민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을 찾고 시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의 진위를, 어떤 여론을 등에 업은 정책들의 공정성과 보편성의 함량을 말이죠.
오픈하우스서울이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은 ‘도시의 문턱을 낮추고 건축을 만나다’라는 모토를 문구 그대로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도시와 건축의 높은 문턱 너머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만날 수 없었던) 멋진 건축 공간과 스토리가 가득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그곳을 만들고 가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며, 건축과 도시가 넓게 열릴수록 많은 사람에게 공감과 영감을 줄 것이라는 것이 오픈하우스서울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건축의 사회적 면모이자 건축 문화의 매력에 대한 그들의 확신이며, 그것을 부드럽고 즐거운 행사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방법입니다. 10년 전 ‘오픈하우스’라는 말은 건축가나 집주인이 지인들을 초대해 갓 지은 건물을 선보이는 것을 칭하던 업계 용어였습니다. 이제 거의 보통 명사가 되었고, 방방곡곡에서 크고 작은 오픈하우스가 열리고 있습니다. 단편적이고 부수적인 현상 같지만, 오픈하우스서울이 튼 ‘다같이 즐기는 건축 문화’의 물꼬가 우리 일상 공간에까지 스며든 변화의 일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모여 사는 도시와 건축 공간의 진면목을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곳곳에 남아 있는 문턱을 야트막히 갈아내주길 바랍니다.
노들섬이 시끌시끌합니다. 모두 알다시피 현재 노들섬은 2015년 ‘노들꿈섬’ 공모를 거쳐 2019년 9월 문을 열고(*당시 기사들: 「섬이 된 공공공간」, 「다가올 장소들에게 남겨진 것」, 「도시에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식」), 현재 음악과 미술 중심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꿈’이었다면, 이번에는 오세훈 현 서울시장의 ‘야심작’인 셈입니다. 지난 4월 20일 있었던 ‘노들 예술섬 디자인 공모 대시민 포럼’ 때 시장은 이렇게 마무리 멘트를 했습니다. “서울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만끽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흥미진진했죠?! 이 거장들의 발랄한,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함께 즐기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서울의 미래를 노들섬으로부터 만들어 가겠습니다. 제가 왜 시장 안 하겠다고 나갔다가 다시 와서 (시장을) 네 번째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세요? 이렇게 재밌어요. (중략) 한 분 한 분의 아이디어가 정말 버리기엔 아까운 아주 소중한 아이디어인데, 조금씩 변형이 될 수도 있고, 이용될 수도 있고 융합될 수도 있는데… 아이디어를 많이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 뒤늦게 그간의 경과를 찾아봤습니다. 2022년 8월에 노들섬 글로벌 예술섬 활성화 방안 전문가 자문회의 후 노들섬 조성팀이 꾸려졌습니다. 9월에 노들섬 글로벌 예술섬 조성 기본계획 수립 용역 입찰 공고가 진행되었습니다. 도중에 계약방식이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변경되었고, 긴급공고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용역의 과업은 크게 1)기본방향 및 목표 설정과 개략적 계획 규모 설정, 2)기본계획 수립, 3)타당성 조사․분석, 4)설계공모 지침 작성 및 추진 방법과 일정 계획이었습니다. 기본계획 세부 사항에는, 글로벌 랜드마크 구상 방향, 음악·미술 중심공간 재구성과 노들섬 특화 콘텐츠 발굴, 노들섬 접근성 개선 검토, 한강 및 주변지역(시설)과 연계한 도입 시설 검토, 건축·구조물 계획 수립 및 사업비 추정이 포함되었습니다. 10월, 입찰 결과 재이건축사사무소, 알에이유엠엔지니어링, 메타기획컨설팅, 세 회사의 컨소시엄이 단독응찰하여 수의계약(325,851,900원)이 체결되었습니다. 올해 1월 이 용역이 어떤 사정에서인지 계약 해지되었고, 노들섬 현장에서는 간담회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개월 후 공모 작품들이 제출되었습니다. 참여 건축가는 SoA, 더시스템랩, 네임리스, 디자인그룹오즈, 덴마크 BIG, 영국 헤더윅 스튜디오, 독일 위르겐 마이어, 이상 7팀이었습니다. 