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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를 위한 정치와 예술의 에로스

박상훈 × 임민욱

삶의 대부분이 상품화·시스템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과 정치는 어떤 공통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공동체 안에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괴물이 되어가는 미디어 속에서 우리 스스로 책임 있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들이 일상으로의 복귀를 주저하는 동안, 정치학자 박상훈과 예술가 임민욱이 만나 이러한 질문들을 나눴다.


박상훈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한국 지역 정당 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 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있다. 주요 저서로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정치의 발견』, 『민주주의의 재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공저),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공저) 등이 있다.

임민욱 전통적 미술재료가 아닌 촛농, 깃털, 뼛가루, 스펀지 등의 유기적 질료를 써서 죽음과 파괴의 이미지에서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다층적 이미지의 오브제 설치 및 퍼포먼스, 영상 작업을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뉴타운 고스트>, <SOS_채택된 불일치>, <손의 무게>, <포터블 키퍼>와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 프로젝트 <불의 절벽> 등이 있다.

진행 박성태 본지 편집인


임민욱  정치학을 하신 박 대표님은 ‘정치적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정치적 예술’은 곧 ‘순수하지 않다’는 부정적 시선을 내포하거든요.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예술에서 정치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박상훈  예술과 정치 모두 인간 활동의 가장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모든 형식은 예술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 구성원이든 국가나 도시와 같은 일정한 정치적 형식 안에 살면 정치적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정치 역시 좋은 삶,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을 위한 것이므로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예술은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죠.

임민욱  ‘예술은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넌센스라는 말씀이시군요.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덧붙이면, 저는 ‘이 작업이 사람 사는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정치적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동기를 부여하는, 그런 희망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말이에요. 오히려 슬픔을 대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힘이 신념과 지속적인 열정을 불러내니까요. 그런 것이 박 대표님이 말씀하듯 ‘좋은 삶, 아름다운 삶’이라 여기며 살 수 있게 하는 작가적 실천을 길어내기도 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는데, 도덕적 판단을 지향하거나 윤리적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박상훈  그럴 수 있죠. 정치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된 조건 (그것을 공공성이라고 부르든, 공익적이라 부르든)을 잘 다뤄서 개개인이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히는 데 그 윤리적 목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역으로 개개인이 모두 정치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모두가 정치적인 사회는 오히려 끔찍합니다. 하지만 개개인이 사적인 목적과 가치를 자유롭게 지향할 수 있으려면 누군가는 정치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줘야 해요.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다만 앞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은 예술이나 정치나 이데올로기성이 강하다는 것이에요. ‘저 사람은 예술가인데 정치적이다’, ‘저 사람은 정치학자인데 권력지향적이다’ 등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성인데, 이런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그만큼 보편적이고 중요한 인간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정치적인 것을 빼거나, 정치는 예술을 이용하지 말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가장 중요하게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을 억지로 떼어 놓고 문제의식을 흐릿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보죠.

에로스인 정치 활동, 오늘엔 노출증으로

임민욱  정치의 어원 자체가 개인 모두에게 공통된 조건, 그것을 잘 다루는 것이라는 말이군요. 그래서 저는 ‘보편적이고 중요한 인간 활동’을 공통분모로 미학과 정치학의 연관성을 찾아보고 싶은데요.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운영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정치적인 것은 고인에 대한 모욕이니 가만히 애도만 해라”였답니다. 대부분 ‘정치적이다, 아니다’의 논쟁은 ‘권력 지향적이다, 아니다’ 따위를 소모하거나 욕망이 어떻고, 에고가 어떻고, 진정성이 있고 없고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정치적인 것의 의미는 왜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됐을까요. 정치의 시작도 말이고 창작 행위 역시 몸의 말이라고 볼 때 공통된 것이 분명 있을 텐데요. ‘그림이나 그려라’,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라’, ‘너나 잘 하세요’ 같은 말들은 역설적으로 불화가 있을 수 없는 정치적으로 가장 폐허를 닮은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우리가 껴안은 문제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아요.

