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과 나눔의 ‘키노-아이’
한선희
분량6,056자 / 12분 / 도판 1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오피니언
“친구들이 ‘굿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있었다.” – 화가 천경자, 1930년대
지난 3월 6일 개봉한 <만신>(박찬경 감독, 2014)의 끝부분에 삽입된 인용구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만신>은 처음부터 굿을 체험하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의 공통된 경험을 찾아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하나의 굿처럼 만들 수 있을까? 대부분의 토착 종교와 마찬가지로, 굿이라는 종교적 의례는 한 마을이나 사회,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고양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굿은 마을의 잔치요, 마을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고 한을 풀어주는 의례였다. 또한 그것은 마을 단위에서 벌어지는 어떤 공통의 의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의사소통하며, 유한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비는 자리였다.
영화의 수용과 공동체성
어린 소녀가 내림굿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을 돌며 못 쓰는 쇠를 모은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과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과 촬영 장비까지 화면에 보인다. <만신>의 이 마지막 ‘쇠걸립’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 영화가 바로 굿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상징한다. 영화는 짧은 상영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는 예술 형태이다. 이는 당대 대중들의 관심을 하나로 모으고 결속시키며 이전에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한데 이러한 가정을 <만신>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한 논문에 인용되었던 위의 화가 천경자의 말은, 영화와 굿의 공통점을 유추할 구체적인 토대가 되었다. 1930년대 영화를 처음 선보였던 이들은 “굿을 보러 오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관객들은 굿 구경을 갔다가 활동사진, 또는 순회영화를 보는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굿이라는 전통 의례의 공동체성이 영화라는 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과 교집합을 이루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술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는 굿과 닮아 있으며 또한 건축과 닮아 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예술 작품의 기능 변화를 고찰하면서 영화가 전통적인 회화 예술보다 오히려 건축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그 근거로 영화와 건축은 모두 집단적으로 수용되며, 또한 정신분산적 또는 촉각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예술은 단순히 관람자가 주의력을 집중해 그 작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대상을 주목하고 촉각과 시각이 어우러지는 산만한 지각을 통해서 온전히 감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 주장을 한국적으로 확대해석해 보면, 건축은 또한 수용의 측면에서 굿과 유사하다. 굿은 아무리 개인을 위한 것이더라도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 집단, 또는 조상과 후손이라는 가계의 역사를 토대로 삼는다. 마을굿의 경우도 해당 공동체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고 위험을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구나 현장에서 굿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 굿은 단순히 관조하는 의례가 아니며,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운데 육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벤야민이 영화와 건축에 대해 말했던 대로, 주의력의 집중이 아니라 익숙함, 또는 습관을 통해 친숙해질 수 있는 예술 형태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생활양식이 분화되면서 예술 작품에 대한 공동체적 수용이 점차 파편적이고 개인화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 과거와 같은 형태의 강렬한 연대와 유대를 전제로 하는 굿은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거대기업이 소유한 멀티플렉스의 파워로 균형 잡힌 수용의 기회조차 확보되지 못하고 있으며,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발달하면서 집단적인 수용보다는 점차 개별적인 감상과 수용 방식이 우세해 지고 있다. 건축은 사람과 공동체의 안락한 삶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자본에 의존해 부의 축적과 과시에 복무하는 경향이 나날이 짙어지고 있다.
영화의 생산과 공동체성
창작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영화와 건축과 굿은 닮아 있다. 이 세 가지 예술 형태는 모두 집단적으로 창작되며, 오랜 시간 축적된 전문적인 지식과 일련의 정교하고 논리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저마다 해당 예술 행위의 중심에 위치한 ‘마스터’들이 있다. 영화에서의 감독과 건축에서의 건축가, 그리고 굿에서의 경관만신1은 자신만의 기량과 독창성으로 각 분야를 통솔하고 지휘한다. 그들은 창작 행위의 세부사항을 결정하고, 창작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을 분배하고 취합한다. 우리는 흔히 뛰어난 영화감독이나 건축가에 대해 ‘신이 내린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굿에서의 만신은, 특히 김금화 만신과 같은 강신무는 실제로 신이 내린 사람이다. 그들은 어쩌면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 예술가 이미지에 부합하는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다. 사제로서, 권력자로서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의 ‘집단성’은 ‘공동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공동체’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그 구성원들 간에 공통의 정서적 연대와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대 영화 제작에 있어서, 특히 극영화 부문에서 과연 공동체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다소 회의적이다. 더구나 영화 창작 시스템에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관료화될수록 위의 전제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는, 특히 ‘내러티브 픽션’으로서 극영화는 태생적으로 도시에서 태어난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것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일은 도시에서의 삶과 같은 것이다.
