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대와 방향이 부재한 한국 건축에 묻다
김인철, 이상헌, 이필훈
분량11,647자 / 25분 / 도판 1장
발행일2013년 12월 31일
유형좌담
올해 한국 건축계는 ‘없음’이라는 이슈가 지배했다. 학문적 제도적으로 겪고 있는 한국 건축의 정체성 혼란과 거울의 자리를 비워둔 채 사냥감 몰이에 급급한 현재 건축계 모습이 그 이유다. 지금이라도 한국 건축은 주체성을 갖고 공동의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 홍익대학교 건축과와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86년 인제건축(현 아르키움)을 개설했고, 전통에 바탕을 둔 공간의 해석인 ‘없음의 미학’을 화두로 작업하고 있다. <웅진씽크빅>(2007)으로 김수근문화상, 한국건축문화대상,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고, <어반하이브>(2008)로 건축가협회상과 서울시건축상을, <오르는 집>(2000)으로 경기도건축상, <호수로 가는 집>(2009)으로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2009~2010)의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김인철 건축작품집』(1989), 『솔스티스』(1990), 『김옥길기념관』(1999), 『대화』(2002), 『공간열기』(2011)가 있다.
이상헌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MIT 건축과에서 역사이론비평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과 한국의 건축사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일건, 정림건축 등에서 실무를 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건축설계와 역사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근현대건축 및 도시의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면서 한국 현실에 맞는 실천적 건축이론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철 건축과 근대건축이론의 발전』,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공저) 등이 있다.
이필훈 포스코A&C 대표이사. 연세대 건축과 및 공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유학했다. 원도시건축, 영건축에서 근무하다 1989년 태두건축을 개소했다. <동대문청소년수련관>, <농업수련원> 등 다수의 현상설계에 당선했다. 문화연대, 새건협 활동 등을 통해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건축을 통한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2007년부터 정림건축 대표를 지냈고, 2011년 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를 거쳐, 현재 포스코A&C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진행 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국장
좌담 일자 2013년 11월 26일
건축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죽여야 하는가
박성태 이상헌 교수님의 저서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효형출판, 2013)가 계기가 되어 이번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한국 건축 면면을 두루 살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 싶은 것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이 건축 각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도 다를 것 같습니다.
이상헌 건축이 살기 위해서 죽어야할 게 있는 게 아니라, 건축의 학문적·제도적 정체성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학문적 정체성을 위해, 우리나라의 건축 관련 학문 위계를 보면 공학 아래에 기계공학, 건축공학, 건축설계, 이론과 역사가 그 하위에 있습니다. 학계에서 건축학은 공학의 한 분과로 분류됩니다. 원래 건축의 학문적 주체성은 예술인문학Art & Humanity이고 엔지니어링과 테크닉은 별도인데, 우리나라는 학문적으로 건축공학만 존재합니다. 그간 학회나 관계자들에게 숱하게 회자되어왔지만 기존의 지배구조 때문에 회피하는 듯합니다. 건축이 사회 및 실무영역에서 학문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제도적 정체성이 불완전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적 정체성이 없으니 「건축서비스진흥법」과 같은 제도도 온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가 이론적 체계를 만들고 건축가는 사회적으로 이를 실천한다면 변화는 가능할 것입니다.
이필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일 수 있는데, 물론 학교에서 건축을 분류하고 세우는 접근도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가 건축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사회가 건축에 대한 인식을 바로 세우지 않는 상황에서 학문적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회 전체적으로 건축을 이해하는 시각이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사회에 나갔을 때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건축가라는 직업에 대해 전문직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건축가를 처음 세팅할 때 건축가, 아마추어 건축가, 토목 건축가 등으로 나누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건축가라는 명칭 자체가 없어서 건축가를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학문도 중요하지만 크게 보면 건축에 대한 공론화 자체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인철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건축가가 없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도 몇 칸짜리를 어느 방향으로 놓을 것인지만 결정하면 되었습니다. 즉 건축을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되돌아보건대 전통적으로 건축가를 필요치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건축은 건축주가 결정하는 거라는 인식이 그대로 남은 채로 모더니즘을 수용했습니다. 제가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제1기 분과장을 맡았을 때 관계자들은 비엔날레를 통한 정책적 지원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방송국 연예 프로그램에 노출을 시키거나, 국정교과서에 ‘건축은 문화다’ 라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상헌 책에서 더 강하게 얘기했다가 지운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건축가교육인증회의를 주최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건축과 교수들이 건축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건축교육과 관련한 교육인증에서도 공학 계열 관계자가 인증위원장으로 회의를 주최했는데, 관계부처에서는 그게 당연한, 이상할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건축학은 건축공학 하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필훈 학문적 부재와 관련한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 유학했던 학교에서는 조경·도시·설계가 같이 있었고 건축은 예술인문학으로 나뉘어 있어서 예술 과목을 들으면 건축의 교양과목으로 인정이 됐습니다. 설계는 당연히 설계를 한 사람이 직접 가르쳤는데, 한국에서 배웠던 것과 너무 달라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한국의 교수님들 중에는 당시에도 유학 다녀오신 분들이 많았는데, 왜 그렇게 가르쳤으며 본인은 환경을 전공했음에도 설계를 가르치는 것에 어떻게 거리낌이 없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화가 났습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교육과정은 그때로부터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큰 변화가 없습니다.
