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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집’으로 만드는 방법

정수복

도시의 새로운 활용

옛날 농촌 마을에서는 일상에서의 거의 모든 이동이 걷기로 이루어졌다. 생활의 공간적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생활의 리듬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며 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에서 살아가려면 걷기보다는 자동차나 지하철 등의 운송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인 걷기가 줄어들고 운전대 앞에 앉아있거나 지하철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사람의 일상은,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자동차에 올라앉아 직장으로 향해서 주차장에 차를 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아 일하다가 점심시간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에 올라가 일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서 주차장에 차를 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들어가는 순서로 구성된다.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 평균 두 시간은 자동차 안에서 보낸다.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일상의 생활에서 대지를 밟고 걷는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에 지친 나는 10여 년 전부터 자동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자동차가 나를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동차를 이동시키는 일을 하고 있으며,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보다는 자동차를 등에 지고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두컴컴하고 구불거리는 지하주차장을 주차비를 내며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고 교통체증에 걸려 하릴없이 짜증을 내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에도 지쳤다. 개인용 자동차에서 해방되면서 나는 먼 거리는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사는 도시를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도시 범주의 재정의

우리는 ‘집’이라고 하면 흔히 자신이 사는 아파트나 개인주택을 떠올린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집은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의 말 대로, “우리가 사는 도시는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기용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동하고 머무는 공간을 자기 집으로 생각했다. 그가 움직이는 영역이 대체로 50–100만평 정도여서 그는 자신이 매우 거대한 집에서 산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집의 구석구석을 걸어서 이동한다. 출입구에서 복도, 거실과 화장실, 침실과 베란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닌다. 동네에서도 은행과 시장, 우체국과 약국, 미용실과 스포츠센터를 자연스럽게 걸어 다닌다. 집과 동네는 걸어 다니기 때문에 자기 집이 되고 자기 동네가 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 곳곳을 걸어 다녀 보지 않고 오로지 자동차로만 이동하며 산다면 도시는 영원히 빌려서 사는 ‘남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도시를 나의 도시로 만드는 방법은 두 발로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는 일이다. 그러려면 일단 자동차로부터 해방되어 홀가분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을 떠나 파리에서 17년 동안 자동차 없이 생활하면서 걷기를 통해 파리를 ‘나의 도시’로 만들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파리의 모든 거리를 두 발로 샅샅이 걸어 다녔다. 나는 서울에서보다 파리에서 훨씬 더 많이 걸어 다녔다. 그러고 나니까 비로소 파리가 내게 익숙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이어 파리는 내 인생의 두 번째 도시가 되었고, 그 걷기의 체험을 두 권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파리에서 귀국한 이후 지난 5년 동안 나는 서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면서 파리에서 보낸 기간 동안 달라진 서울의 모습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함이다.1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에 비해 걷기가 갖는 장점은 사고 위험이 훨씬 적고 아무 데나 서서 쉬거나 구경을 할 수가 있으며 미세한 부분까지 느끼고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걷기는 일상의 탐험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천천히 유유자적하며 도시 공간을 걷다 보면 자동차로 다닐 때 스쳐지나가던 것들이 눈, 코, 귀로 들어온다. 걷는 사람은 원할 때면 언제나 멈추어 서서 관심이 가는 대상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다. 산책자는 현실의 책무를 뒤로 하고 도시 공간에 펼쳐지는 풍경을 몽상 속에서 음미하며 걷다가 불현듯 나타나는 이미지와 인상을 채집하며 잘 드러나지 않는 흔적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고 시적 감흥을 느끼기도 한다. 도시 걷기는 폐쇄된 공간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탈주와 같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의 해방이고 자유로운 곳으로의 돌진이다. 산책은 그 순간만은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기술이다. 시간과 목적으로부터 해방되어 도시를 걷는 일은 일상의 조급함에서 벗어나는 여가 활동이고 직업생활로부터의 일시적인 해방이고 짧은 여행이다. 산책자는 도시를 걸으며 시간을 초월한 곳에 자리 잡은 삶의 근원과 다시 접속한다. 

