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마을 다시 바라보기
한승욱
분량5,539자 / 10분
발행일2014년 9월 30일
유형오피니언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1, 2인 가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복지 재원 부족은 고령화 사회를 불안케 하고, 청년들이 자기 집을 소유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품이 되어 버린 주택은 우리의 삶을 더 이상 담아내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은 지금과 다른 주택과 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 이은경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거주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을 위해 나누어 쓰고 개방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와 그런 삶의 이점을 극대화한 집합주택을 제안한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승욱 박사는 우리의 삶의 공간도 함께 사는 마을로 전환하고 있으므로 마을만들기에서 건축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각 지자체가 추진하는 ‘마을만들기’ 열풍은 도시와 지역을 바꾸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면서 마을만들기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 번째는 ‘왜 지금 마을만들기인가?’, 두 번째는 ‘마을만들기 안에서 건축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이다. 두 번째 의문은 지금은 도시정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으나 건축설계를 하기 위해서 건축과에 입학하였고 여전히 건축 이야기에 가슴이 뛰는 사람으로서 가지게 된 단순한 의문이자 질문이다.
마을만들기의 흐름을 간단하게 살피려면 산업혁명기의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에 이미 마을만들기의 개념을 세우고 실천한 사상가이자 실업가였던 로버트 오웬Robert Owen(1771~1858)은 이상주의적 마을만들기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격은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신념으로 노동자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건강관리를 지원하고, 교육 기회를 보장했다. 도시계획가인 에베네저 하워드Ebenezer Howard(1850~1928)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영국의 근대 도시계획이 확립되는 시기에 전원도시론을 통해 도시의 무질서한 확장을 제어하고 도시와 자연의 공생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영국의 ‘전원도시운동’은 일본의 근대도시계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을만들기는 일본의 ‘마치츠쿠리まちづくり’를 직역한 단어로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이다. 저항적 지역활동으로 전개되던 마을만들기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행정이 주도하는 공공사업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행정이 추진한 마을만들기는 물리적 환경개선이나 지역 커뮤니티 시설 건립과 같은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때문에 도시와 건축분야의 전문가들이 집중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시기의 마을만들기는 낙후된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고도경제성장의 여파에 따른 물질적 풍요로움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 가치로 인해 사람 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지역공동체 보다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더욱 깊어졌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부동산 거품이 사라지고 쇼핑센터에서 물건을 사듯이 쉽게 집을 사고팔던 사람들이 주택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정주하는 사람이 늘면서 자신이 사는 집뿐만 아니라 마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사람도 함께 늘어났다. 그러던 중 자신이 ‘사는 곳’과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인프라는 마비되었고 국가의 응급시스템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행정을 대신해 시민 스스로가 나서서 재난 구조를 하는 모습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재난으로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멈췄을 때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과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한 전환기적 사건을 통해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급속도로 확산한 것이다.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중요성과 가치의 재발견은 현재 일본이 직면한 심각한 사회문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일본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최근 아사히신문은 흥미로운 사설을 실었다. 2007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전쟁과 기아와 같은 외부적 충격이 없는 상태에서 인구가 급감하는 지역이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인구감소에 대해 지바千葉대학교의 히로이 요시노리 교수는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무리를 거듭한 데 따른 피로와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도경제성장기에는 장거리 출퇴근과 야근을 하고 비싼 교육비를 감당하며 아이들을 키웠는데, 이러한 인내는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했다. 그러나 점차 성장이 둔화되자 고용은 불안정해졌으며 젊은이를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리는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사회에서 ‘도움이 안 되는 것’, ‘뒤처진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성장하지 않는 가운데 풍요로움을 발견하고 자기만족적 삶을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서, 앞서 말한 ‘왜 지금 마을만들기인가?’라는 첫 번째 의문을 다시 상기시켜본다.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성장이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우리 도시와 마을의 변화는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다른 시간대에 일어나야 할 현상들이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같은 시간대와 공간에 동시 충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따른 부작용 또한 압축된 시간의 힘만큼 강한 반발력을 지닌 도시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동시다발적이면서도 중층적인 구조를 지닌 도시와 마을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마을만들기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의 마을만들기는 일본의 70년대 공공사업으로서 추진된 마을만들기와 80년대 후반 이후 정주가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의 인식 전환적 마을만들기의 흐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또 한편으론 압축적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도움이 안 되는 것’, ‘뒤처진 것’으로 생각해 온 것들을 다시 바라볼 시점이 우리에게도 곧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왜 지금 마을만들기인가?’라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의문에 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답이다.