건축에 대한 인식 부재는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건축 관계 분야의 전문가들 스스로 건축이라는 큰 틀에 본인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저마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CM(건설사업관리Construction Management)을 한 사람은 건축보다 CM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친환경이나 구조 전공 교수는 건축설계가 먼저고, 친환경이나 구조는 활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건축에 대한 인식과 소통의 부재가 한꺼번에 작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건축가에 있어서도 국내보다는 해외의 스타건축가만을 참조합니다. 사실 토대ground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어야 건강한 건축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건데, 스타건축가는 자기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틀리에 건축가들은 랜드마크를 만드는 스타건축가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시스템이 개량되어도 내용은 여전히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상헌 지금 말씀하시는 게 우리나라에 건축이 없다는 걸 정확하게 지적하는 요지입니다. 학교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이론과 실제가 결합한 학문이자 여러 학문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건축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전체가 아닌 파편적으로만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테면 집짓는 일이 학문으로 체계화된 게 건축인데, 우리나라는 경험적 지혜로만 전해졌을 뿐입니다.
김인철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이성과 합리성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받아들였다는 것이 이러한 문제의 핵심일 겁니다.
이필훈 공통의 코드가 부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한국 건축계에 건축 이론을 전공한 교수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 건축학이 부재한 이유도 그걸 공부한 사람이 국내에 없기 때문에 건축가에게 이론적 배경을 줄 수 없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건축가가 건축의 이론적 배경까지 만들 수는 없습니다. 유학했던 학교 이야기를 보태자면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수업이지만 케네스 프람톤Kenneth Frampton이 구조를 이야기 하고, 건축 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리차드 마이어Richard Meier가 진행을 합니다. 건축 이론을 제공해주는 파트너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건축 교수 풀을 보면 건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건축가에게 담론을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김인철 논문심사를 가보면 참고문헌이 모두 외국 서적입니다. 참고문헌에서 제시하는 해외 건물을 직접 봤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한국 건축은 없냐고 물으면 말을 잘 못합니다. 학생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헌 건축의 학문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맞는 말씀이지만, 사실 수요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한국에서는 건축에 대한 비평이 쓸모가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큰 혼란을 가졌던 게, 제가 공부한 것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으니 공부한 것을 건축계에 되돌릴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 건축은 기술과 건설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론과 철학은 양념 정도여서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인철 그런데 제가 이상헌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우리에게 건축은 없다’고 하면서 그 안티테제로 서구 건축을 이야기 한 점입니다. 우리가 서구의 건축에 노출된 건 고작 100년이라는 시간입니다. 그전의 5000년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럼 중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봐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서구는 모더니즘과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는데, 우린 아직도 모더니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상헌 물론 서구적 시각에 대한 것은 이론적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건축 논의와 실천은 서구적 건축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김인철 모더니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그들의 것을 복습해서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을 만들어서 서양과 상대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 제시
박성태 이상헌 교수님이 책을 통해 ‘한국 건축에 공유된 규범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러한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 건축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 현상을 얘기했는데,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제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상헌 건축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고전주의와 근대까지 발전된 건축의 규범과 생각은 공동체를 위한 규범이라고 정의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로 인해 그 규범의 중심을 상실했습니다. 이는 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서양의 영향을 받기 전까진 5000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나름의 규범이 있었습니다. 단지 체계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경험으로 전해진 정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다 할 기반이 없기 때문에 기성 건축가도 건축의 개인주의가 궁극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인철 사회적 합의가 된 상태에서 다양한 게 나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 플레이를 하는 게 문제입니다. 정체성이라는 걸 얘기하는데, 정체성에는 너와 나가 다르다는 것으로서, 다른 하나는 복수성이냐 동질성이냐를 이야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질성 없는 개체성만 얘기합니다. 서구는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개별 정체성을 논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동질성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ㆍ3그룹 20주년 행사에서도 구성원 간의 동질성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너는 너고 나는 난데 왜 같은 걸 끌어내야 하냐고 반문합니다.
