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와사부로 코소 × 박재용
분량15,035자 / 3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대담
무차별한 도시개발과 죽어가는 도시공간에 개입을 시도하는 다양한 움직임은 지금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한창 지지를 받았던 그 많던 점거 운동의 묵시록은 이제 어떤 대안을 보여줄 수 있을까. 뉴욕과 도시에 대해 꾸준히 관련 글을 출판한 이와사부로 코소와, 도시와 공간을 소재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박재용 큐레이터가 이야기를 나눴다.
이와사부로 코소 1980년대 초부터 뉴욕에서 거주하며 일해 왔다. 전지구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에 참여해 왔으며, 『뉴욕열전』,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를 3부작으로 출간했고, 아나키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아나키즘의 계보학』을 일본어로 출판했다. 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을 엮은 책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에 저자로 참여했으며, 현재 사이트 jfissures.org를 동료들과 공동 편집하고 있다.
인터뷰/번역 박재용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로, 공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 워크온워크workonwork.org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와사부로 코소(이하 ‘코소’) 일본 상황은 특유의 이중적인 성격 탓에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계속해서 방사능이 누출되고 있고, 더 심각한 일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도쿄라는 대도시는 이 재난의 가장 핵심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다. 방사능 수치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은, 일명 ‘핫 스팟’이라고 할 만한 곳들이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일상은 이러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도쿄는 더 이상 안전지역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의 다른 한쪽에서 도쿄 시장은 다음 올림픽 유치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 이른바 도시 ‘재생’이 더 진행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본 의회는 재앙에 가까운 재난 대처를 위한 토론을 미뤘다. 이유는 단순하다. 올림픽 유치 기간 동안 도쿄가 방사능 등으로 인한 위험요소에서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다. 파국에 버금가는 상황과 미래에 대한 투사future projection가 공존하는 작금이야말로 정말이지 끔찍한 디스토피아라 할 수 있다.
내가 앞서 예로 든 두 상황이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도시재생은 보통 파국을 동반한다. 나오미 클라인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재난 자본주의 disaster capita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는 오랜 시간 그 자체로 파국적인 사건에 기반을 두며 발전해왔다. 이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다르지 않다. 르 코르뷔지에가 뉴욕에 방문했을 때 그는 뉴욕의 고층빌딩을 ‘아름다운 파국’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수평적인 풍경에 수직적으로 급작스럽게 등장한 고층빌딩이 도시의 공간 형성을 잘라먹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의 구축은 폭력의 역사를 동반한다. 예를 들어,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는 시리아와 레바논 공동체가 있던 곳이었으며, 뉴욕시 당국이 주도한 개발과정에서 여러 차례 강제 퇴거가 일어났던 곳이다. 복잡다단한 퇴거와 철거의 과정이 끝난 뒤에야 건설이 진행되었다.
박재용 당신의 저서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는 센트럴파크가 만들어진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이른바 도시재생 과정 초기 원주민들은 시에서 제기한 위생 문제 등을 이유로 다른 곳으로 다 쫓겨나고 지금은 값비싼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다.
코소 센트럴파크 지역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살던 곳이다. 공원 개발을 위한 강제 퇴거는 이와 같은 중요한 역사를 지워버렸다. 지금은 부르주아 시민과 사업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은 맨해튼보다 크고, 뉴욕의 다섯 개 지역을 합친 것보다 크다. 서울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표면 아래 가려진 다층적인 역사를 지닌 곳이 많을 것 같다.
박재용 서울의 개발은 뉴욕보다 더 폭력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신이 최근에 발행한 책과 지난 저서들을 통해 로버트 모제스 Robert Moses1와 뉴욕의 개발, 그중에서도 폭력적인 개발과 도시 ‘재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서울을 살펴보면, 1950년대에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 불과 반세기 동안 폭력에 가까운 도시 개발을 이루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한 준비 기간 중에는 벽을 쳐서 달동네를 가려버리기도 했다. 이제 철거와 재개발은 일상이라 해도 전혀 낯설지 않다.
