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에 똥침을, 소수결의 쾌락을!
양효실
분량5,267자 / 10분
발행일2016년 7월 31일
유형오피니언
동화주의의 폭력성
다수결의 원칙에서라면 당연히 다수가 승리한다. 소수는 지는 편, 승자의 배경이다. 배경이 된 인간에게는 목소리나 인간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규범과 상식, 도덕을 곧 자신의 일상적 에토스의 기반으로 전유하는 이들에게 다수성은 그 자체로 선이고 정의이다. 사회의 안전과 안정은 곧 다수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가 혹은 관철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소수를 위한 정책은 ‘예외적’으로, 크나큰 시혜로서만 존재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따르는 근대적 국가는 많은 사람을 ‘우리=선량한’ 시민들로 호명하면서 아직 충분히 선량하지 못한 시민들을 훈육, 통제하는 장치들을 체계화했다. 소수자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여성, 어린이, 청년, 장애인, 동성애자들로 한정한다면― 는 선량한 사람으로 자신을 조직화하고 동화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가령 ‘장애인도 사람이다’와 같은 구호는 기존의 ‘인간(성)’의 정의(定義)에 스스로를 꿰어맞추는, 기존의 인간 규범에 편입되려는 소수자 편의 제스처를 가시화한다. 소수자의 소수자성(타자성!)을 희생하는 대신 주류의 인간성으로 이전하려는 이와 같은 동화주의(assimilationism)는 먼저 국민이나 인간으로 진입한 이들의 궤적을 소수자들이 또 반복하고 강화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미래’는 현재 선량한 시민들 다음에 자신들을 좋은 이름으로 부를 시간, 공간의 은유이다. 그렇게 다수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는 서구화, 근대화, 인간화, 국가화, 정상화를 함께 끌고 앞으로 전진하는 체제이고 이데올로기이다. 안전과 안정에 대한 문화적인 희구는 양순한 신민들(subjects)로서의 인간 주체의 조율 혹은 출현, 혹은 인간 삶의 억압을 알린다.
동화주의를 지지하는 소수자들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여성운동, 동성애운동, 유색인운동을 놓고 볼 때 늘 계급적으로 움직였다. 다수가 향유하는 기득권(력)에 편입될 조건을 갖춘 이들, 굳이 소수자성을 주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의식적으로 엘리트이고 현실적으로 생존능력을 가진 이들이 동화를 선택했고, 소수자들의 생존전략으로서 동화정책을 지지했다. 당연히 지식–권력이나 상징자본을 갖추지 못한 하층계급의 소수자들은 따라갈 수 없는, 불가능한 궤도였다. 상징적으로건 물리적으로건 국민으로 불릴 만큼의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 심지어 전복적인 정치 세력으로 결집할 수도 연대할 수도 없는 소수자들은 동화 대신에 상징적 위반, 선량한 시민들의 적의와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탈적인 스타일의 정치로 진입했다. 20세기 문화연구에서 ‘스타일의 정치’는 의식적 각성과 분노의 공적 표출이라는 지식인 계급의 위반전략이 불가능한 청년들, 여성들, 동성애자들의 ‘먹고 마시고 자고 사랑하기’의 일상성에 각인된 위반적 스타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공손하고 예의바른 말 대신에 천박하고 거친 언어가, 사회적 인정을 희구하는 의례적 옷이 아닌 차이와 불온을 각인한 옷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이고 전략이었다. ‘우리는 너희가 아는 그들이 아니다, 우리는 미움을 자처한다’라는 강력한 가시성의 정치! 퀴퍼(퀴어퍼레이드)는 주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동화주의를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 너희들이 혐오하는 우리, 그러나 막강한 다수가 된 우리 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공적으로 현시하는 축제이자 운동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비가시성의 일시적 가시화에 매진한다. 다수의 인정을 거부하면서, 숨어 있으려 하지 않으면서 퀴어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문화정치이다. 시각적으로 그들은 혐오스럽지만, 그 혐오스러움이 그들의 자긍심을 보증한다. 편입이 아닌 돌출, 사라짐이 아닌 나타남이다. 너그러운 다수, 너그러운 이성애자들이 있을 것이고, 퀴어한 몸을 있는 그대로 현시하는 데 빼앗긴 광장을 되찾으려는 분노한 다수 이성애자들이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매년 6월 초의 퀴퍼는 현재 한국에서 동성애 혐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 문화적 급진주의가 서구적 문화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광장을 장악하는 동안, 정치적 보수주의가 기독교 근본주의를 모방한 종교적 광기를 등에 업고 나란히 전시된다. 환원 불가능한, 공약 불가능한 절대적 차이가 관용의 수사 없이 공존하는 괴이한 장소성의 병렬이고 ‘축제’이다.
소수자의 삭제, 소수자 삶의 불확실성
동화의 효용성이나 정당성을 지지하는 소수자 진영은 물론 계속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동화된, 주류에 편입한 그들은 좀 더 젊고 무식하고 가난한 이들의 거칠고 위협적인 전략이 갖는 정치적 비효율성을 경고한다. 다수의 지지와 인정을 통해 법적이고 도덕적인 변혁을 도모해야 하는데, 혐오와 분노를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주류의 규범과 상식을 거부하는데 소수자들이 지불할 비용은 결국 자신의 물리적 생존이다. 죽여도 되는 혐오스러운 소수자의 삭제는 국가의 사법적 정의가 다수가 되어 도모하고 동의한다. 소수자 삶의 불확실성은 다름 아닌 분노와 혐오를 관리하고 조장하는 국가 폭력에서 연원한다. 심지어 초국가적 자본과 정세에 취약해진 포스트근대적 국가주의가 국민의 불만을 내부의 소수자들, ‘외국인’에게 전가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리라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만연한 폭력과 불확실한 삶,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책임 방기. 언제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이번에는 너였지만 다음은 나일 것이라는 심적 확신은 소수자들에게는 현실이다. 이기적 삶의 갈등을 조율하기로 가정된 사회, 공동체, 국가가 이기적 관심을 따라 움직이고 사활은 개인의 책임과 유능에 달려버렸다.
