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건축동네 이야기
이일훈
분량5352자 / 10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오피니언
한국 건축계에서 말은 이미 힘을 잃어버렸다. 개인의 의견은 공공의 장으로 옮겨가기도 전에 소멸한다. ‘공동성’이나 ‘공통의 것’에 대한 논의는 더욱 부족하다. 건축가 이일훈은 건축에서의 ‘공동성’ 혹은 ‘공통의 것’은 일상을 가리는 위선의 축제가 아니라 일상과 함께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빈집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 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백무산, 「빈집」, 『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호
바람 없는 깃발
밥 한 끼 먹다가 그만 이 글을 쓴다. 지난 1월,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꾸리는 건축교육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펴낸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일훈·송승훈 저, 서해문집, 2012)을 놓고 중학생들을 만나는 자리에 초청받아 가게 되었다. 부모 손에 끌려오지 않고 자발적으로 온 학생들이라 듣는 태도가 멀쩡하고,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빠져서 강의 예정시간을 넘겨 점심을 먹게 되었다. 마음에 점 찍듯 간단한 차림이면 대화가 짧았을 텐데, 아 돌솥에 뜸 들이는 동안 ‘공동성’에 대하여 원고청탁을 받았다. 어물쩍거리다 그만 응낙한 꼴이 되어 약속을 지키려니 맘 몸 따로 자꾸만 미적거린다. 그 까닭을 스스로 살피니, 한마디로 군침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즈음 건축 판에 별 관심이 없다. 건축은 여전히 매력 있고 살펴 연구할 것이 많은데 여럿이 모이는 건축계, 건축활동[운동], 건축저널, 건축교육, 건축문화 등을 싸잡아 건축 판은 도무지 회가 동하질 않는다. 왜 그럴까. 굳이 건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판들의 공통점은 바람 없는 깃발만 흔들고 담[닮]을 것 없는 말들만 넘친다. 그리 재미없는 판에 못난 글 한 편을 더한다니 스스로 신이 안 난다.
불구경
어느 집에 불이 나자 동네 사람이 다 몰렸다. 다들 한마디씩 던지길, ‘언제 불이 났나, 어디서부터 불이 번졌나, 누가 불을 질렀나, 불낸 놈 잡아야지, 불조심을 했어야지, 피해액은 얼마나 되나, 복구대책을 세워야지, 빨리 꺼야 할 텐데, 소방차는 불렀나, 옆집에 피해가 가면 안 되지, 근본적인 소방대책이 필요해, 몇 년 전에 건너편 동네에서 난 불과 상황이 유사해, 불이 나는데 뭐가 유사해, 아니 무슨 공통점이 있을 거야, 외국에서는 이럴 때 빨리 출동하고 금방 불을 끄지, 심지어 화재상황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지, 불 끄고 나면 집을 많이 고쳐야 하겠어, 아니 다 걷어내고 새로 짓는 게 더 편할 거야, 어디엔가 불난 흔적을 남겨야 해, 디자인하려면 개념을 잘 잡아야 해….’ 불은 자꾸 번지는데 말만 보탤 뿐 집안에 사람 있나 살피거나 물동이 들고 불 끄려는 이는 하나도 없는, 그런 이상한 판!
현문우답
‘공동성’에 대해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사회·경제·문화·역사와 같은 거창한 것이나 도시·환경·지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축·공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어느 시인은 순진하게도 (아마 열망으로)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하지만, 공동성을 떠올리니 필자의 생각엔 오로지 사람만이 문제이며 절망이다. 자연생태에도 공동/공통의 생리 작용 현상이 있으나, 인간의 이성 -성숙한 이성이란 얼마나 존엄한가- 속에서 인식/실천되는 공동성만이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혹 공동성에 대해 불통[무감각]인 사회라면 그 자체가 바로 비이성/반이성/몰이성의 증거이다. 그런 사회/시대일수록 이성적 의문은 빈번하나 답변은 초라하고, 요구는 증대하나 실천은 빈한하다. 한마디로 현문우답,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이여.
난 사람,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묻히는 현실
지금도 눈치 없는 필자는 어릴 때도 미욱해서, 이해가 안 되는 혹은 이해를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이었다. ‘난 사람’이란 잘난, 알려진, 출세한, 뛰어난, 탁월한, 유명한 사람인데 세상엔 되지 못하게 난 사람이 많다. ‘든 사람’이란 학력 높고, 지[학]식 많고, 배운 것 많은 사람인데 대수롭지 않은 지식을 녹슨 줄도 모르고 전가보도傳家寶刀처럼 휘두르는 헛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된 사람’이란 잘 나지도 않고 학력이 높지 않아도 물리가 트이고 교양 있고 인품[격] 있는 사람, 또는 잘 나고 많이 배우고도 겸양지덕謙讓之德을 아는 사람이지만 잔꾀가 설치는 세상에선 묻히기 쉽다.
