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건축하기
김인철
분량5,500자 / 10분
발행일2014년 9월 30일
유형칼럼
여행은 건축가에게 성찰의 기회다. 더군다나 낯선 곳에서의 작업이라면, 그 땅과 지역과의 교류는 더 깊고 풍부할 것이다. 건축가 김인철은 그동안 북부 히말라야 산중의 라다크와 캄보디아 바탐방, 네팔 무스탕 그리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등지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 오지다. 그는 그곳에서 지역주의, 풍토주의 건축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우리 삶의 건축에 대해 질문한다. 건축이 들어서는 땅과 주변에 대한 인정, 인간적인 척도, 그곳에서 쉽게 구하는 자연적인 재료, 수공에 의한 소박한 시공,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수용한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땅이 주는 감흥
건축쟁이에게 여행은 필수라고 한다. 건축을 이해하려면 실제로 그 속에 들어가 온몸의 감각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럿이 또는 혼자서 세계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유명한 유적과 건축을 찾던 답사가 인도여행 이후 곳곳에 쌓여 있는 역사를 공부하고 자연과 문화와 원초적인 건축을 찾는 것으로 바뀐 것은, 땅과 환경의 조건에 따라 건축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내 것을 보면 그동안 풀지 못했던 실타래의 매듭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그곳에 그런 건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 연유를 살펴 이해하는 여행이 반복되다 보니, 급기야 나라면 저곳에 어떤 건축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상상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화가 앞에 놓인 빈 캔버스처럼 땅은 건축의 시작이고 바탕이니 새로운 땅에서 받는 감흥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곳의 설계를 부탁받을 일도, 내가 지어볼 수도 없기에 머릿속 그림으로만 지나치곤 했다.
풍토와 건축의 관계에 대한 첫 체험, 라다크
그런 소망을 담은 해외 프로젝트가 처음 실현된 것은 2007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중의 라다크Ladakh에서였다. 중앙대의 교수가 되어 처음 가르친 03학번 학생들이 졸업여행을 준비할 때 나름의 의미를 만들 수 있는 답사지를 알아보았는데, 마침 원불교의 박청수 교무敎務가 라다크에 교당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가기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에도 ‘최후의 샹그릴라’로 알려진 레Leh는 이미 현대화의 침입으로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 가까이 치솟은 히말라야의 풍광과 라마교 사원인 곰파Gompa의 공간에서 받은 감동은 만만치 않은 해발 3,000m의 고산병과 잃어버린 세계의 실망을 충분히 치유하고 보상할 수 있을 만큼 그곳은 근사한 곳이었다. 이곳저곳 히말라야의 자연과 건축을 찾아 답사하던 중에 흙벽돌로 지은 토착의 건축들로 시선이 끌렸는데, 그리 복잡한 구조가 아니었으므로 학생들과 함께 지어보면 ‘풍토와 건축의 관계’를 이해하는 체험실습이 되리라 생각했다. 교당의 빈터에 자그마한 암자를 한 채 만들기로 하고 대충의 계획을 만들어 사흘간의 작업에 돌입했다. 진흙을 물에 이겨 자연 건조한 흙벽돌을 쌓아 올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지만 2박 3일의 노동으로 완성한 세 평짜리 흙집은 그렇게 나의 어설픈 첫 해외 작업이 되었다.
바탐방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해외작업은 2010년 캄보디아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역시 원불교의 프로젝트였는데 프놈펜 Phnum Penh 다음으로 큰 도시인 바탐방Battambang에 원불교가 8년 전 포교를 시작한 교당에 새 법당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동안 박청수 교무가 벌이는 해외 봉사활동을 지켜보기만 하고 끼어들지 못한 것은 자금사정이 워낙 빠듯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지의 작은 시설과는 달리 제대로 된 법당을 짓는 일이라, 현지를 오가는 경비가 해결되는 선에서 설계를 맡기로 자청했다.
열대지역 건축에 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설계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본격적인 목구조를 계획했으나 현지에서 목재는 고가의 자재였다. 밀림의 나무는 도로가 없어 벌목하더라도 수송은 불가한 사정이었다. 메콩 강이 실어온 토사가 충적된 지반은 연약해서 건물의 무게를 줄여야했고, 스콜의 빗물은 땅속으로 스미지 않아 습지가 아니면 풀과 나무가 잘 자라지 않기에 조경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결국 설계는 현지의 습속을 원주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완성할 수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더위를 해결한 그곳의 방법론을 살피고 현재 사용되는 재료들을 조사하던 중에 벽돌의 특이한 형태가 시선을 끌었다. 결국 그곳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구멍 뚫린 경량벽돌로 허튼 벽을 만들고, 큰 지붕으로 그늘을 만들어 인공의 냉방설비 없이 더위를 해결할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나의 생각과 감각으로 다듬은 결과였다.
