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공간, 신체, 자연
이타미 준 × 박성태
분량8,741자 / 17분 / 도판 7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인터뷰
이타미 준 선생과 장충동 근처에서 지인 몇 분과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한정식집으로 기억한다. 선생은 조용히 식사하는 편이었고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말문을 열었다. 인터뷰 자리는 아니었기에, 선생의 과묵함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땅에서 얻은 거친 재료로 추상의 세계 -그것도 세련된 모더니스트로서- 를 추구하는 선생다웠다. 선생은 지역과 전통의 문맥에서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해 설계하는 건축가이기에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진 말들을 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오랜 시간 거센 바람을 헤치고 온 건축가와 잠시의 ‘언어적 소통’은 언제나 미적지근하니까. 또 한 번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당동에 있던 <각인의 탑>에서의 저녁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 단순하면서도 강한, 원시적이면서도 미래적인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내게 오롯이 각인되어 있다. 선생의 후기 작업인 <제주 프로젝트>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선을 건드리는 강렬함과 원숙함을 느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으니,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오랜 희망은 이루어진 셈이다. 전시는 ‘소재의 탐색’, ‘원시성의 추구’, ‘매개의 건축’, ‘바람의 조형’과 같은 키워드를 통해 40여 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되짚어보며 여러 겹의 문제를 던지고 있다. 아쉽게도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남겨진 자료와 기억을 되짚어 이 지면을 구성했다.
이타미 준 (유동룡 伊丹潤, 1937~2011) 재일교포 건축가로 사물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건축물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는 만지고 그리는 신체 감각을 매개로 건축을 익히고 표현하려 했으며, 자연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흙, 돌, 나무와 같은 소재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건축을 지향했다. 또한 이타미 준은 조각, 그림, 음악 등에도 조예가 깊어 현대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인터뷰 박성태 본지 편집인
박성태 선생은 일본에서도, 그리고 고국인 한국에서도 언제나 경계인이셨습니다. 재일교포 유동룡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면서 이타미 준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하셨죠.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을 갖는 의미가 흥미롭습니다.
이타미 준 이타미는 제가 한국에 오갈 때 이용한 공항 이름입니다. 준은 작곡가이자 친구인 길옥윤吉屋潤의 일본 이름, 요시야 준에서 따왔습니다. 특별한 뜻이 있기보다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갖고자 지은 거지요.
박성태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선생께서 일본 건축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의 미에 영향받은 건축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백자와 일본의 ‘모노하物派’1가 선생의 작업에서 동시에 보인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준 나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에요. 일본 근대 건축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없애는 데에서 나오는 무無의 감촉과 정신을 공부했어요. 특히나 70년대의 나는 일본의 건축계보다는 예술계와 친분을 유지하면서 당시의 기술적 발전을 받아들이기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더 많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 중용을 생활 철학으로 삼는 사상, 멋이라는 언어의 정신적 깊이와 순수함,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선과 면의 조화와 무아無我의 세계 등. 친구인 하야시 요시후미林 芳史는 나를 ‘일정치 않은 표백表白, ひょうはく의 작가’라고 평했어요. 한 군데 몸을 두지 않고 떠돈다는 말이지요. 맞는 말이에요. 건축가에게는 땅이 주어졌을 때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죠. 그런 환경이 오히려 나에게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특권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성태 구라카타 슌스케倉方俊輔는 선생의 건축을 ‘건축물’이라기보다 ‘사물’의 감촉에 가깝고 오감을 구사하여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상자’가 아닌 주변 공간을 만드는 ‘사물’이라고 말했지요.
이타미 준 현대 건축의 방법론 가운데 하나는 전통과 역사적 문맥에 기대어 자신의 신체적인 감각으로 건축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내 건축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내 건축은 더욱 근원적인 곳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종종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거기에 서서 움직이고 싶지 않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자연의 나무나 돌이 건네는 말을 듣고 싶지요. 바람의 소리,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고요.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 새로운 공간이 보입니다.
박성태 초기작들이 주로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 돌, 나무 같은 소재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건축을 발표해 오신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비애감의 표현’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지요.
