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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후의 공공미술과 커뮤니티아트

권경우, 김월식, 민운기, 이재준 × 박성태

공공미술의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다. 예술 활동의 공공성 개념도 새롭게 정의 중이다. 권력과 자본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허덕이던 공공예술과 공동체예술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과연 어떤 길이 있을지 현재 공공미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기획자, 행정가가 모여 의견을 나눴다.


권경우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했고, 문화비평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성북문화재단에서 일하면서 지역문화예술의 구체적인 현장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예술생태계와 마을공동체, 청(소)년,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이어가는 중이다.

김월식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에 의한 커뮤니티의 전체주의적 목적성을 경계하고 발전과 성장의 동력이자 조력자로서의 개인의 가치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는 예술보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에서 발생되는 의미들을 존중하며 〈무늬만커뮤니티〉를 진행했고, 그외 생활문화재생레지던시 〈인계시장프로젝트〉, 중증 장애인 협업극 〈총체적난극〉, 동시대 아시아 예술가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 〈cafe in asia〉와 시흥시의 〈모두를 위한 대안절 질문 A3레지던시〉를 기획했다.

민운기  인천의 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을 회원들과 함께 꾸려가며 배다리 마을공동체,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활동을 하고 있다.

이재준  건축가/전시기획자. ‘집’을 주제로 전시, 건축, 공공예술, 출판 등의 다양한 작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문고판 책을 만드는 (주)리마크 프레스의 대표이며, 한양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은미술관’ 심의위원, 서울시 공공미술2.0 자문위원으로 재임하고 있다.

진행 박성태


박성태 한동안 공공미술이 다소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한쪽으로 제쳐놨는데, 최근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미술이 갖는 한계가 있었죠. 화이트큐브 안의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면서 예술의 공공성 같은 기치를 걸고 지역에 공공미술의 탈을 쓴 비공공적인 것들이 등장하다 보니,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초대한 분들은 그런 여건 안에서 나름의 대안을 만드는 분들로, 각자 어떤 맥락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고,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큰 틀에서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김월식 저는 지금 수원시 팔달구 지동이라는 곳에 작업실이 있고, 6년 정도 수원에 있었습니다. 수원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핫플레이스라고 하는 인계동에서 지동으로 왔는데, 이곳은 수원에서도 가장 열악하다면 열악한, ‘오원춘사건’이나 ‘팔달문사건’으로 매우 분위기가 어수선한 동네입니다.

저는 공공미술 안에서도 커뮤니티아트와 참여와 실천으로써의 예술활동에 더 관심이 있어서 동네 안에서 동네청년이자 지역민으로 활동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마을에 한 명의 노인이 떠나면 도서관을 하나 잃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분들을 오마주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동에는 현재 몇 팀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작업실이 촌을 이룹니다. 음악을 하는 분도 있고 영상을 하는 분도 있어서 같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40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하신 분의 삶에서 생활의 가치와 개인의 문화적 능력과 중요함을 느꼈는데, 그분을 모시고 작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시간 정도의 퍼포먼스를 했어요. 지동에서 타시는 오토바이를 그대로 타고, 철가방을 매고, 미술관으로 짠, 하고 들어오셔서 미술관에서 자장면 80그릇을 뽑았어요. 사장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량리에서 ‘철가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테이블이 3개인 식당을 운영하세요. 단연코 최고의 수타짜장을 만드시는데, 평소에도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면을 치시는 거예요. 그분들의 집기를 보면 그분의 삶, 더 나아가 수원 지동의 70–80년대가 보입니다.

