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념비 조각
박계리
분량8,065자 / 16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비평
북한 사람은 자본주의 국가의 수도 서울에 왔음을 어떻게 체감할까? 일테면 거리를 뒤덮고 있는 대형 전광판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품광고 이미지들은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한 사람 역시 거리마다 붙어 있는 정치포스터와 기념 조각들을 대하면서 비로소 북한에 왔음을 체감한다. 여기서 두 이미지가 갖는 공통점은 ‘선전미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목적을 갖는다는 점이다. 평양의 도시 이미지는 기념비 미술에 장악되어 있다. 북한은 ‘기념비 조각의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기념비 조각을 창작해왔다. 대표적 예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은 조국해방전쟁승리 40돌 기념과 더불어 40년간 북한 사회를 지도해온 김일성 전 주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인 왕재산을 기념하기 위한 <왕재산 대기념비>, 조선노동당 창건 40돌을 맞아 혁명열사 기념을 위하여 세웠다는 <대성산혁명열사릉>, 장엄하고 영웅 서사시적인 형상인 <만수대기념비>, 전투적 형상이 강한 <보천보전투승리 기념탑>, 북한 내에서 전투적인 형상과 서정성을 조화롭게 결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삼지연 대기념비>, 선군시대를 상징하는 <무산지구승리기념탑> 등은 북한의 주요 기념비 조각들이다.
일반적으로 ‘기념비 미술’이란 특정 대상을 잊지 않게 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발생된 시각 조형물이다. 북한에서는 본질적으로 김일성 전 주석의 혁명 역사와 업적을 만대에 길이 빛나게 하기 위해 제작된 미술을 말한다. 이 장르가 북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거대한 스케일과 규모와 제작비로 증명된다.
기념비 조각의 특징
북한 뉴스 방송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김일성 동상은 사실 기념비 조각의 일부이다. 동상 주변에는 다양한 군상, 탑, 사적비 등 거대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북한의 기념비 조각은 이 같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김일성 동상과 기념탑으로 대표되는 중심 조각 주위에는 조각 군상들이 배치된다. 이 조각 군상을 부주제 조각 군상 또는 부주제 군상이라 부른다. 기념탑은 조형 특성상 내용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한다. 이에 비해 부주제 군상은 관련내용을 구체적인 역사적 또는 생활 속의 이야기로 전달한다. 따라서 감상자가 쉽게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특히 김정일 전 위원장이 “앞으로 수령님의 동상은 반드시 군중 속에 계시는 수령님을 형상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지시하자, 북한 당국은 작가들에게 부주제 군상을 제작할 때는 김일성 동상을 중심으로 하여 각 군상을 합리적으로 배치하라는 원칙을 만들었다. 북한 미술 감상은 김일성 동상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각 기념비 조각들이 각각의 내용을 풍부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거대한 군단인 군상들을 어떻게 다양하게 배치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현재 북한 미술의 수준을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기념비 조각에서 김일성 동상의 위치는 두 가지 방식이 이용되고 있다. 하나는 김일성 동상이 군중을 형상한 조각 군상들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일성 동상 주위에 부주제 군상들을 배열하는 것이다. 각각 <만수대기념비>와 <삼지연대기념비>에 적용되어있다. <왕재산대기념비>는 두 가지 방법을 다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동심원으로 펼쳐진 <왕재산대기념비> 중심부에는 김일성 동상을 중심으로 기본 주제 군상과 봉화탑이 자리 잡고 있다. <보천보전투 승리 기념탑>은 김일성 동상을 선두에 두고 그뒤에 나부끼는 붉은 기폭을 형상한 부주제 군상을 탑의 양쪽 면에 배열하였다. 이러한 구성형식을 더욱 진전시킨 것이 <만수대기념비> 이다. 김일성 동상을 기념비 중심에 배치하고 그 양 옆에 부주제 군상을 배치하였다.

, 1972 
, 1979
형상의 함축성과 내용의 포괄성
기념비 조각의 조형적 특성은 무엇보다도 형상의 함축성과 내용의 포괄성에 있다. 조소 작품은 입체이긴 하지만 정지된 한 컷이다. 이 한 컷의 화면에 내용을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것은 무엇으로 함축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북한의 작가 대부분은 기념비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나 장면을 선택하여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묘사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북한 미술계는 훌륭한 기념비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 상징성과 생활적 구체성을 결합시키라는 요구를 작가들에게 하고 있다. 또한 기념비 조각은 작품의 내용을 표현하는 데 상징 수법을 널리 이용하고 있다. 방대한 역사적, 사회적 내용을 간결하게 집약한 조형 형식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징수법에 의하여 창조된 조형적 형상은 기념비의 본질적 내용을 간결하고 함축성 있게 보여주면서도 추상성을 띠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추상성에 대해 북한 미술계는 일반 인민들이 기념비의 구체적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게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기념비 조각 창작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묘사 방법과 상징적인 표현 방법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기념비 조각의 인식적, 교양적 기능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도 미학적, 정서적 작용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북한 미술계에서는 <삼지연대기념비>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배려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봉화탑과 헌시비, 부주제 조각 군상으로 종합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중 봉화탑과 <진격의 나팔수>는 상징적 성격을 띤다. 봉화탑은 주체사상을, <진격의 나팔수>는 무산지구 전투의 승리를 상징한다. 이와는 달리 세 편의 부주제 조각 군상들은 생동하는 구체적인 생활묘사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일성 전 주석의 무산지구전투에서의 승리라는 역사적 내용를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상징성과 생활의 구체성을 잘 결합시켜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념비 조각의 부주제 군상의 특성상 여러 구성을 통해 내용의 구체성과 서술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각 인물들을 이상적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고 형상을 제작함으로써 인물들의 현실적 리얼리즘과는 간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가 이상적인 몸매의 건강한 체형으로 제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형성은 건강한 민중들의 전형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용의 구체성을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데에는 한계를 갖는다.
