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공통체의 꿈
이종건
분량5,282자 / 10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오피니언
결핍되어 더 간절한 우리 건축의 공통체
공통체……. 참 아름답고, 늘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진정한 ‘살이/존재’의 틀이기 때문이고,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우리 건축 현실에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통체’라는 말은 내게 몇 가지를 즉각 떠올리게 한다. ‘공통 지반Common Ground’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우리 건축 내부의 비난이 가장 드셌던, 김병윤이 한국관 전시 지휘를 맡았던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 전시회(2012),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이 조직한 국제 심포지엄1의 이름이자 그로써 유럽 지식인들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코뮤니즘’ 문화현상(2009), 마지막으로 얼마 전 우리말 번역본으로 출간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통체』(2014) 등이 그것이다.
먼저, 제13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 전시회. 총감독을 맡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공통 지반’을 주제로 제시하면서, 비엔날레를 통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상호 연결된 건축문화를 찬양하고, 그러한 문화가 공유하는 지적이고 물리적인 영역들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기 원한다. (중략) 그리고 ‘공통 지반’이라는 타이틀을 건축 활동 장의 은유로도 써야 한다. (중략) 타이틀은 또한 건물들 사이에 있는 지대 곧 도시의 공간들이라는 함의를 강하게 띤다. (중략) 이 주제는, 개별 재능의 정신으로부터 온전히 발현되는 프로젝트들을 다루는, 오늘날 대부분의 매체들을 통해 전파되는 건축 이미지에 대한 의도적 저항 행위”라고 했다. 치퍼필드는 비록 공통성 사유의 수준이나 깊이가 그 담론에 개입하는 지식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단단히 포획된 건축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향방은 온당히 내어놓은 셈이다.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어 황금사자상을 받은 베네수엘라의 어반 씽크 탱크Urban-Think Tank, 런던 큐레이터 저스틴 맥거크Justin McGuirk, 그리고 네덜란드 사진가 이완 반Iwan Baan 등이 주제에 탁월하게 응답한 덕분에 <다비드 타워Torre David / Gran Horizonte>라는 가치 있는 결실을 거두었다. 시민참여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토요 이토Toyo Ito가 주축이 된 쓰나미 피해 주민들을 위한 <모두를 위한 집>은 지상파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 바람에 우리에게 덜 알려진, 세 사람의 협동 수상작 <다비드 타워>는 개발업자의 죽음과 남미의 경제몰락으로 인해 건설이 중단된, 수직 통로라고는 계단밖에 없는 45층 오피스 구조물을 주목했다. 극빈층 750세대가 무단 점거해서 함께 사는 거주공간으로 만들어나간 과정을 다룬 것으로, 그야말로 공통체 공간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삶의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한 공적 논의
근간 자본주의의 대안/돌파구 이념으로 출현한, 그리하여 어느새 지구 곳곳에서 하나의 강력한 문화 돌풍을 불러일으킨 ‘코뮤니즘’은 우리에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따라서 타도해야 할) 악惡, 곧 현실 세계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공산주의를 지칭했다. 분단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부정적인 틀 안에 위치시키지 않고서는 감히 발설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러니까 심지어 중립적인 학문적 틀로써도 다룰 수 없었던 금기어였다. 그런데 작년 가을 공산주의 이념 콘퍼런스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뿐 아니라, 보수언론의 첨병인 조선일보까지 “공산주의자 지젝 신드롬”이라는 타이틀로 인터뷰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우리는 어느새 코뮤니즘에 내장된 더 나은 삶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공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상황에 와 있는 셈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이 나날이 고약하고 지독해지고 있다. 인간다운 삶과 세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많은 사람의 생존의 틀마저 무너뜨리고 기초적인 인간 존엄마저 지켜내기 힘들게 만든 형국을 체감컨대, 그저 반갑기 그지없을 뿐이다. 때늦지만,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점이다. 이념으로서의 코뮤니즘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정한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로부터 물러나 진리의 이름으로 현실에 맞서고자 한 철학처럼 자본주의 현실 내부에 모종의 거리와 긴장을 생산하여 그것의 비인간적 혹은 반인간적 기제를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갈 방법을 사색하는 이론적 기획이라는 것 말이다. 이 기획이 급격한 동력을 얻은 것은 근간 몇 차례 발생한 지구적 차원의 금융위기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급박한 위기를 신자유주의 관행에 따라 규제 완화/ 철폐하고, 민영화 확대로 소수 기업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 해결함으로써 개혁은커녕 더 큰 위기의 조건들을 만든 상황과 그에 대한 반발로 소위 99%에 속한 자들의 ‘점거하라’ 집단항의 시위가 지구 곳곳에서 발발한 상황 등. 게다가 시민이 대의 민주주의 제도로 선출한 정치인들은 시민을 대의하기보다는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고(대의 민주주의의 타락), 그들이 운영하는 국가는 공적인 것들을 점진적으로 사유화시켜 1%에 속한 자의 손에 넘기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해악) 현실에 직면해 있다. 나날이 위태로워가는 인간적인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 자각한 시민들이 정치적 결사에 나선 것도 크게 일조했다. 결국 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나쁜 결합이 항차의 삶의 희망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공통체의 규명과 실현 가능한 공통체의 모형