각 팀의 작품은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가 2023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철수는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에서 학생들과 더불어 주거론과 주거문화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그저 ‘공부’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성실하게, 집요하게, 넓게 가지를 뻗쳐간 연구자가 한국 건축계에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근저를 펴냈던 박정현은 “한국 주거사 연구는 단언컨대 박철수 교수님의 『한국주택 유전자』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잠깐이라도 그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작년 3월 이 책으로 북토크를 열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그 자리에 참가한 모두에게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를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는 행사 말미에 자신의 하드드라이브 폴더를 슬쩍 보여주었습니다. 셀 수 없는 폴더들 안에 그는 뭔가를 꾸역꾸역 계속 추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아마 며칠 전 새로 발견했을 작은 자료 한 조각을 꺼내 청중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의 연결고리인지, 그것을 확인하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노고를 쏟았는지 신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기 이 폴더들을 후학들에게 하나씩 숙제로 나눠주겠다’는 무시무시한 맺음말로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중 한 폴더가 벌써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오나며 채근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는 천생 학자였습니다. 그의 책 제목과 그의 말이 씨가 되어 우리 주거문화사의 각론이 후학들의 손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들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공저, 세진사, 1999) – 『아파트의 문화사』(살림, 2006) – 『아파트와 바꾼 집』(공저, 동녘, 2011) –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마티, 2013) – 『건축가가 지은 집 108』(공동기획, 도서출판 집, 2014) – 『근현대 서울의 집』(서울책방, 2017) –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도서출판 집, 2017) – 『한국 의식주 생활 사전: 주생활 ①, ②』(공저, 국립민속박물관, 2020) – 『경성의 아파트』(공저, 도서출판 집, 2021) – 『한국주택 유전자 ①, ②』(마티, 2022)
『공간』의 역대 편집부가 2022년 김정철건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건축문화의 발전과 성숙, 건축과 사회의 소통, 건축의 문화적 저변 확장에 기여하고 있는 개인 혹은 단체”에 수여하는 상의 취지가 이보다 더 어울릴 수상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 건축문화 전반에 걸친 『공간』의 기여와 공헌에 대한 인정은 때늦은 감마저 듭니다. 그럴 만한 장치나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너무나 당연한 존재로, 대체불가한 역할로 인식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공간』이 지나온 56년이라는 세월의 굴곡이 크고, 그 속을 거쳐 간 인물들의 면면이 매우 다채롭고, 각 시절에 따라 잡지도 여러 가지 색깔로 변모해왔습니다. 그래서 『공간』은 어느 한 시대, 하나의 존재로 규정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공간』이라는 잡지의 편집부가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왔고, 그때마다 거기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노력, 헌신, 열정, 비전이 응집과 발산을 거듭하며, (의도하지 않았을진 모르나) 우리 건축문화의 인적 토대를 폭넓게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그렇게 196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건축 담론의 핵심 매체이자 건축문화 생산자의 소중한 산실이었습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 많은 건축 전문 매체가 스러져갔습니다. 『공간』의 어깨가 무겁고, 또 외롭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 역할을 계속 이어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 건축계 모두의 바람입니다. — 지금도 건축문화계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간』 편집부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근무 시기 순) 전진삼 『와이드AR』 발행인, 정귀원 『건축평단』 편집장, 이주연 건축평론가, 김혁준 픽셀하우스 대표, 박성진 사이트앤페이지 대표, 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초대 국장, 김정은 『공간』 현 편집장, 임진영 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김상호 정림건축문화재단 실장, 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대표, 심영규 글로우서울 CCO, 심미선 정림건축문화재단 팀장, 윤솔희 프리랜서 편집자, 박세미 『공간』 전 선임기자.