앙코르와트
착공이 되고 공정에 맞추어 부지런히 비행기를 타던 중에 오랫동안 캄보디아에 학술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캄보디아 당국으로부터 앙코르와트의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자는 부탁을 받았는데 설계를 맡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앙코르와트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뜻밖에 실제상황이 되었으니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바탐방 교당을 <크메레스크Khmeresque>라는 이름으로 마무리하고는, 이어서 <앙코르 파비스Angkor Parvis>로 유네스코가 명명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가 걸쳐있는 해자 앞 숲 속에 난장처럼 벌어져 있는 주민들의 상가를 정리하고, 더불어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을 계획했다. 유네스코와 캄보디아 당국 압사라 위원회의 담당자를 수없이 만나는 3년간의 조절과 조정을 거쳐 설계를 마무리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고, 시공자가 결정되어 착공한 것은 올해 4월이었다. 현지의 기후와 정국 등 이러저러한 사정이 복잡해 준공되기까지 순조로운 진행이 될지 알 수 없으나 계획대로라면 내년 초에는 연간 400만 명의 세계인이 이용할 6,500㎡의 공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앙코르 파비스>의 디자인 작업에 <크메레스크>의 경험은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유네스코는 새로운 건물이 앙코르와트를 압도하거나 비교되지 않도록 소박하게 다듬을 것을 주문했고 압사라 위원회는 태양열 발전과 친환경설비조차 거부할 만큼 현대적인 재료와 기술을 삼가도록 요구했는데, 나 역시 이 땅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거스르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부지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스무여 그루의 거목들을 고스란히 품으며 얌전히 숲 속에 엎드려 앙코르와트를 경배하는 자세를 갖추려 했다.
무스탕
<앙코르 파비스>의 디자인이 윤곽을 잡고 있을 즈음에 MBC로부터 네팔의 무스탕에 세울 라디오 방송국의 설계를 부탁받았다. 코이카KOICA의 해외지원사업으로 MBC가 시행하게 된 사업인데 빠듯한 예산이어서 재능기부의 형식이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 디자인의 결정권을 나에게 주고 설계에서 준공까지의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한다는 조건으로 설계를 기부하기로 했다. 짐작하기에 크메레스크의 결과가 연결고리로 작용했을 것이지만 또 하나의 경험을 만드는 일에 계산을 따질 이유가 없었고 이 기회에 건축의 전 과정이 공중파로 알려진다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라는 다르지만 라다크와 무스탕은 두 곳 모두 400㎞를 사이에 두고 히말라야의 고산지대를 바탕으로 하기에 처음인 무스탕이 낯설지 않았다. 국적기와 네팔의 국내선 그리고 경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험난한 여정으로 부지를 답사했다. 800㎞에 이르는 산맥이 잠깐 낮아진 무스탕 분지는 고대부터 남과 북의 문명을 잇는 통로였다. 힌두교와 라마교, 아리안계와 몽골계가 뒤섞여 이루어진 역사와 문화는 척박한 자연의 조건에 적응하는 지혜를 만들어 무스탕 건축의 곳곳에 나타났다. 라다크의 흙집과 달리 무스탕은 돌집으로 무리를 이루듯 밀집해 있었다. 티베트와 인도를 연결하는 계곡으로 몰아치는 시속 60㎞의 바람이 그 원인인 것을 알아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람은 그곳의 일상이었고 지각이 솟구치며 부스러져 나온 암석은 천연의 재료였다. 바람과 돌을 주제로 삼아 설계를 만들어 협의하고 착공한 이후 현장에 아르키움의 멤버가 상주 감리하는 공정을 거쳐 방송이 송출되기까지의 과정은, 책이 만들어질 만큼 온갖 이야기를 만들며 두 해에 걸쳐 진행되었다. <히말레스크himalesque-바람을 품은 돌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땅의 돌과 그 사람들의 손질로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마무리되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두꺼운 돌벽 하나로 바람과 추위, 채광과 환기를 해결해야 했던 어둠의 공간에서 벽을 풀어 밝은 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다. 벽을 나누어 풀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건축이 가진 방법론 -닫기가 아닌 열기- 의 적용으로 가능했다.
라다크에서 시작한 실습이 캄보디아를 거쳐 네팔의 무스탕에 이르고 다시 앙코르와트로 이어져 실현되기까지 고원과 열대를 오가는 긴 여정을 치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만들려 하는 것은 나의 의지가 낯선 땅에서 어찌 적용될 것인가, 또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인가였다. 그것을 위해 현대의 기술과 재료를 쓰기보다 그 땅의 방식과 재료를 살펴서 동원하려고 했다. 철근콘크리트와 철골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방법이고 수단이지 결과이거나 목적이 아니다. 그 땅과 그 땅의 것으로 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건축의 진정함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것을 주장하거나 고집하기보다 그들의 것으로 내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건축이라는 명제에서 차이는 현상일 뿐 본질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화에 우열이 있을 수 없듯이 곳곳의 건축 역시 스스로 완성을 이루고 있다. 고유성은 곧 그곳의 정체성이기에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은 건축의 기본적인 예의일 것이다. 내가 가진 지식보다 그들의 지혜가 우선 되어야 하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기술보다 그들의 방법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랜 시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전통을 빌어 그들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첫 일을 오지에서 시작한 인연 때문인지 계속 오지로 이어지는 일의 연결고리이다.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보란 듯 내놓을 일을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다.
새 프로젝트로의 발전 여부는 미지수이나 최근에 달려갔던 LA의 부지 역시 현대 도시가 아닌 황량한 사막 속에 있었다. 대륙의 건축과 어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 대신 인디언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김인철
홍익대학교와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4년 간 엄덕문 문하에서 실무를 거친 뒤 1986년 아르키움archium을 개설했다. 전통의 바탕을 둔 ‘없음의 미학’을 화두로, <꼴라쥬>(1995), <익산 어린이의 집>(1996), <노마드>(1997), <김옥길기념관>(1998), <웅진씽크빅>(2007), <어반하이브>(2008) 등을 설계했다. 건축가협회상, 서울시건축상, 한국건축문화대상, 김수근문화상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저서로 『김인철 건축작품집』(1989), 『솔스티스』(1990), 『김옥길기념관』(1999), 『대화』(2002), 『공간열기』(2011), 『바람을 품은 돌집』(2014)이 있다.
낯선 땅에서 건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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