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그 관계의 예술에 대하여
함성호
분량5,238자 / 1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5년 4월 22일
유형오피니언
당신 건축가 맞나?
10년도 더 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일하던 때였다. 늘 하던 대로 외주업체들과의 공식미팅 자리였다. 나는 기계, 전기, 구조, 소방업체들에게 건축에서 원하는 사항들을 주욱 얘기했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문제점들을 찾아 해결책을 궁리했다. 나는 내 아이디어를 얘기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전문적인 얘기들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던 중에 한 업체의 대표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눈짓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대뜸 하는 말이, “당신, 건축가 맞나?”였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걸 알았다. “당신은 설비의 문제에 있어 당신의 디자인과 관계된 얘기를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다”는 것이 그의 얘기의 골자였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얘기가, “당신은 건축가가 아니라 마치 설비 전문가나 구조 전문가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건축교육을 받을 때 나는 당연히 건축가는 그 모든 것에 정통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꽤 유능한 건축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마치 내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격을 가진 건축가처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날 미팅은 “한국에선 다 그래”라는 농담 아닌 농담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나는 내내 그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건축가 맞나?’와 ‘한국에선 다 그래’ 사이에는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하나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는 한국에서는 스페셜리스트가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그 모든 것을 건축가가 해결해야 함으로 인해서 디자인에 쏟아야 할 절대적인 시간이 서구의 그것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유리, 콘크리트, 철, 판넬, 시공의 방법까지, 모든 것을 건축가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유능한 건축가로 인정받는다. 스페셜리스트를 기르지 않는 한국 건축 교육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도 모든 학생은 건축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건축가로서의 재능보다 유리 디테일이나 철의 디테일 등을 잘 풀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확장하거나, 그것으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길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이 한국 건축의 현실이다. 대신에 그 모든 것은 고스란히 건축가의 몫이 되었다. 당연히 디자인에 쏟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건축가의 능력이라고 인정받는 사회에서 그런 현실에 대해 재고해 볼 만한 여지조차도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건축가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건축가는 벽돌을 잘 쌓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벽돌을 다른 재료와 연결하고, 공간을 빚어 장소의 맛과 향기를 내는 사람이다. 그 맛을 위한 요리는 벽돌에 대한 전문적인 디자이너들이 하면 된다. 나는 “당신 건축가 맞나?”라는 질문을 받으며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 한국 건축은 지금처럼 계속 서구건축을 쫓아가며 자기 가랑이를 걱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 편찬자로서의 건축가
그렇게 스페셜리스트가 부재한 상황에서 나는 독립했고, 여전히 모든 스페셜한 문제들을 혼자 해결하고 있다. 지극히 한국적인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 아이디어를 같이 실현하기 위해 이야기 할 만한 누군가가 없다. 설혹 있다 해도 그의 꿈은 건축가이지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역사인식과 배치되고, 중국과 함께 그에 대항하고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미국, 일본과 공조하면서 중국과 배치되듯이, 건축에서도 그런 모순은 종종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아주 사소하게 언어의 문제에도 있다.