이재준 저는 올해 서울시가 새롭게 추진하는 공공미술 2.0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의 시범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만리동 뒤뜰>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을 관찰하고 실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서울역 앞은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경의선이 지나가는 서울역의 뒤편은 바뀐 게 거의 없어요. 서울이라는 도시가 변화와 발전에 모든 초점을 맞추니 변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문제가 있는 것, 뒤처진 것이 되었어요. 그래서, 쓰레기 집하장이 되고, 고가의 하부에 가려지고, 철로로 단절되어 주변부가 되어버린 서울역의 뒷마당을 예술가와 함께 서울의 뒤뜰로 가꾸어 보려 합니다. 저희의 목표는 많은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 꼭 가보고 싶은 장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민운기 저는 인천에서 스페이스빔이라는 문화공간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2002년에 인천의 신도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월동에서 시작했다가, 2007년도에 구도심으로 일컬어지는 동구 배다리마을로 이전했습니다. 옮겨가게 된 계기는, 2007년 초에 <도시유목>이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배다리 마을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인천시가 경제자유구역조성사업을 하면서 남쪽의 송도지구와 북쪽의 청라지구 두 곳을 잇는 폭 50m의 8차선 직선 길을 내려고 동네를 파헤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당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배다리마을은 인천에서도 남다른 역사·문화적 자산과 가치를 품고 있는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빨리 가겠다는 논리로 마을을 두 동강 내며 파괴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간 저 나름대로 미술 영역에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몰랐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에 자성을 하게 됐죠. 그래서 이를 막아야겠다 다짐하며 배다리마을로 공간을 옮겨와 이곳을 거점으로 배다리마을 지키기와 가꾸기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마을을 너머 인천이라는 도시로 관심과 개입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활동하는 기본 관점은 우리 삶의 공간을 속도나 효율, 이익의 논리로 재단하고 파괴하면서 주민 교체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항하면서 대안적인 도시 삶의 형태나 가치를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예술을 생산자와 소비자, 작가와 관객 등으로 나누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긍정적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행정 및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 주체들과의 원활한 소통과 협력, 분담 등 이른바 거버넌스가 중요한데, 이 부분이 쉽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제반 활동과 사업, 공간 운영 속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활동을 기존의 명사화된 ‘공공예술’ 또는 ‘공동체예술’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권경우 저는 성북문화재단이라는 기초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성북이라는 지역 안에 장소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장소를 둘러싸고 다양한 자원이 걸쳐 있습니다. 이곳은 시민 혹은 주민이라는 주체가 결부되어 있는데, 이때 도시계획과 같은 행정의 다양한 계기가 개입합니다. 제 경우에는 그렇게 서로 마주치는 여러 지점과 관계들, 그리고 실제로 일이 진행되는 동역학을 고루 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힘의 관계가 만날 때 최선의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예를 들면, 계획과 수립 과정에서 예산 책정의 행정적 측면이 있고, 실제로 장소성이나 역사성을 내재한 주민 혹은 특정 주체가 있고요. 그 외에 미술, 건축, 연극 등 다양한 예술가 그룹이 존재합니다. 그 사이에서 네크워킹과 조율을 하는, 일종의 매개자가 저의 몫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 공공미술이나 공공예술 영역이 커뮤니티아트로 방향이 기우는 것 같아요. 따라서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예술 영역에 대한 관점이나 활동도 이루어지고 있고요. 성북동 같은 경우에는 갤러리나 미술관 등 공간 환경이 있고, 최근에는 다양한 예술가 주체들이 유입되고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이들 주체가 단순히 주거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생활공동체 차원으로 녹아들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때 그 지역에 맞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를 세밀하게 분배, 배치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작업이 물론 완벽한 대안은 될 수 없겠지만, 그동안 여러 공공예술 과정을 봤을 때 지금 시점에서 시도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기능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대표적으로 2015년 아르코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진행했던 미아리고개 하부공간 개선 사업 <미인도(彌+人+道) 프로젝트>(이하 ‘미인도’)가 있습니다. 이 작업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공공미술 혹은 공공예술의 한계와 문제점,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미인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행정적으로 서울시와 구청이 결부되어 있지만 법적, 제도적 문제는 미결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시장 명의로 ‘고가 하부공간 문화예술 활용방안 모색’을 지시했지만, 현장에서는 모든 것을 ‘법대로’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유동적이고 불법적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주민과 예술가, 문화기획자, 건축가 등이 모여 정기적인 네트워크 모임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공간실험을 모색하는 것이 현재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미아리고개 하부 공간을 개선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미인도(彌+人+道) 프로젝트> 중 부분, 2015 / 자료 제공: 성북문화재단