청와대가 뜨겁습니다. 문자 그대로 핫플이 됐습니다. 정치권력의 대명사로 엊그제까지 뉴스에 오르내리던 곳이 갑자기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향하는 수백 수천의 인파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권력의 새 자리는 용산이 떠안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대통령 집무실과 직속 행정 조직이 빠져나가면서 본래 기능이 멈췄지만, 청와대라는 장소를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청와대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구호도 단순히 장소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로 대변되었던 대통령의 공간이 앞으로 어떻게 생성되어갈지, 권력의 상징이었던 청와대는 앞으로 어떤 장소로 변모해갈지, 정치적 장소와 도시적 공간의 좌표 이동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힘의 역장 속에 공백이란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다른 무엇이 흘러들기 마련입니다. 한동안 온갖 크고 작은 힘들이 모여드는 혼돈의 상태가 지속될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어떤 모습으로든 힘의 균형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날, 청와대는 어떤 공간이 되어 있을까요? 거기에 쌓인 시간은 어떻게 갈무리되어 있을까요? 그곳이 진정 시민의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하게 될까요?
김중업 탄생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김중업의 신호는 드문드문 점멸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때마다 소리 없이 그 단서들을 추적하며 자료를 모으고 보충했습니다. 고증과 증언을 통해 하나둘 조각이 맞춰지면서, 희미했던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존재가 어느덧 도도한 실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현대 건축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김중업은 더 이상의 신화 속 인물이 아닙니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 그가 남긴 노트와 필름, 그림과 도면이 있고(현재 100주년 기념전시와 더불어 <김중업, 더 비기닝>을 온라인 전시 중), 그가 설계한 건물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선명한 사실의 조각들은 계속 추가되고 있습니다. 4년 전 열린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우리가 몰랐던 김중업의 멋스러운 건물들을 발굴해 소개했고, 지난주 방영된 <자화상, 중업>은 서산부인과의원과 제주대학교 본관의 새로운 자료와 함께 김중업에 대한 여러 증언과 평가를 인터뷰로 담았습니다. 만 52년을 맞는 삼일빌딩은 작년에 새 단장을 마쳤고, 전설의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지금 한창 복원과 증축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두 대표작에 후대 건축가들의 존경과 애정이 담겼고, 그의 다른 건물 몇몇은 문화적 유산이 되었고,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고, 어딘가에 더 남아 있을 그의 유산을 빠짐없이 모으고 싶어 합니다. 바야흐로 김중업의 시간입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김종성 컬렉션과 목천건축아카이브 종합건축 컬렉션 등 기관의 컬렉션 목록을 담은 자료집이 발행되었습니다. 아카이브 자료집은 지속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디지털 목록과 함께 자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목록화의 결과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생산될수록 아카이브가 수집 단계에서 활용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카이브라는 행위와 가치에 대한 담론도 국내 문화예술 아카이브 논의가 본격화된 2010년 전후부터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건축 분야 아카이브에서는 목천건축아카이브, 국립현대미술관, 김중업건축박물관, 서울도시건축센터 등이 각자의 성격과 목표에 맞게 자료를 수집하고 축적해나가는 중입니다. 2025년 개관 예정인 국립도시건축박물관은 건축 자료의 수집 방향과 관리 절차를 마련하는 등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건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건축 현장에서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경우는 리모델링이 대표적입니다. 기존 건물 자료를 충분히 수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리모델링 시점에 건물 데이터를 정리하는 아카이빙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아카이브는 먼지 쌓인 서고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생산의 기지로, 그 수많은 점을 이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붕괴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고’라고 부른다면 다른 사고와 달리 실수나 부주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의도나 계획성이 없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반복된 여러 종류의 방기와 묵인이 차곡차곡 쌓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입니다. 