코소 한국전쟁의 영향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박재용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다시피 했다. 전후 사람들은 곳곳에 건물을 지어 올렸지만 뉴욕과 같은 그리드의 도시 구조가 없었다. 구도심은 특히 더 그렇다. 비교적 최근 개발된 강남 개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에 중점적으로 이뤄졌다. 허허벌판이던 강남에 일부러 강북에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옮겨오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어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도시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러한 노력(?)으로 지금 강남은 한국에서 부유함의 상징이 되었다.
코소 뉴욕에서 부자라고 할 수 있으려면 거대한 흰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테면 미술관, 갤러리 같은 공간 말이다. 사실 거대한 흰 벽이 있는 생활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공업지구였던 소호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체들이 도시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경제가 포디즘Fordism에서 포스트포디즘, 즉 중공업 중심의 산업에서 서비스와 정보산업으로 이동하는 탈산업화 과정의 일부로 소호에 작가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용 1980년대에 태어난 내가 영화 등을 통해 마주한 뉴욕의 이미지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 와 같은 문화상품에 묘사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다>를 보기도 했지만, 역시 뉴욕이라는 도시에 공장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코소 적절한 지적이다. 사실 뉴욕에는 브루클린 해군조선소 외에는 큰 산업체가 자리 잡은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이 의류 또는 전자제품 같은 소규모 산업체다. 포스트포디즘으로 중공업 산업이 다 빠져나간 산업 공간과 창고들을 예술가가 점유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저렴한 주거비로 생활이 가능하게 했고, 큰 회화나 오브제 작업을 하기에도 이상적인 공간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 과정이 그 자체로 공간의 발명을 통한 문화적 생산이라고 본다. 처음에는 호화로운 공간을 만들거나 그런 모델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산업용 건물에서 살기 위해 스스로 공간을 개조하고, 시의 특별 허가, AIRArtist in Residence 를 받으려 애썼을 뿐이었다.
박재용 당신의 책에서 건물주가 예술가, 특히 미술가를 세입자로 선호한다고 읽었다. 그들은 건물주에게 특별한 요구사항도 없는데다 심지어 돈도 받지 않고 공간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더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코소 많은 수의 예술가가 건설노동자, 배관공, 전기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로프트 loft 공간이 점차 부르주아의 주거공간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카펫과 장식으로 가득한 빅토리아식 주거공간과는 반대되는, 크고 미니멀한 공간이 부르주아 주거공간의 상징이 된 것이다. 뉴욕 미술계에는 제프 쿤스처럼 비싼 오브제를 제작하는 작가부터 도시 공간에 직접 관여하는, 사운드/비디오/퍼포먼스에 이르는 작가들까지 다양한 층위가 있다.
박재용 말한 것처럼 직접 도시 공간에 개입하는 작가들의 예술적인 실천에 가해지는 법적 제약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인터뷰 전에 가볍게 나눈 대화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서울의 공공공간은 그다지 ‘공공적’이지 않다. 특히 도시 중심부에서는 경찰의 존재감도 상당하게 작용한다. 뉴욕은 어떤가? 공공공간 통제와 공권력의 존재감에 있어서 말이다. 뉴욕을 방문했을 때 공공공간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경찰 수백 명이 길모퉁이에 서 있는 서울과 같은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어쩌면 서울에서 공권력의 존재감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품도록 하는지도 모르겠다.
코소 뉴욕 경찰청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꼭 나타난다. 실제로 그 숫자와 무기, 고성능 장비 면에서 거대 세력이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찰청일 것이다. 특히 흑인 및 라틴계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경찰의 잔혹함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문제이다. 주로 젊은 남성인 이 지역 주민들은 “꼼짝마”라는 경찰의 괴롭힘에 끊임없이 고통 받는다. 과잉 방어로 매년 적어도 몇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도 심심치 않다. 경찰의 잔혹함이 일어나는 곳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뒷받침 받지 못한 불쌍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점거운동occupy’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총은 아니지만 최루액 살포장치와 같은 무기에 당하기도 했다.

박재용 현재 그런 상황을 겪고 있는 지역은 어떤 구역들인가?