박성태 첫 번째 저희가 나눴으면 하는 것은, 결국은 공공미술, 공공예술이라는 것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공공성인가? 그렇다면 공공성 중에서도 어떤 공공성인가, 하는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월식 저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볼까요? 물론 저도 문화기획이나 공공미술 기획도 하지만, 제가 기획자를 할 때는 예술가가 밉고, 예술가를 할 때는 기획자가 밉고 그러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거기에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별화된 상상력을 그 안에서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늘 양자적 입장에서 다른 느낌을 받으니까 그런가 봐요. 저도 예술가로서 늘 작업을 해왔는데 기획자 입장이 되면 ‘예술가들이 왜 이렇게 하나? 이렇게 문제의식이 없나?’ 내지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처럼 최선을 다해 명예롭게 해야 하는데 너무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예술가로 참여할 때는 기획자가 예술을 너무 도구화 하는 것은 아닌지, 깊게 같이 고민을 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공공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것이 공공예술인데, 공공성에 비해서 예술성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 같고요. 전국이 다 비슷한 형태의 콘텐츠를 가지고, 이것도 일종의 트렌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재래시장활성화사업만 보아도, 서울부터 제주까지 똑같은 아케이드를 만들고 있잖아요. 지역적 상황이나 예술적 상황은 고민하지 않고, 민운기 선생님 말씀처럼 편리로 보는 것이죠. 공공성은 편리한 수단일 뿐 예술로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고, 많은 부분 공공미술을 했던 작가들이나 기획자들도 실질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제 경우에도 몇 년 동안 아예 기금을 보이콧하며 자생적으로 활동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재미가 없는 거예요. 

최근에 제가 어떤 지자체의 제안을 먼저 자발적으로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같이 일하는 예술가들의 “행복하지 않아요”하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예술가로서 내가 같이 일하는 예술가 동료와 스텝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무엇 때문에 해야 하나,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예술가가 스스로 자기 영역 안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을 함께 마련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으로 봅니다. 예술은 소모되는 것이고, 그냥 소모하기 쉬운 방식으로 예술가를 내모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이재준 사실 우리나라에서 공공미술, 공공예술이라고 하는 프로젝트의 99%는 공적 자금을 가지고 합니다. 결국 기획자, 예술가, 행정가 이 트라이앵글이 조화롭지 못하면 결과는 어느 쪽도 만족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민운기 저는 공공예술이든 공동체예술이든 그 명칭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도화, 장르화, 명사화되는 순간 특정 형태와 방법이 별도로 있는 것처럼 오인될뿐더러, 그것이 극복하고자 했던 기존의 예술을 다양성의 차원에서 용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의 ‘예술’이 공공적인 또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변화를 해나가야 한다고 보는데, 그래서 ‘공공을 위한 예술’ ‘공동체를 위한 예술’ ‘지속가능성을 위한 예술’ 등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명칭과 개념을 자꾸 의식하다보면 스스로가 자기 행동이나 활동의 범위나 행태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에 좀 더 나아가서 공공을 위한, 공동체를 위한 ‘활동’ 또는 ‘행동’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고, 그 안에서 예술의 근본적 성격, 이를테면 성찰성이나 창조성, 상상력, 나아가서는 참여와 과정 등 민주적 측면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한 형태를 염두에 두지 않는, 그때 그곳에서 필요한 효과적인 것들을 떠올려 풀어나가는 저만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권경우 저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기존 관점에서 보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공공예술은 공적 예산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마감이 정해진 프로젝트로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 종료 시점 이후의 문제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공공미술이나 공공예술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료 시점이 되면 예산 지원은 멈추고 예술가는 어딘가로 떠납니다. 그 후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프로젝트의 결과물만 외롭게 남아 있는 게 대부분이죠.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지역 주민의 관점은 더 부정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결국 이 부분들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퍼블릭(공공)’의 개념 확장이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앞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공적 예산이 투입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장소나 공간에 새롭게 등장하는 예술이 있거든요. 그들 대부분은 예술가의 자율적인 실천이나 활동에 의한 것이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퍼블릭’이라는 공공의 개념 자체는 어떤 면에서는 비어있는 영역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누군가 계속 만들어가고, 충돌하고, 합의하고, 갈등하는 영역으로서의 공공예술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공적 예산으로 인해 기간과 자원이 한정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향후에는 다양한 주체, 예술가, 행정가가 서로 갈등하고 문제를 안고 가며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죠. 그런 점에서 비어 있는 영역으로서 ‘공空’ 개념도 생각하게 됩니다.