계획의 목적이 돈에만 꽂혀 더 중요한 다른 것을 모두 내팽개친, 그 과정에 발담근 모두가 무언의 합의를 이룬 결과입니다. 건물 공사장에서의 붕괴 사건의 원인은 부실 공사입니다. 부실 공사의 심판대에는 구조, 시공, 설계 분야가 거론되고, 건축의 기술 용어들이 소환됩니다. 이번에는 무량판, 역보, 비내력벽이, 그전에는 필로티, 커튼월, 캔틸레버가 혐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죄가 없습니다. 필요와 조건에 맞게 선택되었을 뿐입니다. 범인은 돈에 눈이 멀어 사용법과 규정을 무시한 자들입니다. 효율성, 가변성, 경량성, 융통성을 추구해온 건축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기술들이 부실 공사를 향한 언론 포화 속에서 부수적 피해를 입습니다. 안전하고 기본에 충실한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이 영역을 방어해내야 합니다. 건축 기술에 관한 사회의 이해는 뭉툭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심한 설명이 필요하고, 이를 설명할 사람은 건축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밀레니엄힐튼 서울(힐튼호텔)이 사라질 예정입니다. 서울스퀘어(대우빌딩)와 등을 맞대고 소월길 초입에서 남산을 끌어안고 서 있는 힐튼호텔은,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로 1983년에 완공된 한국 건축사에 보석 같은 건물입니다. 힐튼호텔의 ‘건축적 가치’는 최근 기사들이 충분히 말해주고 있지만, 압도적인 부동산 가치를 넘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불과 5년 전에는 증축 계획이 있었습니다.) 건축계가 이 건축물의 의미를 늦게나마 강조하는 것도 냉혹한 자본의 힘 앞에 선 연약한 건축의 운명을 몰라서는 아닐 겁니다.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글을 남기는 것은 힐튼호텔이 이미 소리 없이 사라진, 또 맥없이 스러질 운명에 처한 더 많은 건물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힐튼호텔이 맞이한 안타까운 현실과 힐튼호텔에 남아 있는 희미한 아우라에 기대어 우리 시대 위대했던,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리 건축의 짧은 생애와 역사를 어딘가에라도 새겨보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지난달 막을 내렸습니다. 올해, 그리고 그동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입장과 참여하는 입장이 있고, 둘은 무척 다릅니다. 두 입장 안에서도 ‘이거 왜 하나’ 그룹과 ‘이거 잘하자’ 그룹으로 생각이 나뉘므로 전체적으로는 사분할된 시선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와 배경이 있는데, 행사의 기본 설정에서 먼저 몇 가지 요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을 동시에 다룬다는 속성, 서울시가 주최하는 국제 행사라는 구조, 총감독을 국내외 각 1인씩 이중으로 선임하는 체제(올해는 외국인 1인 체제) 등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전시 기획 차원의 이슈가 있습니다. 폐막 즈음 정다영 학예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건축 전시를 둘러싼 ‘효용성과 심미성 논쟁’, “노잼”이나 “데이터 각축전”이라는 세간의 평가들을 언급하면서, ‘꼭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건축계 리소스 측면에서의 의구심도 있습니다. 건물 짓기라는 건축의 본업을 넘어 문화 콘텐츠의 우물까지 채우기에는 건축계의 잉여 자원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다음 비엔날레를 준비하기에 앞서서 지금 떠다니는 이런 물음표들에 대해 한 번씩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 2021년 11월 15일 게시
문화재를 둘러싸고 지자체, 정부 부처, 전문가 그룹 사이의 입장과 관점 차이가 드러나는 일이 또 있었습니다. 최근 일부터 짚자면, 광화문 의정부터에 추진되던 역사문화공간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이 의정부 옛터 유구 보호시설 건립 계획을 부결함에 따른 것입니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7년여 동안 연구, 조사했고 설계공모를 거쳐 새로운 문화 공간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은 사업 중단으로 당선작도 “백지화하게 됐”고, 이 사업은 “문화재청 구상에 따른 경복궁 복원과 연계하는 방향이 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인천에서는 일제강점기 조병창의 병원으로 쓰였던 부평미군기지 내 건물 철거 계획에 대해 보존 목소리가 커지면서 철거가 유보됐고,관련 TF팀이 꾸려졌습니다. 인천시는 해당 건물을 철거하고 공원 확장과 관청 건립을 추진 중이었습니다. (이 일은 경과가 길고 논쟁의 역학관계도 복잡합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여러 가지 물음표가 머리 위에 떠오릅니다. 2021년 우리에게 조선시대 왕궁은 무엇인지, 일본군과 미군의 병참시설들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이것들을 왜 복원하고 보존하려고 하는지, 문화재란 무엇이며 역사란 무엇인지, 보존과 활용 사이에서 건축은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 등등. 문화재를 둘러싼 역사적, 윤리적 당위성 논의 속에서 건축은 무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건축신문의 검색 결과도 0건입니다.) 건축의 목소리는 용도 폐기된 산업시설이나 수명이 다한 도시기반시설에만 갇혀 있는 게 아닐까요?