코소 브루클린 동쪽과 남쪽 그리고 브롱크스 쪽이다. 맨해튼은 이제 젠트리피케이션이 거의 마무리 되어 새로 지은 건물들로 가득한 반면, 이런 지역들은 뉴욕시가 진행하는 갖가지 프로그램에서 배제되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윌리엄스버그와 같은 브루클린 북서부 지역은 급격하게 개발이 진행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최전선은 부쉬윅Bushwick처럼 더 동쪽에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미 뉴욕에서 여러 번 일어난 역사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스쿼트squat와 소셜센터 (주로 비영리로 운영되는 공동체와 시민들을 위한 공간)가 나타나고, 예술가의 이주 그리고 이후 바, 클럽, 레스토랑과 함께 힙스터hipster가 몰려오는 식 말이다. 이 과정에서 오랜 주민들은 건물주와 부동산 업체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퇴거당할 위협에 처한다. 월세 납부 거부 또는 반反퇴거 행동과 같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제를 돌려, ‘점거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이 운동의 큰 부분이 도시 공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연장선상에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뉴욕에서는 1970~80 년대 사이에 많은 스쿼트 운동이 있었다. 대부분은 1990년대 중반에 쇠퇴했지만 일부는 시의 승인을 받아 살아남았다. 그러나 법적인 절차 또는 경찰의 탄압 등에 의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스쿼트는 건물과 빈 공간을 점유해 반영구적인 주거지로 만들거나 ‘커뮤니티 가든’ 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점령’ 운동은 스쿼트 운동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도시 공간 개입에 있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타났다. 기술적으로는 2008~2009년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벌어진 대학 점거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 뉴욕시장의 예산 삭감에 항의해 시청 주변에서 일어난 노숙활동과도 그 궤를 살펴볼 수 있다. 말하자면 기간 시설을 점령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일시적인 점유일 뿐 영속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에 대한 이동성이 새로운 전략의 주요 초점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운동 시작 초기부터 금융자본주의의 중심부인 월스트리트의 공간을 점유하는 ‘정신 나간’ 짓이 가능할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계획을 들은 사람 중에는 우리를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 계획이 성공해 어느 정도 지속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도 꽤 놀랐다. 어쨌든 이러한 사건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뉴욕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재용 월스트리트 점거운동Occupy Wall Street이 처음 점유한 곳은 주코티공원Zucotti Park이었다.
코소 맞다. 공간 점유가 시작되고 난 뒤에 운동 참여자들은 주코티공원을 자유광장Liberty Square 또는 자유공원으로 바꿔 불렀다. 주코티공원은 사실 공공공간이 아니라, 반semi사적공간이다. 오늘날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공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협상 과정이 복잡했는데 이 과정으로 시간을 좀 벌 수 있었고, 시간이 좀 흐르고 난 후엔 여론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신 나간 젊은 애들”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로 말이다. 몇 달 뒤에는 결국 광장에서 쫓겨났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아주 많이 벌어졌고, 일부는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일종의 재사회화 혹은 다른 종류의 사회적 관계가 등장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나는 그곳에서 학생과 불안정 노동자, 실직자, 예술가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유명한 이들보다는 어느 정도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작업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자기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활용했다. 선전을 제작하거나 미디어 활동, 기록, 수행적 활동, 콘서트 등을 펼쳤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만났다.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은 도시에서 벌어진 운동의 좋은 가능성, 즉 인간관계의 재조합을 직접 보여주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공간을 서너 달가량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과정에서 공통의 삶을 공유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스쿼트를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뉴욕과 서울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창조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운동에는 창의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처럼 극단적인 어려움이 존재하는 시기에는 말이다.
박재용 2009년 서울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이나 이익단체의 주도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이 시위는 몇 명의 여자 고등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코소 기억난다, 촛불시위! 아주 인상적이고 강렬했다.