박성태 저희 사무실이 서촌에 있고, 이 라운드어바웃 공간이 엄밀히는 퍼블릭 공간이 아니지만 동네 사람에게는 이 공간을 사용하게 하거든요. 갤러리 팩토리에서 전시를 하면 토크는 여기에서 하고, 보안여관에서 기획을 하면 여기에서 토크를 하는 식으로 쓰기도 하고, 윈도우갤러리를 동네 작가들이 와서 쓰기도 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공공미술의 90% 이상은 정부나 관이 돈을 주면서 무언가를 하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예술성, 정치적인 접목성을 품으려야 품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채 공공미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죠. 원래는 저마다 가졌던, 일반인과 호흡할 수 있는 것을 공공미술로 본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공공미술, 또 다른 관이나 정부나 단체에 호흡을 맞추며 공공성을 갖는다는 것은 왜곡의 부분이 있지 않나 합니다. 과연 회복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김월식 자율성이라는 측면이 여전히 공공예술의 질적이면서 내용적인 확장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과연 정책자금이 주는 성과에 대한 프레임에서 그 강박을 견디고 참을 수 있는 돈이란 게 있겠냐는 거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맺은 경우에는 그것들을 중간에서 잘 매개해주는 집단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계시장 같은 경우는 개인후원자가 있었죠. 그 후원자가 프로젝트를 원만하게 진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과 공간을 마련해주셨어요. 미술 프로젝트에 프로듀서 역할을 해주신 분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프로듀서, 디렉터 개념도 확실히 구분해서 본인이 프로듀싱을 해주고, 기획과 전반에 대한 것은 디렉터에게 위임하는 게 필요하죠. 그리고 제 스스로 평가하기에 공공예술 프로젝트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총체적난극>의 경우, 제가 2012년에 장애인과 했던 프로젝트의 예산을 경기도미술관에서 받아 행정과 예산집행은 신경 쓰지 않고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어서, 무언가 훨씬 더 고민하고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게 내용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의미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민운기 공공예술이라고 하면 자꾸 특정 유형을 염두에 두는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공공미술 제도를 처음 도입할 때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해서 도시 공간 속 조형물 설치 중심으로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공예술이라고 하면 국가나 지자체 또는 문화기관 등에서 지원하는 비용을 가지고 일정 기간 특정 장소나 마을에서 주민과 함께 진행하고 떠나버리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공’을 이야기하고 ‘공동체’를 떠올리니까 자꾸만 누군가를 ‘위하는’ 관점에서, 어떤 해결사 역할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역으로, 그런 것을 비트는 태도와 전략도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런 측면에서 ‘공공예술’의 출발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 각각은 사회적 영향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이 각자의 사고와 욕망, 생활 방식 속에 내면화 또는 관습화되어 있을 겁니다. 따라서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일상적인 변화를 도모하고, 그것이 외계 또는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모색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상호 변화를 도모하고, 더 나아가 여러 도시 공간이나 정책에 관심을 가지면서 적절한 방식에 대응하는 게 필요합니다. 더불어 대안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가운데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월식 그런데 이해와 공감이라는 부분이 걸려요. 시민이나 지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활동을 해줘야 하는 게 우리의 미션이 되는 것 같은…. 그러면 벽화 정도 해줘야 하고, 그 벽화를 잘 그리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또 예산은 한정되니 저렴하면서도 잘해야 해요. 그런데 아까 보이지 않는 가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벽화를 그리는 것 보다 ‘우리 동네에 과연 벽화가 필요할까?’를 먼저 생각하고, 청소나 정리정돈부터 시작해 쓰레기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또 이런 것들은 쉽게 커뮤니티형 프로젝트라고 괄호를 치고요.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견딜 수 있는 정책이 오히려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그런 가운데 훨씬 가치 있는 게 튀어나온다는 거죠.