‘난 사람’만 사는 세상이라면 바로 무간지옥 無間地獄이요, ‘든 사람’만 모여 산다면 팔한지옥 八寒地獄일 것이다. 서로 더 잘남과 더 많이 배움을 재고 다투는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가 불행해진다. 그럼 ‘된 사람’이 가득 찬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이 천국이니 ‘된 사람’은 세상에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하여, ‘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뜻이어야 하니 ‘난 든 된’을 바꿔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순으로 이르고 여긴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책에도 ‘난 책’, ‘든 책’, ‘된 책’이 있다.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 화제를 모으는 책을 ‘난 책’으로 본다면 개중엔 흥미를 앞세우며 함량 미달인 책과 유행이란 이름으로 불순함을 감춘 못난 책은 얼마나 많은가.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든 책’ 또한 분별없는 시류에 편승하여 무엇이든 상품화하려니 과장과 왜곡이 심하다. 그런 중에도 책방과 도서관을 묵묵히 지키며 사람 곁에 있는 책들, 살필수록 가치 있는 책이 바로 ‘된 책’이다. 공자 왈, “박학이상설지 장이반설약야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라”. 널리 배우고 상세하게 밝힘은 장차 돌이켜 단순하게 말하려 함이다. 제대로 된 지식이란 쉽게 설명하고 쓰여야 하고, 복잡한 지식을 간결하게 요약함이 제대로 된 배움의 뜻이요 목적이란 말이다. 난 체, 든 체 하는 것은 박학다식을 잘못 이해한 졸렬한 뽐냄이요, 쉽고 단순하게 요약하는 것이 ‘된 것’을 이르는 성숙한 경지이다. 어디 학문만 그럴까. 세상을 채우는 학술, 기술, 예술, 기예, 기능이 발휘되는 온갖 분야가 다 그럴 것이다.
본질 잃은 공동성의 허허로움
‘공동성’에도 ‘난·든·된’을 붙여볼 수 있겠다. ‘난 공동성’은 세상에 알려진 계획단지 도시설계 등에서 보이는 공통지침 규칙의 예일 것이다. 구체적 실체로 이루어진 예를 가장 많이 접하는 경우이나, 실천된 것은 공동성空洞性보다는 공공성公共性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공동성은 개별/부분적 사고와 인식을 우선하여 전체를 이루는데 본연의 의미가 있지만, 공공성은 전체/집단을 우선하여 부분/개체를 통제/ 동원한다. ‘든 공동성’의 예는 학문적 연구목표와 사회적 명분을 앞세운 전문가 집단이 앞장선 도시/마을살리기 지역특화사업 등에서 많이 내걸지만 인식 수준과 결과는 ‘난 공동성’의 그것과 유사하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공동성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공동성이란 같이 모이고, 함께 나누고, 같이 지키는 단순한 이타적 -이기적 심리를 억제하는- 형식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기적 심리를 이해/충족시킨 후 얻어지는 이타적인 과정과 결과가 이기심을 더욱 충족시킨다는 인식이 바로 공동성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물리적 참여/사용/규범의 방식에서 탐색되는 공동성은 단순한 것이고, 소유 -특히 사유私有의 가치를 넘어선 탈각脫却의 이해-의 방식에서 실천되는 것이 가치가 높은 것이다. 드물지만 그런 의식(장소 공간 건축)을 ‘된 공동성’으로 말 할 수 있으리라. 공공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공공건축, 공공의 공감이 결여된 공공미술이 우울하듯, 공동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없는 공동성의 주장은 자칫 허허롭다.
대수롭지 않음의 위대함
사람과 책을 건축으로 옮겨보면, ‘난 건축’, ‘든 건축’, ‘된 건축’도 있을 것이다. 건축 (또는 건축적)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것들과 함께, 어제도 ‘난 건축’, ‘든 건축’이 세워졌듯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건축(적)이 아닌 것들이 세상을 채워도 세상은 건축(적인 것)을 아쉬워하지 않으며 무심할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건축(적인 것들)이 부재함에도 부재 -그 속에서 더 잘나고 더 든 것이란 얼마나 초라한가- 를 모르는 이런 존재의 허망이 있을까. 그럼 건축(적인 것들)은 뭐란 말인가. 한마디로 건축(적인 것들)은 사소/소소/시시한 -세상 전부가 아닌 일부- 것이다. 세상에 권유될 ‘공동성’과 ‘공통의 것’ 또한 그러함이 마땅하다. 해서, 특정 공동체에서 유지되는 공동성을 넘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인내하는 공동성도 넘어, 생명체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공동성에 대한 유전인자 같은 의식/인식이야말로 건축을 있[짓]게 하는 가치이다. 보편적 가치보다 마땅함이 어디 더 있으랴. 특별한 건축(적인 것들)은 사소/소소/시시함을 잘 녹여 품은 장소/공간/환경이다. 건축(적인 것들)은 일상을 가린 위선의 축제가 아니라 일상과 함께하는 삶(앎-듦-낢)이어야 하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에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에도,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에도 스며들어야 할 정신 -‘관점의 차이’로 치부될 선택사항이 아닌- 이 바로 ‘공동성’이다. 그것은 건축(적인 것들)의 창의적 과정에 개입하는 방법(아이디어, 개념, 어휘 등)이 아니라 구현되어야 할 가치이다. 그러니 건축(적인 것들)에 앞서 건축(적인 것들)으로 밥 벌어먹는 모든 이들의 복무수칙服務守則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하여 대수롭지 않은 건축(적인 것)을 통해 ‘공동성’이 승화/육화/ 체화된다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건축(적인 것)이야말로 위대하게 ‘된 건축’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건축(적인 것)은 결국 ‘빈집’을 만드는 일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일훈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의 철학을 권유하는 설계 방법론 ‘채 나눔’을 토대로 주거건축인 <궁리채>, <탄현재>, <가가불이> 등을 작업했다. 또한 천주교의 <자비의 침묵> 수도원, 불교의 <도피안사 향적당> 등의 종교건축을 짓기도 했으며, 그 외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밝맑 도서관> 등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모형 속을 걷다』(솔, 2005),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사문난적 2011), 『제가 살고 싶은 집은…』(서해문집, 2012) 등이 있으며 건축의 대중적 소통에 한몫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재미없는 건축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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