이타미 준 무엇을 밑바탕에 둘 것인가?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온기, 생명을 작품 밑바탕에 두는 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요소를 어떻게 감지하고 이것을 만들어질 건축물에 담아내는 일,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잖아요. 유한의 생명이기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는 미의식이 생겨납니다. 미의식의 근저에는 비애,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새로운 미의식이 생겨나는 겁니다. 나는 내 건축에서 무nothingness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박성태 예술 작업에서도 건축 작업에서도 ‘손’의 기운이 충만합니다.
이타미 준 나는 건축 작업을 할 때 내 손길과 신체성으로 직접, 독자적으로, 나만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구축하고 싶습니다. 디지털과 컴퓨터 그래픽에 공간 구성을 맡겨 가상의 건축을 추구할 마음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건축의 발상은 ‘펜’이나 ‘연필’로 나오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자유의 세계로부터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는 거죠. 그래서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은 내 작업의 근간根幹입니다. 감성은 직감이고 스스로 다지지 않는 한 생겨나지 않지요.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내 손의 흔적을 많이 남기려고 합니다. 현대 건축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따뜻함과 야생성입니다.
박성태 그래서 사무실 책상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조명은 설계도를 그리는 손만 비추는 것이군요. 그 자리에서 주로 드로잉을 하셨겠지요?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신 드로잉 작업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습니다.
이타미 준 종이 한 장에 그려진 드로잉은 그 건축의 구석구석을 상상하게 하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실재 건축보다 더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아마 드로잉에는 건축 도면 이전의 사유와 의미가 담겨 있어, 풍경 너머까지 공상을 확대하고 모든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 만지고 그리는 신체 감각을 매개로 건축을 익히고 표현하는 거죠. 그래서 나의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드로잉입니다. 그러면 감성이 먼저 작동합니다. 웅변보다는 침묵에 익숙한…….
또한, 내게 드로잉은 건축의 밑그림인 동시에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는 수단입니다. 건축으로 이행하기 위한 원초적 체험이며, 건축으로 연결될 구조의 기본 틀이죠. 내 건축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고, 내 사고의 답답함과도 호흡합니다. 실체화될 그 어렴풋함……. 손으로 더듬은 입체의 윤곽과 연속……. 그것들을 끌어안는 그 순간 심오한 영혼과 같은 어떤 대상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대상이 뚜렷이 드러날 때 그것을 건축을 위한 드로잉이라 말할 수 있어요.
박성태 <온양미술관>(1982)은 한국에서의 첫 번째 프로젝트입니다. 장인의 작업을 기반으로 한 토속적인 건물로 선생님이 큰 애정을 가진 프로젝트로 보입니다.
이타미 준 처음부터 흙과 기와를 이용한 야성적인 토착적 건축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에요. 예산이 너무 적어 고심을 거듭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곳의 지표가 붉은색을 띤 황토였고 그 양 또한 많았는데 주위의 민가가 흙벽돌집이라는 것이 그때야 보이더라고요. 장인에게 상의하니 벽돌을 흙으로 만들자고 하더군요. 당시 그 지역에 공사를 할만 회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직영으로 공사를 진행했어요. 결국, 그 지역에 내재하고 그 지방에 존재하는 역사성을 체현하면서 나의 정신과 사상을 분명하지는 않지만 충실하게 실행했다고 할 수 있죠. 함께 고생한 시간만큼 애정도 있고요.

박성태 <먹의 집>(1975)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업실이자 집인 이 공간은 1층은 검고 2층은 흰, 어둠과 빛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방이면서 복도인 ‘사랑舍廊’에 대한 생각도 담겨 있습니다. 미야케 리이치三宅理一는 “조선 시대의 문화와 일본에서의 일상성이 뒤섞여 항상 그 양극단으로 분해되는 긴장감을 내포한 정신의 알력, 또는 조형작가로서 던지는 질문과 건축가가 갖는 생활공간에 대한 시선이 미묘하게 교차한다.”고 평했지요.

