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이들, 난민
박경태
분량5039자 / 10분
발행일2016년 7월 31일
유형오피니언
예상보다 많은 우리 안의 난민
2008년 가을, 필자가 속해 있는 성공회대학교의 대학원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전공 교수들은 특별한 입학심사회의를 개최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난민인 욤비 토나 씨가 입학지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원래 아시아비정부기구학은 주로 아시아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입학해서 공부하는 석사 과정인데, 아프리카 출신의 지원자를 합격시키는 것이 괜찮은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뛰어난 자기소개서와 연구계획서를 제출한 욤비 씨는 비非아시아 출신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합격을 했고, 2009년 봄학기부터 함께 공부해서 우수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욤비 씨는 2008년 2월에 난민 인정을 받은 이후 언론에도 자주 소개되어서 어떻게 보면 유명인이 된 측면도 있다. 제자이면서 교수가 된 그가 너무도 자랑스럽지만, 사실 그가 자랑스러운 진짜 이유는 성공한 난민이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난민들의 권리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있는 인권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은 ‘한국에도 난민이 있어?’라는 질문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은 시리아 출신 난민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들어오려고 하니 이젠 당황의 수준을 넘어 아예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을 강화한다. 2016년 6월 7일에 발표된 유엔난민기구UNHCR의 집계에 따르면, 2014년 이후 2년 반 동안 지중해에서 목숨을 잃은 난민들이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하루 평균 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매일 바다 위에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몇 주일 사이에 지중해에서 난민들이 탄 선박들의 사고가 급증하면서 올해 들어서는 5월 말까지 이미 2,8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들 중에서 특히 세상을 슬프게 했던 사고가 있었다. 작년 9월 시리아 내전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해가던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가 배가 난파되어 터키 해변에서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을 때,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크게 슬퍼하며 난민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었다. 물론 그 문은 머지않아 닫혔지만 말이다.
과연 한국에도 난민이 있을까? 있다면 몇 명이나 될까? 한국이 1951년에 제정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것은 1992년이었고,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그때부터 2016년 4월 말까지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무려 17,523명이었는데, 이중에서 난민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은 겨우 592명으로, 3.4%에 불과하다. 물론 법무부는 현재 심사 중인 사람을 빼고 심사가 종결된 사람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2015년 말 기준 인정률이 7.2%라고 하지만, 전 세계 평균 인정률인 30%에 한참 못 미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그렇다, 한국에도 난민이 있다. 심지어는 시리아 출신의 난민들도 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난 몇 년에 걸쳐 시리아에서 한국으로 도망쳐 와서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은 1,000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고, 644명은 난민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아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있고 한국 땅에도 ‘예상보다’ 많은 난민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잘 모른다. 왜 그럴까? 그들은 누구일까?
난민은 누구인가
‘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엔의 정의에 따르는 난민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난민에 해당하는 국내실향민을 더해야 한다. 국내 실향민은 “자신의 집 또는 일상적 거주지에서 강제적 또는 의무적으로 도피하거나 떠나게 된 사람들, 특히 무장 분쟁, 무분별한 폭력 상황, 인권 유린, 자연재해 또는 인공적으로 발생한 재해 등의 피해를 피하거나 그 영향으로 인해 실향이 된 사람들 중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을 넘지 않은 사람들”이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전 세계에는 1,950만 명의 난민과 3,820만 명의 국내실향민이 있다. 즉 둘을 합치면 6천만 명에 가까워지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 인구 70억 명 중에서 거의 백 명 중의 한 명은 실질적인 난민이라는 얘기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중에서 난민에 해당하는 사람만 보면, 오래도록 가장 많은 난민을 내보낸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1979년 소련의 침공과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무려 600만 명이 이웃 나라인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망갔는데, 아직도 이 나라 출신 260만 명이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 때문에 발생한 난민이 가장 많아져서 390만 명에 이른다. 현재 유럽 선진국들이 난민을 더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해온 나라들은 그리 부유한 나라들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긴 세월 동안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해온 나라는 파키스탄이었고, 지금도 160만 명이 살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의 격변 때문에 난민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는데, 이들을 받아들이며 졸지에 최대 난민수용국이 된 곳은 터키이다. 여기에는 270만 명의 시리아인과 30만 명의 이라크인 난민들이 살고 있다.
난민 발생 원인
도대체 왜 이렇게 난민이 많은 걸까? 왜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난민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로 인해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는 ‘기후난민’들이 있다. 해수면 상승 때문에 땅이 물에 잠기거나 사막화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면 원래 살던 땅도 떠날 수밖에 없다. 앞으로 40년 이내에 2억에서 10억 명에 이르는 사람이 기후 변화 때문에 국경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먹고 살 만한 나라의 국민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는 ‘경제난민’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이동하는 이주노동자와는 달리, 생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갈수록 삶이 피폐해지는 나라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경제난민은 점차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전쟁난민’이다. 물론 기후난민과 경제난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발생하는 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있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전쟁난민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전쟁난민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지역들이 갖는 공통점은 서구에 의한 식민지배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서구 열강들이 비서구 지역을 식민통치할 때 책상에 둘러앉아 자기들끼리 인위적인 경계를 만들어 분할 점령했다. 국경이 직선인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분할의 인위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뉜 개별 식민지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남한의 열 배, 한반도의 열 배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부족들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큰 규모의 식민지에 속하게 되었을 뿐, 공유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부족들이 같은 언어/문화/민족의식 등을 공유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쉽지 않다. 식민주의자들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일부 사람들/부족들을 앞잡이로 ‘등용’했고, 이것 때문에 부족 간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와 같은 부족 간 갈등은 독립 이후에 내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국 대량학살과 난민의 발생을 낳았다. 난민 발생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서구 국가들이 난민을 도울 때 생색을 내거나 더 이상은 도울 수 없다고 거들먹거릴 땐 차마 용서하기가 힘들다는 생각마저 든다.
환대의 책임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국가는 자국민의 권리를 보장할 책임이 있다. 그게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보호를 거부당하거나 여러 이유로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이 생길 경우에는 국제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 국제적 보호를 제공하는 주된 책임은 보호를 요청받은 국가에 있다. 모든 국가는 국제인권법 및 국제관습법을 포함한 국제법에 따라 난민에게 국제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1951년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과 1967년의 「난민의정서」 체약국은 해당 협약의 조항에 따른 의무를 지닌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선진국은 여기에 가입했지만, 최근 유럽 국가들이 난민과 관련해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야 뭐라 하기 어렵지만, 최소한의 인도적 도움마저 외면하자는 주장과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난민을 비하하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은 고사하고, 관심조차도 없다. 언론에서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도 그저 남의 나라 얘기인 줄로만 안다. 심지어는 (이해는 가지만) ‘난민을 보내는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불과 60여 년 전에 전쟁으로 난민과 다를 바 없는 수백만의 국내실향민을 낳았던, 그래서 그 고통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데 국제 사회가 큰 도움을 보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삶이 팍팍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먹고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천만 난민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 정도는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들을 환대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박경태
미국 텍사스주립대(오스틴)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인종과 소수자문제이며, 저서로는 『인권과 소수자 이야기』, 『소수자와 한국사회, 인종주의』 등이 있다.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이들,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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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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