이상헌 그게 바로 건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통은 단절되고 서양의 영향을 받아서 짧은 시간 동안 이룬 근대화로 반성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공동체적 가치 규범은 결국 전통에 의지하여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라도 서구에서 들어온 지적 수행을 가지고 전통을 바라보면 됩니다. ‘건축의 이론화’를 통해 공유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공론의 장입니다. 건축은 과학이 아니라 가치와 규범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필훈 모더니티의 바탕에는 사회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하는 이데올로기의 혁명이 있었고, 사회적 혁명을 꿈꾸며 정치 인문적 움직임을 만든 건축가들이 건축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1970~1980년대, 모더니즘 건축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사회주의 자체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 운동에 동참한 건축가가 없었습니다. 모더니티에 근간되는 이야기는 소거하고 형태만 추구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이야기 역시 반성적 사고와 건축이 연결될 수 없는 이유가 모더니티에 대한 정리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갈등 때문에 그 누구도 쉽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에 반쪽짜리 (형태에 집착하는) 건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요즘의 젊은 건축가는 어려운 말, 거창한 담론보다는 좀 더 쉬운 언어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왜’ 보다는 ‘어떻게’를 이야기합니다.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아이코닉한 것보다는 동네를 보면서 건강한 건축가가 자생되고 있습니다. 모더니티에 대한 정리가 안 된 채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했다는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제는 ‘한국의 건축’을 정리할 때
박성태 젊은 건축가의 분위기를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이론적 배경과 공동의 규범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키워드가 ‘생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서 내 목소리로 승부할 것이냐, 모창가수로 승부할 것이냐는 갈림길에 놓입니다.
이상헌 4ㆍ3그룹 건축가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 건축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 건축에 대한 지식의 이론화와 체계화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때 서양 건축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했는데, 건축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서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봅니다. 지적 토대가 눈에 띄게 성장했고, 이론적 연구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건축을 체계화할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김인철 서구는 모더니즘이 형성되기까지 고대, 중세, 르네상스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모더니즘은 시간을 거슬러 가야 합니다. 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계몽주의를, 계몽주의를 이해하려면 르네상스를 봐야합니다. 이 역사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더라도 시험을 위해서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에서부터 근대까지를 상세히 공부하고, 몸으로 겪어야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헌 요즘 ‘한국의 건축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사실 서양도 모더니즘은 이론으로 존재하지 실제 건축은 결국 전통의 연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이 단절되었으니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필훈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창조적 글쓰기가 한동안 유행했습니다. 건축가에게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는 건 건축이론가뿐만 아니라 사회학자들도 할 수 있습니다. 학문 체계도 레퍼런스를 가지고 도식화하기만 하는데, 차라리 레퍼런스 없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글을 써보자는 얘기, 도대체 ‘너의 얘기는 무엇이냐’가 인문학에서 대두됐던 것입니다. 건축에서도 그런 게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한국 건축의 1세대는 외국에서 배우고 온 것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 다음 세대는 지식을 갖고 와서 우리나라에 맞게 조금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서양에서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촉발시켜 만드는 것이 건축가든 학자든 해야 할 역할이고, 건축가는 어떻게든 땅 위에 만들면 되지만, 그런데 학문은 자기가 배운 것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행위를 좀 게을리 한 게 아닌가 합니다.
이상헌 게을렀다기보다는 건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증할 것이 없다보니 주관적이라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조차 없는데 우리나라 학계는 그게 논문이 아닌 리포트밖에 되지 않는다고 게재도 해주지 않습니다.
김인철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게 문제죠. 내 생각과 다른 것을 틀리다는 기준으로 보는 건 공통된 합의, 공통의 토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헌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는 권력적 속성에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접근을 하려고 하면 학회가 무조건적으로 막아버리기 일쑤입니다. 이견을 가지고 진화해야하는데 지식의 토대가 없으니 무슨 얘기를 하던 제자리에 있습니다. 학회의 권력화와 정치를 깨서 다양한 논의가 비슷한 수준으로 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인철 못된 시어머니 밑에 못된 며느리 있다고,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지키겠다는 아집에 다른 건축학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건 정말 잘못된 거라고 봅니다.
이필훈 산관학을 보면 전문 업종에 있는 사람들은 인텔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학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다음에 관이, 그 다음에 업계가 있습니다. 이런 수직적 구조가 타파되지 않으니 민주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이상헌 젊은 건축가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위해 교수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새건협도 건축가가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 하고 있습니다.