이타미 준 내 마음은 항상 빛과 어둠 사이에 있고 긍정과 부정의 사이를 떠돌면서 늘 희미한 불빛을 좇고 있어요. 그런데 내 눈은 아직도 어두운 곳에만 쏠려요……. 그래서일까, 이 검정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자는 일단 들어가면 나를 빛이 있는 곳으로 꺼내주지 않지요. 참 미묘한 어둠이에요. 이 미묘한 검은 상자가 도시라는 바다 위를 떠도는 상처 입은 배인 듯한 느낌이 들죠. 밝은 2층은 해치를, 어두운 1층은 배의 바닥을……. 조선 시대에는 남자의 공간으로 사랑舍廊이라는 별채가 있었지요. 서재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임과 동시에 그의 침실이기도 한 이질적인 공간입니다. 이곳이 그런 곳이죠.
박성태 80년대 작품 중에는 예를 들어, <조각가의 아틀리에>(1985), <각인의 탑>(1988), <석채의 교회>(1991)처럼 돌을 다양하게 이용한 작업이 많습니다.
이타미 준 <조각가의 아틀리에>, <석채의 교회>의 돌은 가가와 현에 사는 이즈미 마사토시和泉正利라는 석공이 쌓았습니다. 그는 돌의 말을 알고 있었죠. 그는 “돌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어요. “사람의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좋다”고도 말했습니다. 돌에도 눈과 귀가 있고 신경도 있다니……. 돌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돌이 사람을 쳐다본다? 굉장한 생명력이 있다는 거죠. 예로 <석채의 교회>가 자리할 홋카이도의 풍경은 한없이 막막해서, 인공의 흔적은 한겨울이면 모두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이 풍경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덩어리는 돌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나무든 돌이든 소재를 다루는 양식이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인공적인 손길로 그것이 가진 본질을 드러내는 것,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돌을 쌓아야만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엠 빌딩>(1992)은 돌이 조금 색다르게 표현된 경우지요. 도시 속의 건축 역시 돌 쌓기가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에서 야성이 풍기지요.

박성태 건축에서 야성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타미 준 도시 대부분은 비정상적인 소비 구조 속에서 물자만이 아니라 도시 공간마저도 소비의 바다에 잠겨 있습니다. 일본의 현대 건축 역시 범람하는 미디어의 정보 속에서 언뜻 화려하고 끝없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소특수성site-specific을 잃고 모든 것이 획일화되고 있죠.
아무리 화려한 작품도 일시적으로 주목을 받다가 순식간에 잊히고 맙니다. 일본의 현대 건축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입니다. 탁월한 사상에는 온기가 느껴지듯이 탁월한 건축에는 따스한 온기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건축 디자인의 밑바탕에 창조의 주체인 인간의 체온과 생명을 통찰한 것이 깔리지 않은 한, 진정 새로운 존재를 얻을 수 없으며 탁월한 도시 풍경 따위는 절대로 생겨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건축에서 흙이나 돌 또는 나무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존재감과 색채로 시간과 공간의 긴장된 관계를 연출하곤 합니다. 모든 건물을 흙이나 돌로 지을 수는 없지만, 흙의 감촉이나 돌의 묘미가 오래도록, 강하게 살아남은 건축에 매력을 느낍니다.
박성태 <각인의 탑>은 “상징주의적 성격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는데요.
이타미 준 주변에 먼지투성이의 붉은 벽돌집이 많잖아요. 소비 사회에서 곧 쓰러져갈 이런 풍경에서 폐허의 조짐을 예감했고, 그래서 조각과 같은 건축을 했죠. 폐허가 될 도시에서도 살아남을 근원적인 형태, 즉 피라미드 형태를 이미지화한 겁니다. 또 그것은 조각을 올려놓을 받침이 아니라 조종釣鐘의 이미지, 곧 범종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감각을 형상화하려고 했습니다. 건축물을 지축으로 정하고 꼭대기의 조각은 하늘로 더욱더 치솟게 한 거죠.

박성태 2000년 이후, 그러니까 <제주 프로젝트>부터는 이런 대담한 상징이 강한 표현은 많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타미 준 물론 2002년부터 나의 건축 기법이 여기에서 벗어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조금 자유로워졌습니다. 이른바 힘을 뺀 자연스러운 자세를 갖게 됐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때는 보다 풍토, 경치, 지역의 문맥context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고 건축에 스며들 수 있을지 고민했던 시기입니다. 가령 바람이 강한 장소에서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야 할까요? 제가 프로젝트를 한 제주도는 바람이 강합니다. 그 악조건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거죠. 경치와 건축이 대립해도 좋고 또 조화되어도 좋습니다. 거기서부터 발생해서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나는 보고 싶습니다.