박성태 공공작업 쪽은 지원의 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지원도 쉽게 얘기하면 신청과 지원의 방식입니다. 그것을 발견의 방식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김월식 사실 민운기 선생님은 그런 활동을 이미 십여 년째 인천에서 하고 있으시죠. 저도 공공미술, 공공예술 계에서 어떤 기획자가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촘촘히 보고 있어요. 저는 단연코 말씀드리지만, 이걸 다 이해하고 잘할 수 있는 프로세스 안에서 실험하신 분은 민운기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권경우 미아리고개 하부공간을 새롭게 바꾼 〈미인도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에서 총 2억 원의 예산을 지원했어요. 처음에 기획안을 작성할 때부터 지역의 건축가, 예술가, 성북문화재단 이들 삼자가 공동으로 기획한 겁니다. 성북 지역에서 지역의 문제 의식을 느낀 그룹과 주체들이 서로 만난 것이죠. 물론 서로 처한 위치와 영역은 다르지만요. 앞에서 말씀하신 자율성의 문제라든가 지역 주민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어느 정도 발을 딛고 있는 주체들이 만나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구조나 조건에서는 굉장히 힘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공모 신청이나 지원 과정에서 모두가 경쟁 관계에 불과하니까요. 사업을 따내서 일정대로 일을 끝내고 떠나면 그만이거든요. 그래서 성북문화재단의 경우, 공모사업 중심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와 개인이 주축을 이루는 ‘공유성북원탁회의’를 중심으로 협력 관계 속에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공유성북원탁회의는 2014년 2월 출범해서 120여 개의 단체와 250여 명의 개인이 결합된 자율적인 운영 구조를 갖습니다. 매월 정기모임을 통해 재단 사업에 대해, 그리고 민간 주체들의 기획에 대해 방법을 찾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공모사업만 쫓던 단체들도 지역에 대한 이해와 네트워크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활동을 열어가는 방식입니다. 문화재단의 다양한 시설과 사업들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워킹그룹과 협동조합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업기획과 실행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재단 시설 가운데 하나인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을 두고 연극인들이 지난 5월 ‘마을담은극장 협동조합’을 결성해서 기획과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문화예술교육 강사들이 주축이 되어 지난 2월 ‘마을온예술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지역 교육 활동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겁니다. 재단 주관의 지역 축제 역시 민간 주체들로 구성된 축제사무국을 꾸리며 그 과정에서 문화다양성을 추구하는 ‘누리마실친구들 협동조합’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술가를 비롯한 민간 주체들이 상대적으로 재단과의 협업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소비되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월식 권경우 본부장님 생각에 저도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성북문화재단은 기초문화재단이니까 그게 가능하기도 하고, 재단 안의 정체성이나 철학 같은 것이 공유되는데, 사실 광역단위나 기초단위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곳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실무자 한두 명의 태도가 전체 사업의 분위기를 결정하기도 하죠.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파트너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는데, 단순히 지원을 해주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함께 만들어간다는 신뢰감이 쌓였을 때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된다고요.

이재준 오늘의 이야기는 공공미술보다 ‘공동체에 대한’ 혹은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의’ 예술활동이 더 맞지 않나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공동체를 위한 예술활동은 대상지를 타자적 관점으로 보지 말고, 적어도 5년, 10년 이상 지역과 주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타자적 관점으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지역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실체적 맥락을 찾아 관계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김월식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갈등과 이해에 대한 프로세스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죠. 그런데 지금의 공공미술이나 공공예술 지원시스템은 갈등을 가지고 조정할 시간을 보장하지 않아요. 자율적이라는 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가의 재능으로 발현된 아웃풋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기 생각을 지역민과 합의로 끌어낸 그 과정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운기 그런 면에서 볼 때 최근에 일어났던 이화동 계단벽화 지우기 행위가 많은 논점을 제공한다고 봐요. 당시의 조건과 상황에서 벽화를 작업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예술적 관점에서 또 다른 부분도 고려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계단 자체의 실용적, 미학적 측면이 있을 텐데, 꽃무늬나 물고기를 그리는 것만이 최선이었을까? 그로 인해 잊히거나 외면되는 것은 없는가, 하는 부분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았나 해요.