도시에서 시작된 영화는 애초 다큐멘터리였다. 세계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1895년작 <기차의 도착>과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는 도시의 리얼리티를 ‘기록’한 작품들이었다. 내러티브가 있기 전, 영화가 픽션의 영역에 포섭되기 전 어떤 원형으로서의 움직이는 그림, 즉 천경자의 표현을 빌면 ‘활동사진motion picture’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초창기부터 공동체의 이상을 반영하고 전파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맡았다. “현실 세계의 창조적 처리”라는 정의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개념을 정립했던 영국의 작가 존 그리어슨(1898~1972)은 시민 교육의 사회적 도구로서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다큐멘터리가 뚜렷한 공동체성을 얻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결합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이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발터 벤야민이 그처럼 영화를 혁명적인 예술로 극찬한 것도 영화라는 “테크놀로지 나라의 푸른 꽃”이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과 지각 양식을 반영하는 매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지지했던 ‘푸른 꽃’, 즉 ‘최후의 이상’과 가장 부합하는 작품은 아마도 러시아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1896~1954)의 실험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가 아닐까 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도시적 삶의 활기와 경쾌함을 기록한 이 작품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극영화를 척결하고 변혁의 대상으로서 사회를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카메라의 눈, 즉 ‘키노-아이Kino-Eye’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다.
공동체 운동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한국에서 이와 같은 맥락의 사회적 이상이 영화 공동체 운동으로 발현된 것도 역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1982년 서울대 ‘얄라셩 영화연구회’를 주축으로 ‘민중영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청년들은 ‘서울영화집단’을 결성하고 영화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이 집단은 1986년 ‘서울영상집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다큐멘터리를 택한 뒤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1995), <변방에서 중심으로>(1997), <경계도시>(2002) 등 1990년대 중요한 독립 다큐멘터리가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1991년에는 서울영상집단과 양대 축을 이루는 또다른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 ‘푸른영상’이 결성되었다.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송환>(2003) 등 김동원 감독의 대표작을 비롯해 최근 개봉한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2013)에 이르기까지 38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자본과 시스템으로 큰 작품을 하기보다 진실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모토 아래, 집단의 운영과 작품 제작 및 배급 방식에 있어서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뚜렷한 공동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던 시기에 결성된 이 집단들은 ‘미디어 액티비즘’으로서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 분야에는 매우 다양한 유형의 새로운 창작자들이 등장하면서 소재와 주제에 있어 다채로운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보다 젊은 액티비스트들이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어 특색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우선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노라노>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연분홍치마’는 ‘성적 소수 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자 여성주의 미디어 공동체를 표방한다. 또한 20, 30대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신진다큐모임’으로 출발했다가 최근 ‘신나는 다큐 모임’으로 이름을 바꾼 ‘신다모’ 역시 대안적인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둘째, 주로 방송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활동해왔던 프로듀서들은 거대 방송사에 맞서 독립 프로듀서들의 창작의 자율권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독립PD협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한국 다큐멘터리의 해외 시장 진출을 선구적으로 개척하고 지금은 방송뿐 아니라 극장용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얼마 전 타계한 <오래된 인력거>, <시바, 인생을 던져>의 고故 이성규 감독이 전면에 나서서 조직한 단체이다.
셋째, 최근에는 순수미술 분야에서 영상 설치 작업을 해왔던 미술가들이 극장용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 <만신>의 박찬경, <논픽션 다이어리>의 정윤석, <청계천 메들리>, <철의 꿈>의 박경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별도의 공동체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미술과 영화의 경계를 오가며 활발히 작업한다는 점에서 현재 국내 미술계와 영화계가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는 중이다. 또한 과거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이 뚜렷하게 나뉘었던 반면, 최근에는 극영화 감독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 다큐멘터리 공동체는 지금
앞서 필자는 영화 창작에 있어서 공동체성의 조건으로 공통의 정서적 연대와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꼽았다.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변혁을 향한 이상으로 뭉쳤던 과거의 이념적 연대는 점차 해체되고 있다. 누군가를 계몽하거나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사적이고 내밀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다큐멘터리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보다 오래 기억되는 작품으로 남으려면 뚜렷한 사회적 쟁점을 제기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자아내는 강력한 미학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큐멘터리 작가 개인의 성취라기보다는 그 작업에 참여하는 인력들의 역량이 제대로 반영되었을 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는 감독 개인이 여러 역할을 병행하는 1인 제작 시스템에서 탄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감독과 프로듀서의 역할이 구분되고, 전문 스태프들의 솜씨가 반영된 촬영, 편집, 음악, 사운드, 시각효과 등 영화연출의 다양한 기법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작품에 따라 프로듀서와 감독이 역할을 바꾸기도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한 비평과 배급 및 마케팅 단계에서의 지원 등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이뤄나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전국 극장 관객 1만 명을 넘기면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우리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푸른 꽃이 된 거대 블록버스터 영화의 향연을 만끽해왔다. 그에 맞서 싸우기에 독립 다큐멘터리의 힘은 여전히 너무 약하다. 그러나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독립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들꽃과 같은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한선희
최근 <말하는 건축가>(2011), <만신>(2014) 등의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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