박상훈  정치가라고 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너무 협소한 직업의 세계로, 권력을 다루는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원래 정치의 출발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익히고 발휘하는 것에 있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정치가들은 철학과 건축학 등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런 지식을 ‘에로스Eros’라고 불렀어요. 어울림을 좋게 하려면 어떻게 돈과 사람을 모을지 그리고 외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외벽이나 둘레는 어떻게 배분할지 고민을 했죠. 이처럼 공통으로 지향한 가치와 전망을 어떻게 만들고 수용할지 등을 고민하는 행위를 에로스라 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활동 중에서 정치란 가장 에로틱한 분야이고 또 그만큼 고결한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그런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자 하거나 소명의식을 갖춘 사람이 점점 사라지다 보니, 정치가 일반 사람들의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임민욱  저는 정치적 활동을 에로스라 부른 것을 떠올릴 때마다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마중물에 견주어 이해하곤 했어요. (너무 그림 같은 생각이라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즉 첫 물과 큰 물의 관계처럼, 첫 물은 어떤 정치적 사건이 될 수도, 창작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에로스가 길 (혹은 풍요)의 신Porus과 결핍의 신Penia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잖아요. 미학과 정치의 관계도 사건과 나눔의 과정에 비유해본 거지요. 위에서 아래로, 혹은 수면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리고 내려가며 불어나는 깊이와 폭의 관계 같은 것으로 보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사실 박 대표님의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 2013)을 읽기 전까지는 ‘정치가’ 하면 왜곡된 이미지밖에 없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의 대가인 줄로만 알 듯이요. 그러나 ‘공통으로 지향할 가치와 전망을 알아가는 가장 에로틱하고 고결한 인간 활동’으로서의 정치는 망각하고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나르시시즘으로 매도되어버린 것일까요.

박상훈  과거에 정치학 비유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의사의 활동’이었어요. 현실의 인간 사회에서 긴박한 필요는 많지요. 전쟁이나 큰 재해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과감하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고요. 마치 누군가 참을 수 없는 복통으로 쓰러졌는데, 그 원인을 충분히 조사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면 과감하게 절개를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다른 비유로는 ‘조각’도 있습니다. 조각가가 질료 속에서 형상을 구현해 내듯이 정치가 역시 목적 있는 삶을 지향한다면 현실의 재난, 무질서, 갈등 속에서도 더 나은 형상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가치들이 많이 잊혀졌어요. 정당도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예술이죠. 각자의 수많은 차이와 이익 충돌, 열정이 다르더라도 누군가는 협력과 연대를 이뤄내고 그 가운데 더 멋진 입법 활동과 행정 기능 등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지금은 언론 앞에서 자기 과시나 자기 노출을 즐기는 게 지배적이 되었어요.

왜곡된 사회와 정치, 미디어라는 괴물

임민욱  그렇게 왜곡된 과정에 미디어라는 거물이 괴물이 된 현실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미디어의 위험을 이야기 하면서 미디어에 기대고 또 다시 미디어를 낭비하는 악순환을 멈추지도 않아요. 그래서 이번 세월호 참사 때문에도 그렇고 ‘나에게 미디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박상훈  정부가 없는 사회와 언론이 없는 사회,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정부가 없는 사회를 고를 것 같습니다. 언론이 없는 사회란 결국 권위주의 사회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민주주의가 된 이후에는 언론의 역할이 거의 무소불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민주주의는 모두가 의견을 가질 권리가 부여된 사회를 말하고 그렇기에 힘 위에 서 있는 권위주의와는 달리 의견들 위에 서게 되는데, 그런 의견을 형성하는 기능이 잘못되면 그 부작용도 엄청나죠. 누가 의견이나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그것의 과도함과 독단, 자의성을 어떻게 줄이고 보다 평등한 의견 형성의 자유를 갖게 할 것인가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이 문제를 우리 사회가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면 좋겠어요. 언론은 분명히 없으면 안 되는 기능이고 그만큼 중요한데, 그것이 잘못되면 말씀하신 대로 정말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하게 경험한 것 같아요.

