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의 지혜, 건축박물관 재논의
박철수
분량5,731자 / 10분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유형칼럼
한국에서는 건축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근 몇 년 동안 건축 관련 행사와 건축전시가 급증한 것이 이를 반증하며, 내년 2017년에는 UIA 세계총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건축에 대한 개념과 역사를 제대로 전달할 박물관이 전무한 게 사실이다. 박철수 교수는 불과 1990년대에 독립을 이룬 에스토니아가 국가 재건을 위해 추진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건축박물관이었음을 2009년에 이어 2016년 «건축신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중요한 논의로 가져왔다. 「건축기본법」에서 박물관 설립과 관련해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서도 보듯이, 정부는 책임을 무기한 미루거나 건축문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탈린에서 느낀 자괴감
오래전 ‹탈린에서 느낀 자괴감›이라는 제목을 달아 신문에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겨레» 2009년 3월 28일 ‹문화칼럼›). 3월이라지만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인 에스토니아의 탈린 건축박물관1)에서 막을 연 «메가시티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한국현대건축전’을 참관하고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가졌던 단상이 흐려지기 전에 얼른 글로 바꿔 말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규정한 바 있는 ‘단기 20세기short 20th century’의 끄트머리인 1991년에 강대국의 연이은 복속으로 말미암은 질곡의 역사를 떨치고 ‘노래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한 뒤, 2004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에 동시 가입한 인구 130만 정도의 신생독립국 에스토니아의 문화적 저력이 내심 부러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이다. 1908년에 지어진 뒤 소금창고로 쓰이던 탈린 부둣가의 웅장한 건축물은 독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으로 바뀌었고, 박물관 내 서랍식 수장고에는 헬싱키 철도역사와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도시계획 등을 입안했던 20세기 핀란드 건축가 에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의 탈린 도시계획도가 온전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오래 묵은 도시계획도는 누구라도 살피고 공부할 수 있도록 보관되고 제공되었다. 강대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생독립국이요, 세계 100위권에 머물 정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가진 나라의 저력을 세계 10위권의 무역 강국으로 회자되는 한국의 건축가들이 모두 부러워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국가건축정책을 전담하는 부서가 엄연히 국가의 중앙정부기구로 만들어져 있으며 국가 종합건축정책과 계획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물론 국가의 종합적인 건축정책이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가 최초이고, 그것도 20세기 후반인 1977년의 일이니, 2002년에 국가건축정책을 수립한 에스토니아는 유럽에서도 퍽 앞선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의 경우는 2008년 8월에야 비로소 매 5년 단위로 국가건축정책 수립을 강제하는 「건축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10년 비로소 ‘제1차 건축정책기본계획’이 국가계획으로 수립되었다.
「건축기본법」 제13조는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에 국가건축정책의 수립과 조정 등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같은 법 제15조는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하여금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건축에 관한 주요 정책 수립 및 시행 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2년마다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구체적 활동이나 건축에 관한 주요 정책 수립과 시행 등에 관해 국회에서 어떤 의견 교환과 논의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건설박물관이 아닌 건축박물관
다른 법조문을 하나만 더 살펴보자. 「건축기본법」 제20조는 ‘건축문화 진흥을 위한 재정지원’이라는 조문으로, “국토교통부 장관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및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협의하여 건축물 및 공간 환경의 개선과 건축문화의 진흥을 위해 다음 각 호의 사업에 대하여 국고보조 등 재정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그 아래 열거한 항목 가운데 첫 번째가 ‘건축문화 관련 시설의 설립 및 운영’이다. ‘문화시설’ 하면 ‘박물관’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의 습속이라면 ‘건축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책임이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다. 하지만 조문의 끄트머리가 늘 그렇듯 무책임하다. ‘할 수 있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할 수 있다’고 했지, ‘해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스토니아의 경제 규모나 인구, 국토면적 등 정량적 지표에 비춰본다면 우리도 어엿하게 ‘건축박물관’ 하나쯤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세종특별자치시에 마련 중인 국립박물관 단지에 도시건축박물관 등 5개의 국립박물관이 2023년에 문을 연다는 소식은 듣고 있지만, 그것이 자칫 ‘건설박물관’으로 만들어지지나 않을까 노파심이 적지 않다. 국토교통부가 도시건축박물관의 소관 중앙부처이고 건축이 건설로 오역되는 이 나라에서 자칫 노파심이 현실이 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얘기가 번졌다.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건축’과 ‘건설’은 전혀 다른 의미체고,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학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인문예술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늘 부르짖는 국제적인 합의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관행이 현실로 바뀔 것이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믿으라 해도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분류를 보면 이런 의구심은 훨씬 증폭된다.