또 한 가지는 여전히 마을 외관에 치중해 접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당시 <아트인시티>라는 지원사업 속에서 진행하다 보니 갖는 한계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타고 관광지화 되어 갔고, 결국 외부 자본이 들어오게 되었죠. 얼핏 보면 활성화된 것 같지만 과연 그것이 지역 주민에게 어떤 혜택으로 돌아갔는지, 혹여나 방문객으로 인한 사생활 노출이든지 소음 피해가 더 많지는 않았는지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데, 결국은 벽화를 지우는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이죠. 물론 벽화를 지운 행위 자체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겠지만 그 분들의 입장도 고려하고 놓친 부분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찾아내는 데에서 이를 경험으로 보고 더욱 진전된 공공예술의 방향성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경우 그 벽화를 그린 예술가는 그곳에 살지 않을 가능성이 크죠. 그 부분이 지금까지의 공공예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공동체예술이나 공공예술은 작업실이나 주거공간과 같은 삶의 공간이 그 지역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계를 맺는 차원에서 활동으로 외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었다면 벽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들, 가령 주민의 이해를 구하거나 논의 과정이 있었을 거고요. 그랬다면 벽화를 지워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겠죠.

민운기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벽화를 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과 방법론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벽화가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때 가서 하면 되고요. 벽화 자체가 무턱대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맥락이나 조건이 잘 맞아 떨어져야 그 의미나 효과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데, 많은 벽화 작업 주체들이 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쉽게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한편으로 공공예술 담론이 이를 조장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쇄락하거나 소외된 곳을 찾아가서 벽화를 그려 세간의 관심을 끌고, 사람이 몰려오고, 관광지가 되면 성공사례로 언급하는 것이죠. 이런 곳이 전국 곳곳에 많은데, 이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이 지금까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은 근본적인 질문인 것 같은데, 우리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나, 예술로 활성화하고자 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질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칫 자신도 모르게 자본의 논리, 돈의 논리에 휩쓸려 알게 모르게 기여할 수도 있거든요.

이재준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예술프로젝트의 결과가 예술적 담론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 행정의 주도하에 맥락 없이 표피만 따다 쓰는 변종의 발생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죠. 공동체를 위한 프로젝트는 작가의 자율성에 근거한 예술활동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김월식 영국 리버풀에서 진행된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건축가·디자이너그룹인 ‘어셈블(Assemble)’이 터너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과물보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예술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벽화는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공적자금의 지원방식이라는 게 그런 시간을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비슷한 풍경, 전국을 똑같은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재준 저는 공동체를 같은 지역, 같은 건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는 편이에요. 시간이 만드는 게 공동체이지, 장소와 공간이 만드는 게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커뮤니티아트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위험 중 하나가 ‘주민’이란 말이에요. 대도시에서 실제 ‘주민’이라는 주체는 10–20%밖에 되지 않거든요. 나머지 대부분은 2년, 4년 주기로 이사를 하는 이주민이에요. 이러한 두 가지 ‘주민’의 이해관계,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공동체가 지속가능성을 만들 수 없습니다. 성북문화재단처럼 공적인 주체가 그들 사이에서 관계를 지속적으로 조율하면 새로운 토양을 가질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면 완성도도 달라질 수 있어요. 행정이 해야 하는 것은 디렉팅이 아니라 서포팅인 거죠. 행정이 주도하려 하면 파편적 결과물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전시 중 부분 / 사진: 이재준

김월식 저는 예술가가 지역의 적극적인 주체로 등장해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된다면 지역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활동과 공동체예술이 등장할 거고, 그런 것을 경험하면 결국에는 기존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성북문화재단(성북예술창작터)에서 진행하는 성북동과 삼선동 기반의 예술커뮤니티 활동을 보면 ‘성북예술동’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예술가와 주민, 갤러리, 식당, 카페, 공방, 마을활동가 등이 다양하게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지역 활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합니다. 예술가 자신들이 다양한 행사나 퍼포먼스, 아트마켓까지 연결짓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민 역시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예술가와 시간과 경험을 축적하는 기회를 갖는 거죠. 이렇게 각각의 역할들이 전개되고, 과도기처럼 서로 섞이는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태 오늘 새로운 흐름과 가능성을 본 것 같습니다. 과시적인 게 아니더라도, 공동체나 지역이 가시적으로 변화하지 않더라도 시간과 과정의 축적이 공동체와 예술의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이후의 공공미술과 커뮤니티아트

분량14,324자 / 3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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