임민욱  언론은 여론을 전달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여론을 반영한다는 설문에 참여해 본적도 없고 제가 통계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숫자에 의존하고 다수가 지배하는 의회민주주의의 딜레마는 바로 이런 ‘대면’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반면 대중매체는 ‘다수의 지배’라는 추상적 정당성으로 왜곡한 정보를 ‘소통’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편집이라는 기술 측면을 보면 결국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선택적 폭력일 뿐이지요. 제게 이라크 전쟁 당시의 가장 큰 변화와 충격도 버추얼virtual 무기들이 지녔던 폭력의 추상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술이 진보한 시대의 미디어는 폭력도 게임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거지요. 총만 무기가 아니고 말도 저열한 살인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책임의 소재와 행방이 묘연합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성찰 능력은 없이 시스템에 기생해서 언제나 셀프-용서하면서 계속 굴러갑니다. 작동 주체는 엄연히 누군가였을 텐데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과거의 전쟁’ 같은 것이죠. 미디어 기계가 내세우는 중립은 효율과 쓸모 있는 것만을 우선시 여기는 사회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역설적 이데올로기라고나 할까요. 

박상훈  제도나 체계가 가장 중시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공리주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효과 내지 효용 중심의 공리주의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봐요.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직 원리이자 조정 원리니까요. 문제는 그런 가치만 지배하면 안 된다는 데 있죠. 공동체적 요구도 있고 시민적 의무도 있고 인간적 윤리성도 필요합니다.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적 원리로만 작동한다면 공동체는 깨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고통 받아요. 다원주의 사회라면 언론도 나름 정체성이 있고 지향하는 가치가 서로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현실을 본다 하더라도 눈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있는 사실이나 그냥 비추면 된다’가 아니에요. 언론사가 무엇을 선택적으로 주목하느냐에 따라 ‘사실’의 의미는 다르게 형성될 수 있고 그 때문에 책임성이라는 가치가 실천될 수 있는데, 이 부분의 윤리성이 크게 약해졌다는 것을 이번에 보게 되었어요.

임민욱  언론사가 선택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흔해졌는데 책임성이라는 가치를 실천하는 것은 실종되어버린 게 현실이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마 이번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의 가장 큰 쇼크는 생중계를 마주하고 벌어진 죽음의 방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동원된 무작동, 모든 것에 참여한 무기력…… 학생들 또한 죽음의 순간에 휴대전화로 서로를 찍고 그것을 SNS로 보내고 했지요. 이 이야기를 하자니 아직도 떨리는데요. 여하튼 죽음은 그저 이미지였고 미디어는 모든 것을 가상화시켰다는 점에 새삼 경악합니다. 믿겨지지 않았던 거죠. 어떻게 죽음이 그림이고 이데올로기입니까. 그런데 막상 미디어를 더 이상 못 견디게 되었을 때는 저는 어줍잖게 데생이나 하고 있더군요. 회피겠지요. 하지만 말을 잃은 사람이 말을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과 비슷한 걸까요. 그림을 그리면 더 집요한 물음과 대면하게 됩니다. 봐야 하니까,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물고 늘어져야 가능한 또 다른 회복 같은 것인지…… 아니면 ‘설명 받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박상훈  문제가 정확히 뭔지 알아야 회복도 할 텐데, 지금은 문제 자체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작위적인 요소들이 상황을 지배한다고 생각해요. 비극을 기억하는 방법은 ‘잊지 말자’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인간은 비극을 계속 각성하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비극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유사한 죽음을 막는 문제에서의 변화와 개선이 있을 때 비극을 통해 배우게 되고 또 잊지 않을 수 있죠. 개인적으로 장례를 치른 경험이 여러 번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장례제도라는 게 사람을 너무 지치고 피곤하게 해서 가까운 이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도망가고 싶은 심리, 회피하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강요하는 듯했어요. 지금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결국 잊혀 지는 방식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요. 글쎄요, 해경과 승무원, 구원파 등 회사 관계자 등을 희생양 삼아 한바탕 소동을 치르면서 이 사건도 어느 날 과거가 되고 말지 않을까 해요. 이런 상황에서 치유나 회복은 사실 상황 정리를 위한 마무리 언어가 되지 않을까요.