조형적 형식의 웅장성과 선명성
북한 기념비 조각의 또 다른 형상적 특성은 조형적 형식의 웅장성과 선명성이다. 특히 야외에 세워지는 기념비에서는 무한대의 자연 공간 속에서 기념비 조각의 형태, 비례, 양감 등 조형적 형식의 웅장성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방법들을 탐구하여야 한다. 또한 기념비 조각 창작에서 조형적 형식의 웅장성에 대한 문제는 선명성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어 작가들에게 요구된다. 170m 높이의 주체사상탑, 46m에 달하는 천리마 동상 등의 거대한 크기와 각 부주제 군상은 이를 증명한다. 방대한 규모와 크기로 조형되는 북한의 기념비 조각에는 수많은 군상이 등장하고 다양한 세부 요소들이 결합되는 등 복잡한 조형체계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장 주된 요인으로는 다양하고 풍부한 형상 요소들을 통일적으로 묶어 내는 선명한 조형적 형식 없이는 인민들에게 전달할 선전 선동의 내용이 부각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은 이러한 조형적 선명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탑의 조형성에 주목해왔다. 이에 따라 대부분 탑신을 높게 조형하였다. 그러나 <왕재산대기념비> 건립 과정에서 북한은 기념비 조각에서 탑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관례를 비판하며 탑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동상을 뒷받침해 주는 요소여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에 따라 <왕재산대기념비>는 봉화탑을 낮추지 않으면서 김일성 동상의 댓돌을 높이고 앞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동상을 강조하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탑을 세운 곳에는 반드시 사적비가 있어야 합니다”라는 김정일 전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사적비가 대기념비의 구성부분으로 결합된다. 사적비는 글을 통하여 사적 내용을 전달하는 기념비적 건축 구조물이다. 문자를 통해 인민들에게 전달하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인식 시켜주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된다.
위치 선정과 주위 환경과의 조화
기념비 조각의 위치 선정과 주위환경과의 조화에 대한 원칙도 북한당국은 규정하고 있다. 첫째로는 사적지와 기념비조각을 일치시키라는 창작 원칙이다. 사적지와 기념비조각을 일치시키는 것은 사적지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사적물들이 기념비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보충해 줄 뿐 아니라 형상을 더욱 생동하고 인상깊은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기념비 조각이 지니고 있는 선전·선동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념비 조각의 위치 선정과 관련해 중요한 요구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전 위원장의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인민들 속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님의 동상은 인민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곳에 모시는 것이 좋습니다”는 언급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에서 기념비 조각은 대중 교양의 위력한 수단으로서 광범한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기 위하여 세워진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야외의 널리 개방된 장소에 건립하는 것은 기념비 조각의 가장 일반적인 요구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기념비 조각의 위치 선정에서 첫째 조건은 ‘보임성 조건’이 좋은 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시야가 넓게 트이고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형태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위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부분의 북한 기념비 조각들은 산마루나 언덕 위에 세워지고 있으며 주위에 마당을 널리 펼쳐 방대한 광장을 조성한다.
기념비 조각은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대자연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비 조각을 조형적으로 부각시키는 위해 주위 환경을 조형에 복종시키는 관계 속에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김일성 동상을 웅장하고 선명하게 형상해내기 위해 모든 형상 요소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마저도 이 동상에 복종시키는 결합 형태를 제작 원칙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환경은 어디까지나 조각의 배경으로서의 의의를 가지며 조각적 형상을 한 폭의 화폭에 담아 공간 속에서 펼쳐 보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념비를 구도적으로 중심에 배치하여 전체 화폭의 균형을 맞추고 공간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조각과 주변의 물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원근감이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색채적으로도 통일되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지도록 형성하여야 한다. 따라서 <삼지연 대기념비>, <주체사상탑>, <천리마 동상> 등 기념비적 창조물들은 모두 절승풍경絶勝風景 속에 세워져 있다.