박재용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참고해서 살펴볼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촛불시위가 흥미로웠던 것은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다양한 사람이 거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같은 정당이나 이익단체에 속한 사람들끼리 시위에 참여하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 동일성을 바탕으로 결집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특이성을 존중하고 유지하면서 대화를 통해 공통성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많은 대화가 뒤따르게 된다.또 하나는 월스트리트 점거운동과 관련한 예술적 실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운동 이후 일종의 자율적 교육 그리고 공유활동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수업의 주제를 제안하고 실제로 수업을 진행한 ‘더 퍼블릭 스쿨thepublicschool.org’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비관적/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다. 자본의 난폭한 힘이란 우리가 이겨내기에 너무 벅찬 탓에 우리에겐 궁극적인 승리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무기력함 말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나 도시 정부 단위에서 설정한 계획들이 일단 시작된 뒤에는 바꾸기 어렵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그런 것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확정된 계획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도시 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운동들을 보면서 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코소 분명 그런 비관주의를 공유하는 이들이 많다. ‘아랍의 봄’으로부터 시작해 유럽의 광장 점유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점거운동 occupy 그리고 한국에서의 촛불시위가 현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봉기의 전조로 읽혀야 할 것이다. 많은 운동이 상당히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전 지구적인 세력, 즉 강대국과 자본의 초국적인 권력관계가 더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확신하는 바를 따르면, 권력의 힘과 대중의 힘이 존재론적으로 다르거나 대칭적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동질적이지만, 후자는 이질적이다. 물질적, 인지적, 정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권력의 힘을 포용하고 기르는 것은 대중이 가진 힘에 있다. 지배 권력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한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붕괴된다. 그렇다면 인민의 운동이 지닌 중요성은 그것이 폭력적인 수단이나 선거 등을 통해 국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분산된 힘에 있다. 즉 행성 전체를 가로질러 반향하며 권력 자체를 분해하는 힘이 되려는 것에 있다. 봉기가 어떤 분기점에 도달하면 외부로부터의 프레임이 설정 또는 재설정 된다. 다시 말해,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국가들이 그것을 이분법적인 구도로 내전에서 일어나는 이원적 대립으로 설정한다는 말이다. 특히 이집트와 다른 중동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와 스페인에서 전개된 놀라운 싸움은 정체된 듯하다. 사람들이 벌이는 운동은 후쿠시마의 지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건을 향한 주요한 방향을 멈추거나 바꿀 수 없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는 나 역시도 비관주의에 대해 마음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는 사람들이 절대로 봉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 명확한 사실이 있다. 내게는 그것이 시작점이자 동시에 되돌아오는 지점이 된다. 서로 공유한 한계도, 희망도 없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봉기한다.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봉기는 분명 공명한다. 반란이라는 것은 연대를 요청하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행성 전체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확장될 수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전 행성 차원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최근 진행 중인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도 이런 내용이다.
박재용 예술이 대체 이런 난장판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고민이다. 예술이 두 극단에 있는 세력에 동시에 봉사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은 아주 생산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야전병 노릇을 하는가 하면, 시민행동의 도구로 일하기도 한다. 전적으로 정치화된 예술 혹은 운동 혹은 행동주의 그 자체가 되어버린 예술은 완벽하게 상업화된 예술만큼이나 어딘가 분명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코소 나 역시 같은 혼란을 느낀다. 예술의 맥락에서 강연을 하거나 행사에 참여해달라고 할 때 특히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유럽, 미국, 한국을 비롯한 여러 예술기관이 전과는 다른 것을 시도한다. 예술과 행동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나는 고도의 상품화와 탈상품화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함이 의심스럽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도 모른다. 제프 쿤스나 데미안 허스트가 만든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작업의 가격을 보면 넌더리가 난다. 나는 예술에 자본주의적인 가격 매기기를 반대한다. 하지만 그런 모호함을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예술의 중요성은 감각의 체현과 행위에 대한 참여 사이에 있는 모호함이나 흔들림에 있다. 앞의 경우는 쉽게 오브제로 상품화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물질적 형태를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을 마주하는 운동이다. 두 측면 모두가 예술에 궁극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우리가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데에 있어 충분치 않다. 새로운 사회적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시, 시각적 기쁨, 청각적 자극과 수행성이 필요하다. 예술은 대체적으로 세계를 다른 식으로 개념화하고 다른 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박재용 한국에서는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 논의가 여전히 뜨거운 이슈이다. 디자인과 미술 등을 활용해서 도시를 재생하겠다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실패가 정해진 경우도 많다.