2021년 젊은건축가상 수상팀이 발표되었습니다. 젊은건축가상은 한해에 세 팀씩 12년간, 40여 팀, 80여 명의 건축가를 설계 현장의 전면에 배치해왔습니다. ‘젊은’의 정의부터 상의 성격과 심사의 기준 등에 대해서 여러 말이 오갔지만, 지금 한국 건축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상임에는 분명합니다. 여타 건축상들이 분명한 기조를 드러내지 않는 데 비하면 젊은건축가상은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매우 뚜렷하게, 꽤 성공적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마침 올해 수상팀 중 아키후드는 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등장하는 건축가들> 시즌3의 초대 건축가이고, 구보는 첫 시즌의 초대 건축가였습니다. 재작년에는 IDR이 포럼 도중에 상을 수상했고,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지요와 BUS도 작년 초대석에서 먼저 만났을 것입니다. 덜 알려진(물론 정보의 불균형이 있습니다만) 팀을 먼저 초대하고 있는 터라 초대 후보였으나 하필(?) 상을 받는 바람에 후순위가 된 경우까지 생각하면 더 많은 이름이 겹쳐집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둘이 지향하는 방향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야든 다음 세대의 젊은 신인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에게 그 분야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되었던 제17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이 지난 5월 22일 힘겹게 막을 올렸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모든 분야와 영역에 변화와 전환을 강제하고 있는 지금, ‘비엔날레’와 ‘건축전시’라는 영역도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를 터널을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지금, 이번 개막은 긴 시간 준비해온 비엔날레의 취소나 중단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다음 비엔날레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건축계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피동적 요인 때문만이 아닙니다. 에너지, 자원, 폐기물, 환경, 기후변화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적 문제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급진적이고 능동적인 대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How Will We Live Together?’라는 이번 비엔날레 주제와 거기서 파생될 여러 논의들, ‘미래학교’를 제목으로 내건 한국관 전시을 비롯한 각국의 전시들 속에서 다음 베니스비엔날레에 대한 변화의 전조나 실마리를 찾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 2021년 6월 11일 게시
‘새로운’, ‘진짜’라는 간판을 내건 광화문광장 개편 공사가 한창입니다. 공사를 앞두고 반대 목소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굴착이 시작되고, 펜스가 쳐지고, 임시 버스 정류소와 임시 보행로가 생겼습니다. 세종로 공사를 했던 1966년 이후 지금까지 55년 동안 건설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공사도 언젠가 구현될 전면 보행 광장을 향한 ‘교두보’일지 모르니, 거의 상설 임시 광장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쏘아 올린 ‘진짜’ 광장을 쳐다보며 진짜가 아니었던 광장 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민주주의, 예술, 관광, 공연, 재난, 축제,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진 온갖 일들을 떠올리면, 어쩌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임시’의 효과야말로 이곳을 진정한 광장으로 만들어준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래는 최근 관련 기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