우리로의 동화가 아닌 당신들/그들의 자립을 그 자체 하나의 가치로 인정하는 데 관용의 논리가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 혐오와 삭제가 아니라 관용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 그러나 관용은 다수의 권력이 소수의 생존에 대해 갖는 시혜적 태도임이 분명하다. 관용은 저기에 있는 타자의 삶에 대해 여기에 있는 너그러운 우리의 거리조율법이다. 관용에는 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 다시 말해 나의 일부를 내놓아야 하는 어려움이나 공포가 없다. 너의 생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면 나는 나의 우월한 지성, 나의 차가운 연민과 무감각한 동정심을 내놓아야 한다. 대신에 너의 무례함, 힘, ‘목소리’를 긍정해야 한다. 가능할까?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한다면 나의 생존도 소수자의 생존만큼 불확실하고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다수가 다수성을 내놓을까? 다수의 소수자 되기가 가능할까? 그렇기에 관용은 타자의 비자유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내 몫을 내놓지 않으면서 나의 현존을 유지하는 교활한 전략이다. 관용은 이미 안전한 곳의 나와 불확실한 너 사이의 불평등을 전제로 내가 누리는 자기만족적 취향일 수 있다.
관용의 윤리에 반하는 생존적 전략
관용의 윤리를 거부하는 소수자들의 교란이 점점 늘어난다.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도대체 너그럽게 봐줄 수 없는 소수자들, 심지어 양순한 신민의 태도를 선택한 소수자들에게도 혐오감을 자아내는 소수자들, 다수와 소수의 갈등을 봉합하거나 그 사이에서 경합하는 대신에, 아예 국가를 뜨기로 결정한 소수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기성의 다수결의 사회에서는 ‘이름 없이’, 적절한 언어 없이 떠돌던 자신들의 문제를 더 나쁘고 더 유독하게 뿜어내는 데 언어를 활용한다. 그들은 동화를 욕망하는 이들이 모색하는 긍정적인 언어나 시각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더 미움 받는 데, 더 혐오감을 조장하는 데 매진한다. 이것은 나쁜, 아주 불리한 전략인데 그래봤자 실존의 위험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강력하고 강렬한 전략인데 그럼에도 더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류와의 타협이 아닌 생존의 긴급함에 집중한다. ‘우리도 시민이다’가 아니라 ‘“우리”’는 너희의 이해를 바라지 않기에 우리다’라는 전투적인 태도인 것이다.
메갈(리안)은 엘리트 비혼 직장 여성들을 중심으로 우발적으로, 이제는 굳이 메갈이라 불리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 내부의 여성들에게로 확산되었다. 남성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여리고 약하고 귀엽고 순종적인 여성 이미지가 가부장제가 선별한 배타적 여성성이라면, 그로부터 완전히 일탈하는 것, 그럼으로써 기성의 다수 남성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혐오스러운 여성성을 통해 남성성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그녀들이 견지한 전략이었다. 남성성과 이항대립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여성성을 삭제함으로써, 즉 한국이란 문화성을 지운 여성성을 호출함으로써, 메갈은 자신들 실존의 ‘국적’을 지워버렸다. 남은 것은 악취 나는 모국어인 것이고 그 모국어를 더 악취 나게 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메갈의 ‘미러링’은 이미 항상 불평등한 남성과 여성의 구조, 서구 자본주의와 유교 가부장제의 이중구속에 갇힌 젠더 구조를 ‘평등’하게 되돌려줌으로써 역설적으로 불평등을 가시화했다. 메갈의 고도의 지적 전략은 몰지성적인 젠더 클리셰를 하나의 유희를 위한 텍스트로 재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놀고 깔깔댈 수 있는 소수 여성과 그 텍스트에서 정치적 현실을 읽은/오독한 분노한 다수(여성도 포함된)로 국민을 양분했다. 물론 그녀들의 지적 유희는 미적 유희였기에 굳이 고도의 지성으로 무장하지 않은 고도의 감수성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독자로 불러들였다. 덤으로 얻은 ‘우리’였다.
메갈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지만 그들의 전략이 성공했는가, 라는 질문은 남는다. 양적인 성공을 성공이라고 말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혐오를 조장한 메갈은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라는 예술의 오랜 쾌락주의나 긍정법을 따른다면 메갈은 엄청난 성공을 획득했다. 다수성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미덕이다. 소수자성은 양적으로 소수라는 이 비자본주의적이고 비생산적인 움직임에 충실하기에 일관적이다. 일어난 운동의 가치는 그것이 사후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느냐로 판정되는 게 근대적 규범이다. 거기에 가담했던, 일시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이들이 거기서 어떻게 놀았고 긍정했고 깔깔댔는지는 사족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유희인 것이다. 지성화될 수 없고 지속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긍정과 믿음, 이것이 소수자들이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다.
양효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2006년에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단국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현대 예술, 여성주의, 대중문화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가 있고, 옮긴 책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윤리적 폭력 비판』 등이 있고, 논문으로 「텍스트 실천의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 읽기」, 「타자와 실패의 윤리 – 주디스 버틀러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교차로에서」 등이 있다.
다수결에 똥침을, 소수결의 쾌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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