임민욱  바로 그 지점에서 미디어가 기억을 위해 비극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흔해빠진 눈물로 만들어 버리고 뭐든지 잽싸게 소비시켜 버렸지요. 미디어 폭격 맞고, 빨리빨리 소비해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덮어버리자’ 하듯이요. 말씀하신 대로 지금처럼 ‘잊지 말자’를 슬로건화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안 잊을 건데’라고 되물으며 살펴보면 좋겠어요. 언제나 상투화되는 것을 경계할 때만이 정치와 예술이 의미를 지니며 나타났죠. 그러나 이 사회 속에서는 죽음마저도 이데올로기화 되어서 순수담론에 갇혀 버렸어요. “세월호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불순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말이 난무합니다. 그러더니 더 어처구니없게 “박근혜를 구해주세요”라는 선거구호가 등장했습니다. 죽음 이데올로기의 반격과 전용 같은 걸로 보입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박정희 아버지의 죽음’ 이데올로기가 활용된 선거를 본 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정치의 실종을 드러내준 다른 사례도 못 본 것 같아요.

박상훈  이 비극적 사건이 갖는 성격의 근원은 그런데 고문피해자들의 비극성이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비극성과 배타적일 이유가 없잖아요. 이상하게도 세월호 참사가 의미화 되는 방식은 5·18 문제나, 쌍용자동차 관련 이슈를 모두 잠식해버렸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비극적 죽음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극이 다른 비극을 억압하는 기능을 하게 된 거죠. 죽음과 비극을 다루는 방식과 관련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죽음과 비극 앞에서 퇴화하는 공감 능력

임민욱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말씀하신 ‘죽음과 비극을 다루는 방식’이 아닐까요. 저는 그 부분에서 미디어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고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비정치화하고 순수 비극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반복을 용인하려는 의도로밖에는 안 보입니다. 저로서는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미디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미학과 정치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미디어가 광주 5·18에 대해서 무엇을 전했지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또 일제시기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 저는 왜 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미디어는 오히려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넘어가자’며 외면하길 재촉합니다. 사실은 제대로 전달하지도 않았고, 안다는 것도 다른 문제인데. 반면 예술은 우리 인간존재가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박상훈  한편에는 그 비극을 비정치적인 의미로 고정시키려는 노력이 있고, 비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이해되는 비극들이 억압되는 구조가 이차적으로 발생하죠. 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가슴 아파해야 하는 착한 백성, 선민으로 의미화되어서 사람들을 무기력한 상황으로 만들어내고, 시간이 지나서 “검찰이 악의 근원을 쳤습니다”라거나 “대통령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라는 권위주의적 구조를 반복해요. 예전에는 그것이 강제적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자유로운 미디어 환경이라고 하는 형식의 정당성 때문에 참 대응하기 어렵게 되었죠.

보통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먹고 사는 데 있어요. 장사가 안 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이것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사회적 비극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장사하는 개인으로서의 욕구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해석 틀과 의미 구조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내적 갈등 속에 내쳐져 있는 것이 지금의 보통사람들 같아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사람 마음의 간사함이 승리하게 되죠. 사회 전체적으로 가짜 심리를 만들고 조장하는 것 같습니다.