마이클 하트는 공통적인 것을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하늘, 땅, 물, 공기 등 지구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서, 17세기 영국의 공유지commons, 곧 공동으로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들판에 기원을 두고, 두 번째는 “아이디어, 정보, 코드, 정동, 이미지” 등 마르크스가 규정한 물질/노동 개념을 초월하는, 일종의 창조적 산물이다. 그를 따르면 배타적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공통적일 때 가장 생산적인데, 그러한 공통적인 것을 사적 소유나 공적 운영에 온통 내맡긴 결과 재앙 수준에 처했다. 도시 공간을 포함한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아이디어와 소통 기제와 같은 비물리적 차원의 재화가 지닌 가치는, 새삼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시장이나 국가에 내맡기기보다,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어, 공통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공통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문제는 공통적인 것을 지키고 가꾸어나가는 공통체의 규명과 실현화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인데,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체의 모형을 ‘다중’이라는 이름의 빈자와 사랑을 통해 제시한다. 그들은 빈자가 17세기까지 중세 유럽에 보편화된 정치 개념 (“지위나 재산과 무관하게 정치 집단을 형성하기 위해 모인 이들”로서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크 랑시에르가 호명한 ‘몫 없는 자’들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빈자를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동시에 배타적인 유산 집단과도 대립하며 근본적으로 복수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집단을 낳는 사회적 주체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그러한 주체성으로 출현하기 위해 빈자가 동원하는 힘으로, 빈자는 그로써 “비참과 고독의 삶을 떠나 다중을 만드는 기획에 참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또다시 주목해야 할 점으로 그들이 파악하는 사랑은 “공통적인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이성들의 마주침과 실험”으로서, “연애-결혼- 가족”,“포퓰리즘, 민족주의, 파시즘 및 다양한 종교적 근본주의들”과 같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통일의 과정”은 사랑의 부패한 형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건축에 절실히 필요한 것
우리 건축의 틀 안에서 공통체를 생각해보기 위해 다소 장황한 논의를 거쳤지만, 내가 제기하는 현실적인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 건축사회에 공통체, 혹은 그러한 경험이 있는가? 둘째, 혹 없다면 공통체를 구성할 실천적 방도는 무엇인가? 첫 질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공통체를 제대로 경험한 역사가 없다. 학연과 지연으로 수십 년 동안 맹위를 떨쳐온 몇 단체들이 있지만, 권력 위계적이고 열려있지도 않을뿐더러 이질적 존재들의 마주침이 아닌 까닭에 공통체라고 할 수 없다. ‘4.3그룹’은 분명히 공통체라 할 수 있지만 어떤 연고에서인지 극히 짧게 지속한 후 각자의 문화적 몫을 챙기면서 흐지부지 소멸했고 ‘서울건축학교’라는 이름으로 집단화된 무리 또한 이질적 존재 간의 교섭이 아닌 까닭에 차라리 부패된 사랑에 가깝다. 앞의 논의에 주목하지 않았다면 혹자는 이 지점에서 물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이 먼저 제대로 설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런데 앞서 서술했듯 적지 않은, 아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건축문화의 몫이 박탈된 사태를 인식하면 공통적인 것은 이미 있는 셈이다. 그리고 공간사옥처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둘째, 우리 건축사회 내부에 어떻게 공통체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방도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이념으로 머무는 한계를 지닌다), 네그리와 하트가 적절히 표현하는 ‘다중의 군주 되기’를 소셜펀딩으로 번역하면 제법 가능할 것이다. 공통체는 사유화/독점화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다중이 가동하고 모든 결정이 다중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에 부나 권력을 소유한 특정인이나 소수가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특정인이나 소수가 공통체 구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도는 아마도 사회적 기업의 형태나 공통적인 곳을 독점적으로 만든 후 그것이 다중의 열린 참여를 통해 운영되도록 시동을 거는 것에서부터 구해질 것이다. 공통체와 공통적인 것의 논의에서 우리 건축사회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건축매체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중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출현은 그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생성의 마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통체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민주적이고 열린 절차로 다중을 형성시켜, 전시회와 세미나와 포럼 등 문화행위를 도모하는 것도 필요하고, UIA 세계대회 이전의 단체 통합이라는 절박한 현안, 각종 불합리한 건축제도와 행정과 교육 등의 문제 (건미준을 떠올린다), 나아가 도시공간의 질에 미치는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발언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사람은 불가능한 것에 감히 뛰어드는 행동주의 건축가다. 우리 밖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백만 개의 조용한 혁명’2 이 우리 건축사회에도 일어날 수 있기를…….
이종건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건축 공통체의 꿈
분량5,282자 / 10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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