박성태 제주도의 <핀크스 뮤지엄>(바람, 돌, 물, 두손)은 그 자체가 작품입니다. 자연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기능이 무엇인지 애매하기도 합니다.

이타미 준 내가 전달하려 했던 것은 건축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세계, 즉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에요. 사물과 공간은 서로 호응하여 공백을 만들어 내죠.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한데 뒤엉켜 ‘필연적인 현상’이 순간을 포착한다는 발상입니다.
건축물이라는 것이 그저 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체로 삼아 건축물을 ‘매체’나 ‘매개’로 인식할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어떤 여백이 생겨나는가, 어떻게 조화되는가, 반대로 어떤 대립과 복합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에 걸쳐 ‘관계항’을 주제로 건축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답들이 제주도 프로젝트로 실현된 것입니다.
박성태 왜 바람, 돌, 물인가요?
이타미 준 제주도에는 유명한 것이 세 가지 있어요. 바람, 돌, 여자(해녀)지요.
박성태 제주도 <포도호텔>(2002)은 낭만적이고 평온합니다. 제주도 민가의 지붕과 공간 흐름을 차용했다고는 하지만, 선생의 몸의 직감에 의존한 느낌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누구는 ‘오름’이라고 하고, 누구는 ‘초가’라고 하고, 누구는 ‘구름’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묘한 고독과 침묵이 담겨있습니다.
이타미 준 건축가는 겸허한 자세로 자연을 대해야 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포도호텔>은 대지 위의 추상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지와 함께 숨 쉬는……. 그래야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맛이 우러나오는 거죠. 공간이란 무엇일까요? 합목적성만 강조하면 틀림없이 기능적으로 잘 다듬어진 차갑고 멋없는 공간이 되고 말 거예요. ‘쓸모없다’는 추상적인 언어의 범주에는 인간의 삶에 무언가 비범한 것, 또는 공간의 본질과도 같은 무언가가 담겨있어요. 제주도는 섬이고, 바다에서 바람이 항상 불어옵니다. 그런 환경에서 말한 묘한 고독과 침묵이 나오지요.
박성태 ‘국제건축가’라고 들어보셨지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을 남기는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건축가들도 국제적인 건축가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밖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를 놓고 전전긍긍할 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합니다.
이타미 준 지금의 국제화는 우리가 서구의 가치 기준에 따라 균질 및 획일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의 것과 저들의 것이 섞여서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철저하게 일방향적이에요. 그런데 건축은 국가의 문화나 전통, 그리고 정신적 풍토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어요. 건축이 종종 무력하게 보여도 우리의 문화, 예술을 이끄는 힘을 품고 있어요. 건축은 다양한 사회의 요구와 감각의 집약체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야죠. 다시 말해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찾아 나서야만 아주 조금씩이나마 지역적이면서, 혹은 보편적인 한국의 현대건축이 탄생하리라고 봐요. 소박하게라도 풍부한 감성이 넘치는 작품은 이런 고민과 시도 속에서 잉태될 거예요. 진정한 독창성은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로부터 표출되고 표현되는 사상이에요. 전통의 기반 위에 현대적인 요소를 삽입하거나 대립시켜 나가면서, 그 수법과 관계를 주축으로 새로운 긴장감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일. 그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를 향해 한 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국제적 건축이 팽팽해질수록 고유한 실제성reality을 전혀 지닐 수 없는 불행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박성태 좋은 건축가란 어떤 걸까요?
이타미 준 나도 건축가가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왔어요. 나는 건축이 단순한 오브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술적 정신과 섞여 있지요. 나에게 건축은 새로운 세계와 매개하는 그 무엇이에요.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이지요. 때로는 정념적이고 때로는 자극적이죠. 무력하게 보여도 건축이 그 사회의 문화와 예술을 이끄는 힘을 품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좋은 건축가라? 딸에게는 ‘전통과 문화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쌓아라’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토고 무라노村野藤吾의 말을 남겼지요. “Stand on History.”
사물, 공간, 신체, 자연
분량8,741자 / 17분 / 도판 7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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