‘왜 지금 마을만들기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가지고 두 번째 의문인 ‘마을만들기 안에서 건축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많은 건축가가 도시에 제안을 하고 이를 구현화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중에는 현재 도시의 형태와 기능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제안도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1942)와 그리스토퍼 알렉산더의 『패턴 랭귀지Pattern Language』(1977), 그리고 앞서 말한 하워드의 『전원 도시Garden Cities of Tomorrow』(1902)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사이에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데 건축가가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탄게 켄죠, 쿠로카와 키쇼 등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이 지향하는 도시와 건축이념인 메타볼리즘Metabolism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도시에 대한 건축가의 제안은 급격하게 줄었다. 도시에 대한 제안은 도시계획 분야로 전문화가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건축가는 도시에서 멀어졌다고 카와카미 마사미치는 주장했다.
또 그는 도시에서 마을로 시점을 전환해서 살펴보면 사회적 요구의 변화에 따라 마을만들기가 추구하는 방향도 변해왔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환경, 교육, 복지가 마을만들기의 주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비물리적인 활동이 중심이 되는 마을만들기와 물리적인 환경을 만드는 건축가의 행위는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되었다. 마을만들기 규약이나 가이드라인도 건축가의 참여 없이 도시계획 전문가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쿠하리시市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건축가가 적극적으로 마을의 규약 만들기에 참여한 사례로서 마을만들기에 있어 건축가의 역할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일반화하기 힘들다. 지역마다 사례마다 건축가의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다양한 마을만들기 안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건축가가 마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면 자연히 그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경계, 공간, 공유’, 이 세 가지 열쇳말을 가지고 건축가는 어떻게 마을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살피고자 한다.
경계境界
인구 천만이 사는 대도시 서울에서 ‘마을의 경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경계’를 어떻게 볼 것이며 이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릴 것인가? ‘경계’에 대해서 리처드 세넷은 “사회적 관계 중에서 대면적인 만남을 통해서 생성되는 사회적 항쟁성conflict을 포함한 관계가 발생하는 곳”이라 정의했다. 그는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며 발생할 수 있는 항쟁성을 없앨 수 없고 적대적인 대립관계로 돌아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교섭 가능한 여지를 남겨두는 공간으로서 ‘경계’를 규정하고 이를 적극적이자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공간과 공간의 물리적 경계로서가 아니라 공동체 사이의 교섭 가능한 조절적 공간으로서 어떻게 ‘경계’를 바라볼 것인가?
공간空間
“장소와 장소 사이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간, 비어있음無이 존재한다. 서로 간에 상호작용이 시작되는 순간, 양자사이의 공간은 채워지고 활기가 생긴다”고 말한 게오르그 짐멜에 의하면 공간은 사람들 간의 상호행위에 의해서 비로써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공공간을 “사람이 대화하고 행위하며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만들어지는 곳”이라 했는데 마을의 커뮤니티센터 같은 공공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집합적 주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공공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건축가들은 소유가 아닌 이용의 관점에서 주민 간의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마을의 공공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공유共有, commons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에는 가렛 하딘의 ‘공공재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 공유재는 단순히 공동으로 사용되어온 재財가 아니라 다양한 룰을 가지는 일종의 ‘제도’로서, 적절한 관리운영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자원의 지속적 이용이 가능하다. 이노우에 마코토는 소유보다는 이용관리를 중시하고 지역적인 공유재에 대한 강한 관리운영 ‘제도’의 활용과 관리운영 ‘조직’의 재편을 통한 협동과 네트워크를 기초로 하는 거버넌스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보다 지속가능성이 높은 현대적 공유의 확립을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건축가들은 마을을 중심으로 공유에 관한 담론 확대와 이를 구체화하는 관리운영 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세 가지 열쇳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정의되고 기술되었다. 그럼에도 이를 공개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건축가들이 마을을 바라보는 담론이 좀 더 다양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멀지않은 시기에 도시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멀어졌던 건축가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한승욱
부산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영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후, 일본 교토대학 공학연구과에서 도시재생 관련 연구를 수행하면서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마을만들기 활동을 했다. 현재 부산시 산하 연구기관에서 도시재생관련 정책연구를 수행 중이며, 도시재생 및 마을만들기에서 건축가의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공저로 『창조성과 도시』, 『마을만들기 중간지원』 등이 있다.
건축가, 마을 다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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