김인철 밥줄을 지키려면 사회 체계에서 초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너무 체면을 챙기느라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한참을 살았으니 눈치를 별로 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젊은 건축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이필훈 요즘의 건축환경에서 설계와 감리의 분리가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게 10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과반수가 그 둘을 분리하지 말자는 거였는데, 지금은 건축의 논리 이전에 먹고사는 문제로 귀결되니까 본질이 파편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직능인이 원칙에 어긋난 것을 해달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상헌 건축가와 건축사에 대한 논란을 보더라도, 서양에서는 프로페셔널리즘이 먼저 형성이 되고 그 다음에 제도화가 되곤 합니다. 전문성을 기반으로 전문직들이 사회적 인정을 받으면 국가에서 자격을 주는데, 우리나라는 전문직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문직이 형성되려면 그 전에 지식이 체계화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어떤 체계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건축이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만든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
박성태 상황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건축을 있게 하려면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김인철 저는 경험을 통해서 그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블루와 그린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도 되고 푸른 하늘도 됩니다. 우리의 감성이라는 것은 우리 땅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태적으로 서구와 다른데 서구의 기준으로 우리 건축을 보는 것이 당연히 이상한 것입니다. 서구의 것은 지식으로 두고, 내 것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필훈 아까 젊은 건축가에게는 생존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했는데, 그들에게 건축이 없다는 건 프로젝트가 없다는 것, 미래가 없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설계를 하다보면 건축주가 거기 살기 보다는 팔기 위한 집을 주문하는 게 태반입니다. 그걸 또 다른 대중들이 소비합니다. 건축주도 대중의 기호에 맞는 집을 원하고 건축가도 대중에게 좋은 집을 지어야 건축주를 설득하기 편합니다. 결국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겁니다. 젊은 건축가가 생존을 위해 이러한 것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고 노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부적으로 우리 도시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지만, 제3세계에 나가보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렇게 (그들의 시각으로) 근사하게 지은 나라가 없습니다. 젊은 건축가들이 도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해외에 나가서 우리의 긍정적이고 경쟁적인 면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렘 쿨하스Rem Koolhaas는 전 세계에 한 명인데 그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상헌 건축가에게는 프로젝트가 없는 게 어렵겠지만 ‘건축’의 관점에서는 프로젝트가 부족한 게 기회라고 봅니다. 건축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것을 학계나 건축가도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건축학이 학문으로서 지위를 갖고 사회적 공헌을 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야합니다. 그 내용은 전통 ― 땅, 자연, 역사 ― 에 기대어야만 가능하다고 보고요.
김인철 그 전통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전통이라고 하면 보통 과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상헌 한국의 옛건축이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분명 전통이 있습니다. 정기용 선생님이 서울을 두고 “작가 없이 쓴 대하소설”이라고 했습니다. 간판 건축만 봐도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건축입니다. 서구 이론틀을 가지고 스튜디오 학생들과도 간판을 연구하면서 재미있게 진행했는데, 두 번이나 학회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건축이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였고 객관성이 결여됐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다양한 공론장이 없으면 논쟁을 할 수 없고 이론화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김인철 제가 생각하는 한국 건축계의 비극은 원로가 없다는 것, 그 다음은 평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건축가의 작업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청해서 비평 해 달라 해도 내 작업에 대한 얘기는 안 하고 자기 얘기만 합니다.
이필훈 비평을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게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건축가 중에는 상당수가 신비주의, 즉 예술적인 방식으로 자기 건축을 얘기합니다. 그러다보니 기술적 축적이 안 됩니다. 건축은 사실 확실한 증거evidence가 있어서 그 기술을 공유해서 영역을 넓혀 성장할 수 있습니다. SOM이나 니켄 세케이Nikken Sekkei만 봐도 플랜트와 같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영역을 개발해 잘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건 건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기술적 해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대형 설계 사무소는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해외 건축가나 설계협력업체를 찾고, 건설도 수주를 해서 협력업체에게 나눠주는 커미셔너오피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내 시장은 갈수록 일이 줄어들고 있고 해외로 나가더라도 수행 능력이 떨어져 경쟁이 되질 않습니다.
김인철 아트라는 말이 사실 예술에 앞서 기술이라는 뜻을 가지듯이 기술에 도가 트면 하는 게 예술입니다. 5년제로 이뤄진 건축학제에서부터 문제를 지적해야 하는데 5년제를 마치면 건축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필훈 대형 설계 사무소의 대표를 해봤지만 엄밀히는 건축을 하는 집단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기업이지 기술도 양심도 없습니다. 건축주와 상의 없이 작은 사무실에 일을 주는 것도 불법인데 어느 곳이나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가 줄어야 기술로 승부를 낼 수 있고 그런 지각변동이 있어야 비로소 한국 건축계도 건강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토대와 방향이 부재한 한국 건축에 묻다
분량11,647자 / 25분 / 도판 1장
발행일2013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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