산책자, 공간의 기억을 새긴 자

걷는 사람은 도시 걷기를 통해 자신이 사는 도시를 자신의 커다란 집으로 만든다. 자신이 사는 장소에 대한 느낌, 장소감sense of place이 한 사람의 정체성 구성의 중요한 요소라면 그 장소감은 두 다리와 두 발을 사용하여 앞으로 나아가면서 몸 전체로 그 도시의 공간과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우리들은 서울을 걸으며 서울사람이 되고 부산을 걸으며 부산사람이 된다. 걷는 사람은 도시에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그 도시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도시 공간을 걷다보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온갖 체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러 장소들에 익숙해지고 도시를 자신의 집으로 만든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에 의해 규정된다. 나는 지구인이고 한국인이고 서울 사람이고 서초구 주민이다. 인간은 구체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나의 공간이 내가 확고한 일체감을 느끼는 공간이라면 그것은 그 공간에 대한 나의 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도시의 길 위에 자신의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산책자는 자신의 온몸으로 도시의 기운을 감지한다. 산책자는 도시의 부분이 되고 도시 공간과 하나가 되면서 도시를 발끝에서 머리까지 받아들인다. 산책자는 도시 공간 속을 흐르는 분산된 에너지와 흩어진 정보를 하나하나 포착하여 질서 있는 모양으로 결합시킨다. 도시 공간을 구획하고 이어주는 대로와 골목길, 건축물과 조형물, 수많은 자극과 소음, 색깔과 움직임, 특정한 분위기와 흔적들, 수많은 기억과 체취, 예기치 않은 타자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도시 공간 속을 걸으며 걷는 사람은 자신의 몸에 공간의 기억을 아로 새긴다.

도시를 걸으며 손과 발, 눈과 귀, 피부와 코로 도시의 풍경, 소리, 냄새, 질감, 굴곡, 요철, 리듬, 온도와 습기를 감지한다. 거리의 신호등과 황단보도, 자동차의 흐름과 엔진소리, 갖가지 소음과 휘발유 냄새, 타인의 시선과 얼굴 표정, 몸동작, 옷차림, 건물의 외양과 진열창에 전시된 물건들에 대한 감각정보를 입력한다. 도시를 걷는 일은 지도라는 추상적 개념을 감각을 통해 구체적 실체로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도시를 걸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결한 공간과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유쾌한 장소를 지나게 되며, 그 도시의 됨됨이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걷기를 통해 각각의 공간이 간직한 의미를 알아차리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진정한 구성원이 된다.

걷는 사람이 되는 법

추상적인 논의를 벗어나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만약 당신이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은 요령이 도움이 될 듯하다. 먼저 자신이 사는 도시 전체를 보여주는 큰 지도를 벽에 붙이고 전체의 윤곽을 파악한다. 그다음으로 잘 아는 지역과 모르는 지역을 구별해 본다. 안 가본 구역, 낯설고 잘 모르는 동네를 일부러 찾아다닌다. 편안한 보폭으로 이미 아는 장소나 모르는 장소를 기웃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자동차와 사람들의 흐름, 가로수, 건물, 상점, 간판, 신호등, 진열창 등을 찬찬히 자세하게 바라본다. 밖에서 보는 건물과 들어가 본 건물은 다르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다 들어가 본다.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먹고 마시고 무엇 하나라도 산다. 도시의 역사, 문화에 대한 책, 여행기, 그 도시 출신 사람들의 전기 등을 다양하게 읽는다. 책에서 알게 된 장소를 방문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때로 함께 걸을 친구를 만들어 방문한 동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걷는다. 같이 걷는 사람에 따라 새로운 것이 보인다. 지름길, 정해진 길, 상투적인 행로가 아니라 자기만의 다양한 우회로를 만든다. 박물관, 미술관, 식당, 영화관 등을 갈 때는 그 주변을 걸으며 동네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접한 다른 지역과의 이음새에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가는 장소나 재미있는 동네는 여러 번 방문한다. 방문하여 걸어본 동네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사진을 찍고 노트에 메모를 남긴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본 것, 한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컴퓨터에 파일을 만들어 정리한다. 자신이 쓴 도시에 대한 기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걷고 싶은 도시,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작은 일에 참여한다.

이런 방식으로 도시를 걷다 보면 어떤 도시라도 모두 당신의 도시, 당신의 ‘큰 집’이 될 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부터 걸어보고 싶지 않은가?

정수복

사회학자이며 작가다. 1980년대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에는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연구하면서 『의미세계와 사회운동』, 『녹색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을 썼다. 2000년대 다시 파리에서 10년을 보내면서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가 되어 『파리를 생각한다』, 『파리의 장소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등을 펴냈고, 2010년대에 다시 귀국하여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 등을 펴냈다. 2007년에 출간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출판문화대상을 받았고 2015년 펴낸 『응답하는 사회학』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도시를 ‘집’으로 만드는 방법

분량4,985자 / 10분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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