선군시대의 상징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
선군시대를 맞아 주목되는 기념비 조각으로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 (이하 ‘무산지구 기념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산지구 전투는 김일성 전 주석이 1939년 5월 함경북도 무산군(현 양강도 대홍단군)에서 일본군과 벌였다는 전투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은 1971년 5월 이곳에 높이 35m의 탑과 김일성 전 주석의 사진을 새긴 부조 등으로 이뤄진 <무산지구기념탑> 을 건립했다. 그런데 2000년에 김정일이 당시 지지도를 이용하여 이 기념탑을 선군시대에 맞게 다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 기념비 조각은 2002년 5월 무산지구전투 승리 기념일에 맞춰 새롭게 증축됐다. 이것이 <무산지구기념탑>을 주목하는 이유다. 이 기념비 조각의 구성과 형식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결국 선군시대를 표상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기념탑이 총대탑으로 변모되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총 부지 11,000㎡에 증축된 <무산지구기념탑> 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맨 앞에 김일성 동상이 설치되고 그 뒤에 총대탑, 오른쪽에 길이 35m, 높이 4.1m의 대형 부주제 군상이, 왼쪽에는 길이 12m, 높이 4m의 <혁명사적비>가 놓이도록 구성되었다.
선군시대의 기념비적 미술로 변모되면서 가장 부각되는 조형물은 역시 총대탑이다. 북한이 강성대국 건설의 근본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총대 중시 사상에서도 드러나듯, 선군정치를 표상하는 핵심 이미지는 ‘총’이다. <무신지구기념탑>에서도 원래 있던 탑신의 윗부분에 총창을 형상화하여 결합한 것을 알 수 있다. 1971년에 세웠던 탑신의 모습을 활용하면서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탑의 형식을 변형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변모된 탑의 높이는 무산지구전투의 승리일이라 일컫는 1939년 5월 23일에 맞춰 39.523m로 조성했다. 물론 건축 구조에 특정 날짜를 결합시키는 방식은 북한 미술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 방식 중 하나이다. 이렇게 개조된 구성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기본 주제와 부주제의 결합방식이다. 부주제 군상이 부조로 길에 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동상은 부주제 군상들과 간격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더 크게 보이도록 형상화했다. 때문에 처음 이 기념비 조각을 보게 되면 김일성 동상과 총대탑만이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특히 동상을 앞이 탁 트이게 조성된 공원 안에 설치함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또한 동상 뒤의 부주제 군상은 인물만으로 꽉 채운 것이 아니다. 벌판, 수림 등 배경 묘사를 잘 활용해서 화면에 공간적 깊이를 조성함과 동시에 여백의 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글씨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서예 형식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는 점 또한 눈에 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러한 구성 방식은 우리민족제일주의의 부각과 더불어 고조된 전통 미술에 대한 관심이 조형적 형식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판단된다. 북한 미술계에서 기념비 조각 성공의 핵심은 수령의 혁명업적을 얼마나 폭넓고 깊이 있게 조형예술화 해냈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기념비 조각이 재건축을 통해 표상하는 바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1971년 제작되었을 때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이 표상하는 것은 김일성 전 주석의 혁명업적이었다. 그러나 재건축 이후 백두산장군들의 혁명 업적으로 확대되었다. (백두산장군은 김일성, 김정일과, 김일성의 아내이며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을 일컫는다.) 새로 제작된 부주제 군상 앞면에는 김일성 부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고 전해지는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의 정치활동을 형상화한 부조들과 전투장면을 새겼다. 또한 부주제 군상 뒷면에는 김정일 전 위원장의 친필 서한뿐만 아니라, 무산지구전투가 벌어졌던 당대의 상황 그리고 이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함께 형상화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정일 전 위원장의 업적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으로 재건축된 <무산지구기념탑>은 북한 미술계에서 항일운동 때부터 지금까지의 총대중시사상, 선군사상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선군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로 혁명적 기념비 조각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의 기념비 조각은 선전 선동성의 파급력만큼이나 북한의 관심과 지원 속에 제작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인력과 제작비용이 드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기념비 조각이 창작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이러한 관심만큼 기념비 조각 제작과 관련된 구체적인 원칙들을 만들어 미술가들을 규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미술계는 부주제 군상 조각에서 드러나듯 발달된 리얼리즘 조각 기술을 지니고 있다. 또 다양한 형상들이 방대하게 등장하는 거대한 기념비 조각을 조직해 낼 수 있을 정도의 구성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형상은 이상적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있다. 때문에 구체적 현실성을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있다. 이러한 기념비 조각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규제하고 있는 구체적인 제작 원칙이 보다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작가들의 역량과 사상성을 믿고 형식에 관한한 자율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다 과감한 자신감을 지니게 되길 바란다.
박계리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부분에 당선된 이후에는 미술평론활동도 지속하고 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근무한 바 있으면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근현대미술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과정의 역동성을 분석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남북 분단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북한의 기념비 조각
분량8,065자 / 16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비평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