건축설계를 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의뢰인이다. 이 의뢰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이 건축가로서 내가 하는 첫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는 ‘듣는 사람’이다. 건축 전문가로서 나는 당연히 보편적인 건축의 언어와 그 정의에 있어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의뢰인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그럴 때 우리가 쓰는 언어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가장 곤란한 경우는 예술의 자율성, 예술가의 독자성 등 교양 일반에 관한 통념을 잘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왕왕 “선생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해주십시오”라고 선선하게 말한다. 그 말은 ‘당신의 예술성을 인정한다’는 말이고, ‘나는 당신의 작품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다. 정말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지만, 건축은 그런 예술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지어질 수 있는 집이라면 그 집은 이미 당신의 집이 아니라 건축가의 집이다. 또 다른 경우는 “어떤 집을 원하세요?”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모던한 건축을 원한다”는 비교적 취향이 분명한 대답이 돌아왔을 때다. 나는 그의 말을 염두에 두며 그의 프로그램에 맞춰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리고 의뢰인과 만나 의견을 나누고 몇 번의 수정을 거치다 보면 그의 ‘모던’의 정체가 드러난다. 알고 보니 그의 모던은 바로크였다. 그는 결코 모던한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모던은 그저 새로운 제품이 주는 신선함이었을 뿐이다. 이쯤에서 그의 모던을 교정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주입식 교육처럼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모던’이 그런 뜻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그의 ‘모던’을 ① 바로크, ② 새로 나온 제품, 이라고 적어두면 된다. 그리고 모던의 원뜻은 서서히 건축일을 진행하면서 그가 알아 나가도록 상황을 만들어 둔다.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일 뿐이고, 사실 내가 작성하는 의뢰인의 사전은 복잡하다. 특히 형용사와 부사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단순하다’라는 말의 범위도 엄청나게 넓기 마련이어서 정확히 꿰뚫기 어렵다. ‘좀 더’라는 말은 더 그렇다. 명사에서 오는 부정확함은 그 폭도 좁고, 그만큼 합의하기도 쉽다. 이렇게 ‘의뢰인의 사전’을 다 완성하고 나면 그와 대화하는 데 큰 오해는 없게 된다. 이 사전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된다. 정확한 설계를 위해 정확한 사전이 필요하다. ‘듣는 사람’으로서의 건축가는 자기 식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으로 듣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건축가가 그런 노력을 먼저 할 때, 의뢰인도 나의 말에 대한 사전을 준비하게 된다. 건축가에게나 의뢰인에게나, 건축설계는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을 편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건축, 그 관계의 예술
건축설계가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만큼 건축예술이 복잡하다는 의미다. 건축예술이 미술, 음악, 문학과 다른 지점은 그것이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건축에는 건축 바깥의 수많은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관계하는 데 있어서도 일단 의뢰인과 시공자, 담당 공무원, 이웃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관점이 다른 사람들이다. 이 다른 관점을 조율하는 일도 건축가의 일이다. 당연히 건물이 들어설 땅의 상황이 있고, 그 땅의 기후 조건이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의 특성이 있고, 사회적인 요구, 법적인 규제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집에서 살 당신의 조건이 있다. 건축예술은 이러한 조건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적당히 이용하며, 막을 것은 막고, 설득할 것은 설득해야 한다. 건축가는 단순하게 집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건축예술 역시 그림에 있지 않다. 현란한 형태나, 특이한 재료의 사용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란한 형태와 구조 재료의 ‘관계’에 건축예술의 방점이 찍힌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그 현란한 형태와 구조, 재료의 관계는 앞서 말한 사회적 조건과 기후, 땅의 상황 등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하나의 재료에서부터 사회, 사람, 자연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건축가는 치밀한 관계의 그물망을 짜는 직조공과 같다. 단지 형태에 국한된다면 건축예술이 조각과 다른 점이 없을 것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가진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좋은 공공조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건축예술이 순수예술을 넘어서는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시 모든 예술은 건축 안으로 모이게 될 것이고, 앞서 거론한 관계의 대상에 그것은 반드시 추가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건축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거나,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기획자에 더 가까운 모습일 테고, 큐레이터나 코디네이터의 역할에 더 강력한 디자인 개념을 불어넣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동시에 도시계획가의 모습에서 감성을 가진 예술가의 모습이 더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도시는 합리적인 기능에서 점점 더 감성을 담을 수 있는 변화하는 도시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형태를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는 지금과 같은 건축가는 단순한 직능인이 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이와 같이 작은 주택에서부터 커다란 공공사업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이끄는’ 건축가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이미 그런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페트로나스 타워Petronas Twin Towers>를 설계한 사람은 시저 펠리Cesar Pelli이지만, 그는 이미 더 큰 건축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작업을 수행한 사람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 더 큰 건축을 기획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공무원이다. 엘리트 공무원이 그 기획자였다. 그러고 보면 미래의 건축가의 역할은 반드시 지금의 건축가가 일을 이어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때 티브이와 핸드폰과 전화가 어디로 집중될 것인지 설왕설래했듯이 미래의 건축가가 공무원이 안 되리라는 법도 없다.)

도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요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도로망을 짜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연결망을 짜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는 일은 이제까지의 도시계획이 수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관계의 섬세한 내면과 조직의 망을 짜는 외연을 내포하는, 새롭게 정의되는 건축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함성호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했고, 1991년 『공간』 건축평론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EON의 대표이다.
건축, 그 관계의 예술에 대하여
분량5,238자 / 10분 / 도판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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