흔히 ‘건축설계’라 부르는 지식영역 혹은 분야는 ‘건축공학’이라는 중분류에 속하고 이는 다시 ‘공학’으로 복속되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영문으로 표기한 ‘건축설계’의 분류명칭이 ‘Building Architectural Design’이라는 것이다. 건축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지식이나 분야의 범주에 속하는 ‘건축이론’과 ‘건축역사’는 이보다 더해서 맨 마지막 갈래인 세분류로만 구분되고, 소분류-중분류-대분류를 오름차순으로 확인하면 ‘건축공학 일반-건축공학-공학’으로 복속된다.4 다시 말해, ‘건축설계=공학’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니 ‘도시건축박물관’이 ‘국토건설전시관’으로 변질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미 이런 우려는 현실로 불거졌다. 국토교통부가 서울 정동의 기존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문을 열 예정인 전시관이 “지난 60여 년간 우리 국토가 발전해온 모습을 이야기할 ‘국토발전전시관’”이다. 그러니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익숙한 세종특별자치시에는 국토발전전시관 본관이, 서울 정동에는 그 분관이 들어설 것으로 예상한다면 필자에게만 국한되는 비약일까. 이런 예상이 부디 빗나가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의구심은 점점 가중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물관이란 이런 것이라고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 필요는 없다. 위대한 대한민국과 집권한 정부의 토건사업 치적을 긍정적으로 알리는 홍보관이나 전시관과는 분명 다르리라는 막연한 생각은 모두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건설과는 다른 건축의 지혜가 올곧이 담겨야 하고, 다음 세대가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갖고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날로지의 실마리가 그득 담겨 있어야 한다. 첨단의 사고와 해묵은 건축지식이 자웅을 겨루어야 하며, 만지면 곧 부스러질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오래되고 귀중한 생각의 산물과 일상의 지혜가 담겨야 한다.
성찰과 공적 기능이 담긴 건축박물관
건축은 통상 ‘장소특정적site specific’이다. 이 명제를 「건축기본법」 제20조와 엮어본다면 또 다른 생각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무엇인가를 한 곳에 그러모아 시대와 사람, 그리고 건축물과 공간 환경을 모두 꾸려본다는 생각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 땅에 흩어진 채 여전히 풍경과 향기를 내뿜는 것들을 엮는 ‘네트워크 건축박물관’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박제된 건축물 전부 혹은 일부를 가져와 지난 시대를 추억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원래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선 채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는 웅변을 토하는 그런 건축물의 속내를 챙겨 전국 방방곡곡에 밀알 같은 박물관을 갖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라면 한때 논란이 되었던 ‹공간 사옥›이나 지금도 여전히 갑론을박하는 소공로 일대의 상가주택 등을 생각해볼 일이다. 요즘 걱정거리가 된 청년들의 일자리도 만들고 평생교육이나 시민학습에도 좋을 일이니 가벼이 보아 넘길 사안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는 가칭 ‘주거사박물관’을 떠올릴 수 있다.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에 있으니 광역자치단체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책임 회피 대신에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협력하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조선시대의 정궁이나 사대부 살림집만 보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면, 일제강점기의 문화주택이나 영단주택 혹은 관사촌이나 지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혜화동의 교수 관사나 탄광촌도 좋은 박물의 대상이다. 부흥주택이며 재건주택 혹은 희망주택 등 9평 주택의 역사를 담는 것이다.
‘대경성’으로 불렸던 일제강점기의 특수촌을 살펴 아직도 그 원형질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가진 것들이 있다면 하나씩 살펴가며 ‘생활사박물관’으로 조성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것은 모두 특정 장소에 뿌리를 내린 채 머지 않아 100년의 성상을 쌓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이 100년이 지난 육중한 건축물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지금 이곳에서 아주 새롭고 기발한 발상도 가능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장소특정적이고 수많은 기억과 추억을 간직한 대상이다. 그렇다고 건축물만 덩그러니 남겨 울을 두르는 박제된 박물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건축물과 기억 그리고 공간 환경에 대한 건축적 성찰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에서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공적 기능을 담는다면, 그리고 비록 제한적이긴 하겠지만 지역 주민과 청년들의 일터가 된다면, 누구나 어디서나 박물관을 갖고 누리는 삶이 보장될 것이다. 규모와 효율, 대단위 개발을 통한 성장과 과시, 거대한 목적 공간의 순위 싸움이 각광받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했고, 고치고 가꾸어 일상 속에서 삶의 향기를 복원하는 재생의 시대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국가나 정부가 여러 가지로 바쁘고 돈 들어갈 곳이 많다는 이유를 든다면 광역자치단체가 나설 일이다. 물론 「건축기본법」 제20조를 조금 손 보아 ‘건축문화 진흥을 위한 재정지원’ 주체로 중앙정부와 함께 광역자치단체를 포함하면 될 일이다. ‘할 수 있다’ 역시 ‘해야 한다’로 수정해야 한다. ‘문화’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에만 시간과 돈을 들여 삐죽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 돈도 없고 시간도 낼 수 없는 처지의 시민들에게 ‘돈 있으면 빵을 사 먹으라’는 충고는 화만 돋울 뿐이다.
새롭게 원을 구성한 20대 국회에 바란다. 이제는 우리도 일상 속의 건축문화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시민이니 진정한 의미의 수준 높은 건축박물관 조성을 서둘러 달라고. 더불어 2년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보고되는 국토부의 ‘건축에 관한 주요 정책 수립 및 시행에 관한 보고’가 있을 때마다 꼼꼼히 짚어보라고. 민생 아닌 법률이 어디 있으며,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도 민생이니 살펴 달라고 말이다.
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주거 건축과 문화’에 주목하며 공부하고 있다. 공동주택연구회를 통해 『한국공동주택계획의 역사』 『도시집합주택 11+44』 『MA와 하우징디자인』 등의 책을 펴냈으며, 『아파트의 문화사』 『소설 속 공간산책』 등과 함께 최근에는 『아파트와 바꾼 집』 『아파트_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등을 썼다. 지금은 『한국주택 유전자』 『근현대 서울의 집』 등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건축의 지혜, 건축박물관 재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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