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의점에 간다
우아름
분량3,316자 / 7분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비평
편의점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양태나 전반적인 추이를 보여주는 ‘소우주’다. 25,000여 개가 성업 중이며 인구 2,000명 당 한 개 꼴이다. 당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작은 점포 역할에서 금융, 치안 등 공적 영역으로 영토 확장 중이다. 또한 일상의 중심이자 사회 부조리함의 단면이기도 하다. 최근 『편의점 사회학』을 출간한 사회학자 전상인을 인터뷰하고, 편의점이 주 무대인 김경묵 감독의 신작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를 소개한다. 한국 사회에서 편의점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 사이-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의 첫 문단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비튼 현대미술가 바바라 크루거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이어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 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는 편의점을 생각할 때 줄줄이 알사탕처럼 떠오르는 문장들이다.
여러 각도의 정지 앵글로 편의점 내부를 비추는 김경묵 감독의 장편 신작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4)의 도입부까지만 해도 나는 이러한 문장들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veas Gursky 류의 유형학적 사진들, 그중에서도 마켓 내부를 찍은 <99 Cent> 등을 떠올리고 있었다. 매장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고뇌 혹은 허기를 간단하게 휘발시키는 형광등 조명과 그 아래 질서정연하게 분류되어 선택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상품의 풍경은 표백된 분류의 세계임을 알린다. 지에스25시와 세븐일레븐의 문을 열 때 우리는 전과는 다른 세계-익명성과 선택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단 물건을 고르기만 하면 계산의 절차는 매뉴얼에 따라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바코드에 입력된 품목 정보가 고객을 향한 모니터에 가격으로 화하여 떠오르므로, 흥정과 같은 인간적인 대화가 껴들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편의점을 거대한 무인 자판기로 대체할 수는 없다. 포스기가 “투 플러스 원 상품입니다”는 외쳐 주지만 “봉투에 넣어드릴까요”를 물어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정도는 알고 보면 미묘하다. 손님의 행색에 관계없이 공평하고 친절하게 그가 고른 품목에 따라 빨대를 챙겨주거나 전자레인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봉투에 물건을 넣어주되 고객의 익명성을 훼손하지 않을 정도의 무심함을 유지하는 것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철칙이다. 어쩌면 편의점은 카뮈가 말한 ‘다정한 무관심’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날이 밝으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 같은 파란 점퍼를 입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이지만 그들의 면면은 게이, 레즈비언, 취업준비생, 탈북자, 인디뮤지션, 연기자 지망생, 그냥 아저씨, 고교 자퇴생까지 다양하다. 손님들 또한 가지각색이다. 여점원을 희롱하는 신용불량자,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요구르트 배달원, 전도하러 와서 무턱대고 안수 기도를 베푸는 남자, 편의점 냉장고에 소주 한 병 맡겨놓고 수시로 들러 한 모금씩 마시고 가는 노숙자, 어린 딸과 영어로 대화하는 교육열 높은 아주머니까지. 가지각색의 곤란한 고객들이 각각의 아르바이트생과 만나지만, 이 만남의 줄거리를 꿰는 이야기의 힘은 약하고 때때로 개연성이 부족한 판타지적 설정도 있다. 편의점은 무작위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공간이자 서로를 고객과 아르바이트생으로 대면케 하는 장소라는 현실의 논리가 편의점 24시간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하는 영화를 지탱해 주고 있다. 그렇게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의 에피소드에는 아르바이트생의 피곤과 고객의 진상, 연애스토리와 판타지 등이 뒤섞인다.
여기에 점주의 사정이 끼어들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는 편의점 프랜차이즈 구조까지 확장된다. 프랜차이즈 가맹점 점주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갑이지만, 본사에게는 을인 끼인 존재다. 언제나 조금씩 차이가 나는 재고량, 예고 없이 매장에 들러 벌점을 매기는 본사 직원의 암행어사 식 감찰, 개업을 위해 진 빚과 본사에 지불해야 하는 대금에 치이는 점주의 사정. 결국 그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주식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시시때때로 드나들던 창고에 목을 맨다. 영화의 대부분은 시트콤 같은 톤을 유지하지만, 조국 근대화를 위한 국민들의 헌신을 독려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음성으로 시작해 목매단 편의점 주인의 비극으로 끝맺는 수미상응에서, 애초부터 매우 독한 기획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들의 끝이자 오늘의 편의점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편의점은 오늘의 편의점과 상당히 다르다. 20여년 전 내가 살던 오류동에 최초로 들어선 편의점은 미니스탑이었다. 맥도널드도 피자헛도 없었던 동네였기에 미니스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햄버거를 주문하면 계산대 옆에 딸린 작은 주방에 들어가 바로 만들어 주던 곳. 꽤 먼 곳이었지만 노란 간판과 야외 파라솔, 햄버거를 생각하면 마냥 설레어 부모님을 보채곤 했다. 유년시절 편의점은 엄마 손 잡고 놀러 가던 곳이었고, 여느 가게가 그러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사정을 알고 지내게 되는 이웃이었다. 현재는 상권을 고려하지 않는 본사의 우후죽순 식 점포 늘리기로 개별 가맹점주들의 소득이 보장되기 어려운 사례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본사가 갖춰주는 시스템의 편리함과 소득성의 보장은 꺼지지 않는 편의점 불빛만큼이나 희망찬 것이었다.
얼마 전 퇴근 길, 때 이른 모기의 등장에 갑자기 물파스가 절실했다.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가니 할머니가 유니폼을 입고 계산대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물파스는 없다기에 모기 물린 데 바를만한 것이 있냐고 여쭈었더니, 느리게 일어나 매대 어딘가로 이동하더니 본인이 오랫동안 애용해왔다는 물건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조그맣고 노란 그것은 간호사가 그려진 안티프라민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들어왔는데, 물을 마시러 자주 드나드는 고양이라 했다. 할머니가 시청하고 있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고 편의점을 나서면서 왠지 미소가 번졌다. 최소화된 용도에 맞춘 상품 제작으로 소비를 다각화하는 편의점 경제의 흐름에 역행하는 벌레 물린 데도 바르고 타박상에도 바르고 진통제로도 바르는 안티프라민 식 다기능의 다정함, 고양이와 드라마가 안겨주는 한가로운 정서, 서비스의 신속도와 함께 커진 익명성의 관계에서 잃어버렸던 사람 대 사람의 대화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피곤한 오늘 퇴근길에도 나는 아마 할머니의 편의점에 갈 것이다.
우아름
국문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미술잡지, 국립극단을 거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연구소에 근무하며 예술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즐겁게 바라보는 중이다. 사람과 작품 사이를 잇는 바느질 같은 글쓰기를 희망한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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