임민욱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국가공동체의 역설적인 본질 아닌가요. 권위에 기대려 하고 결국은 전체주의적 ‘우리’ 속으로 더 빨리 동일시되고 포섭되고자 하는 논리. 여론이 개인 미디어를 통해 자유를 얻은 것 같고 독립성을 획득하며 확장된 것 같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며 굉장히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거죠. 소셜네트워크가 기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결국 체면decency의 상실이 아닐까요. 대면을 회피하는 이유와 같은 거죠. 자살의 증가도 그 지점에서 헤아려 보고 게임과도 같아진 첨단무기의 버추얼 전쟁을 연관 지어 떠올려본 이유입니다. 여론이 많고 다양해 보일수록 더 서서히 죽어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박상훈  네, 맞아요. 우리가 이 사건을 대하면서 더 도덕적이 되고 있나, 인간적인 존엄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나,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 더 향상되고 있나, 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긍정적으로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그 방향으로 시민적 관심이 모아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앞으로 정치가, 정치학자 등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일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이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에는 ‘여러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거든요. ‘인생이라는 게 이럴 수 있구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떠나는 일은 없어야겠구나’ 등의 실존적인 자기변화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다음 세대에게 같은 환경을 물려줄 수는 없겠다’와 같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생각을 공유하고 협력을 조직할지 등의 생각과 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안 되는 현실이 괴로운 거죠.

임민욱  ‘여러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라는 말이 신선하게 들릴 정도라서 여론몰이에 집중하는 미디어가 바로 비정상이라는 것을 새삼 각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막상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죽음을 그 어느 문명, 그 어떤 문화보다도 금기시한다는 겁니다. 지금 ‘잊지 않겠습니다’의 의미로 노란 리본을 내건 사람들을 아직도 많이 봅니다. 그 다짐은 기억하겠다는 것이고 죽음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사회라서 그런 것일까요? 죽음과 성찰적 관계를 맺고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죽음이 완전히 세척된 공동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선 ‘배불리 먹고 난 뒤 민주주의’라고 그랬다지요. 그런데 이젠 더 이상 먹고사니즘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사회와 공동체를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죽음에 골똘한 이유도 ‘어떻게 새로운 관계가 가능할까’ 차원에서의 고민 때문입니다. 빨리 애도하고, 기념비 만들고, 상징 만들고 해서 처리하는 방식만이 ‘클린한 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실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 기억의 정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 더 나아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부분들 모두가 여전히 기억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상훈  죽음을 통해 두 가지의 힘이 서로 갈등하는 것 같아요. 하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부터 시작해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내 모양새에 대한 것까지 반성적 성찰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어떻게든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려는 힘이에요. 후자의 힘은 체제나 제도 등을 통해서 작동하고, 또 맨날 이 일만 하는 사람이 있죠. 그런데 우리 같은 개인은 그런 고민과 행동을 간헐적으로밖에 못하기 때문에 실존적 성찰에서 그치고 그다음은 어려워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제도나 체제의 힘이 더 압도할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실존적 성찰이 사회적 확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정부나 검찰의 대응과 이를 보도를 통해 실현하는 언론과 관련해 비판적으로 눈여겨봐야 하는 부분이죠. 사실 미디어 환경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한 결과의 측면이 상당히 커요. 정치도 사회의 주요 사태를 표현하고, 해석하고, 어떻게 변화를 조직할지에 대해서 개입하고 역할을 해야 했는데,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니까 미디어 환경도 무책임해졌어요. 독자나 미디어 소비자들의 영향도 예전에 비해서 줄었고요.

임민욱  성찰의 결과로 말은 많아졌는데 그래서 또 쓸모없다고 여기는 거군요.

박상훈  맞아요. 미디어 관련 연구결과에서 보듯이, 말은 많아지는데 막상 정보와 지식양은 줄고 있어요. 왜냐하면 기존의 여러 해석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쪽의 판단을 강화하는 말만 하거든요. 말과 주장, 정보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그것이 대지를 골고루 적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곳에만 갖다 붓는 사회적 폭포social cascade 현상이 강해져요. 같은 이미지와 주장만 자극적으로, 반복적으로.

임민욱  그것이 미디어 여론과 정보의 포르노성이라고 하죠.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의견만 조준해서 반복 제공하고 왕복 운동만 하는 것.

미래사회의 민주정치 미학과 정치의 대면

박상훈  권위주의 아래에서는 정치가 무섭잖아요. 사나운 시대이기도 하고. 그런데 민주주의가 되면 정치는 견제할 수 있어요. 보수정치든 뭐든 시민권력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기반으로부터 유리될 순 없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다루기 어려운 집단은 경제권력이나 행정권력 같은 비선출직 권력집단이라는 걸 알게 돼요. 민주주의에서는 정치가 권력을 가져도 그렇게 위험해지지 않아요. 경제권력이나 행정권력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선출된 정치권력이 제 역할을 할 만큼 강해지면 정치가 가진 특권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정치를 줄여서 특권을 없애겠다는 방식은 정반대의 결과만 낳죠. 예컨대 스웨덴은 정치가 가장 센 나라죠. 경제 분야를 이들만큼 변화시킨 정치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스웨덴의 정치가들은 특권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어요. 경제권력이나 행정권력에 비해 정치가 발휘하는 힘은 강한데, 개개인의 정치가가 갖는 특권은 별로 없어요. 모두가 공익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을 물어보면 열 명 중 서너 명은 늘 정치가가 꼽아요. 그러니 건물이나 광장을 만들 때 정치가의 이름을 넣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죠. 이것이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민주정치의 미래이지 않나 합니다.

임민욱  저는 미래를 바라보며 말하려는 이 시점에서 더욱 근원적인 시작점에 서서 단단하게 연루된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상상해봅니다. 예술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고 여러 차원에서 대면하는 것이니까요. 맹목의 대피소가 되어 버린 미디어의 품에서는 ‘어떻게 뛰쳐나올 것인가, 어떻게 시작점에 서서 누구와 마주할 것인가, 무엇과 대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해요. 사실은 정치랑 예술이 그 긴장과 갈등 위에서 다시 만나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보려고 해야 해요. 그 위에서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에로스 활동이 펼쳐질 기회가 다시 마련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또 서로 영역 구별 짓기 같은 것만 하느라 말이 쓰이고 ‘예술은 정치적이면 안 된다’라는 ‘경찰’만 군림하는 게 현실이네요.

박상훈  정치와 예술 모두 갈등적 열정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가장 강렬한 창조력을 갖는 영역이기도 하죠. 정치도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경의를 가져야 한다면 ‘정치가 무슨 예술이냐’라거나 ‘예술은 절대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것은 경청할 가치가 없는 말들이지요. 옛날 아테네에서도 민주정치가 잘 될 때는 비극이 성행했다고 해요. 민주정치가 나빠질 때는 희극이 발달했고요. 르네상스 공화주의도 전성기 때는 비극에 대한, 인간의 악에 대한 소재가 많이 다뤄졌다고 해요. 그래서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죽음과 악에 대한 의제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죽음과 비극 앞에 죽음을 제대로 응시하면서 이 상황에서 인간 정신의 빛남과 가능성을 찾아야 하지 않나 해요. 보통사람들도 이번에는 언론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본 것 같아요.

임민욱  유가족들이 그래서 한국 언론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를 보여줬잖아요. 정치인들은 TV에 나가는 게 중요했지만 막상 피해 당사자들은 미디어에 저항했다는 점을 계속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유가족들은 대면하길 바랐지요. 그래서 그들은 청와대로 나아갔고 우리는 그들의 말이 더 강력하게 ‘정치적’이 될 수 있도록 길어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전 그 요구가 던진 정치적 의미가 앞서 말한 마중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죽음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이야기를 회피하고 아무것도 못 본 척 가만히 있어라’ 라는 정치적 억압에 맞서 더 이끌어내야 한다는 거죠. 제대로 응시하면서 비극과 기억의 의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마중하러 나가는 것을 더 이상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서 소외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박상훈  정치는 좀 투박하기에 그런 문제를 잘 다루지 못해요. 예술 분야에서 미디어 문제에 대해 창작의 소재든 야유의 소재로든 많이 삼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기자들도 매우 괴로웠을 텐데, 언론 스스로도 되돌아볼 좋은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정치도 제발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의미를 공유하는 이해의 조건을 넓히는 데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요. 민주정치의 기원은 말의 힘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좋은 사회를 위한 정치와 예술의 에로스

분량13,111자 / 25분 / 도판 4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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