코소 예술과의 관계에서 실패라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맥락에서도 그렇다는 것인가?
박재용 예술과의 관계나 금전적인 이익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확실한 것은 재앙에 가깝다는 것이다.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시작되는 발전소 재생 계획을 예로 들면, 홍대는 인근 주택 차고 등 임대료가 저렴한 여러 공간에 예술가와 학생들의 작업실이 많았던 곳이었지만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을 한 차례 겪어 그런 공간들은 인근 지역으로 밀려났다. 소비행위의 중심이 된 이곳을, 미디어는 여전히 아주 예술적이고 젊은 곳, 문화적으로 활발한 곳으로 묘사한다. 홍대 지역에는 이제 다국적 의류 기업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고 있다.
코소 요즘의 소호나 이스트빌리지와 아주 비슷한 것 같다.
박재용 앞서 말한 발전소는 홍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강변에 있다. 수십 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다행히 핵발전소는 아니고, 2016 년에 수명을 다할 예정이다. 그런 탓에 2014 년부터 이곳을 일종의 예술종합시설로 바꾸려는 논의가 있어왔다. 그런데 지난 해 새로 집권한 정부의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창조경제”였다. 문화관광부는 2018년까지 기존의 발전소를 문화 종합시설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예술가 스튜디오, 전시 공간을 비롯해 아트숍까지 포함하는데 대체로 걱정스러운 반응이다.
코소 무척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인 것 같다.
박재용 그렇다. 이런 프로젝트에는 예술가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저 건설 작업이 끝난 뒤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정부관계자들은 이야기한다.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듣기에는 너무나 겁이 난다.
코소 예술이나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 일반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보면, 후쿠시마 재난 이후 일본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하나 있다. 아즈마 히로키를 위시한 유명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후쿠시마 원전이 있는 곳에 휴양지와 기념관을 짓는 미래적인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여기서 제정신이 아닌 점은 바로 이런 식의 미래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이인 파국적 상황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끌어가는 힘은 바로 재난의 해결책보다 재건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경제적인 것이야말로 전부인 셈이다. 모든 국가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금융과 산업 두 측면에서 경제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안녕을 희생해 이뤄진다.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한 계획은 아주 상징적이다. 원자로 주변 주민들이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지만, 재난과 관련한 모든 노력은 경제적 가능성과 사회적 순응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박재용 후쿠시마에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코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일단 심하게 망가진 원자로를 정리하려는 것부터 말이다. 내가 핵 관련 과학이나 기술 전문가는 아니므로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국제 정치 모두 아직 진행 중인 재난에 적절히 대처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애초에 원자력, 즉 핵분열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가능한 방안은 원자로를 잠시 격리하는 것뿐인데, 이것이 바로 핵발전이 극심한 비밀주의와 감시, 보안이 이뤄지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사성 물질이 지구 전체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후쿠시마 재난 이후 일본에서는 사회적 통제가 가장 끔찍한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모든 것이 여전히 자본주의를 따라 작동한다. 이런 상황은 스스로 멈추고 변화할 수 없다. 재난이 일어나면,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더 큰 개발이며, 더 큰 사회적 공간과 인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재앙을 넘어서는 자본주의적 방식이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더 큰 투자활동을 진행하는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투사는 바로 방사선에 노출된 그곳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재생으로써 시작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에 만들겠다는 시설은 서울에 있는 발전소 재생 개발만큼 확실하지는 않지만-물론 서울 쪽의 계획도 역시 냉소적인 지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겠다만, 이것은 더 크고 전 세계적인 힘의 한 부분이다. 결정적으로, 일본 경제가 붕괴하면 그에 못지않게 전 세계 자본주의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일본 경제를 위해 도쿄라는 도시를 유지하려면 후쿠시마에서의 자본주의적 (개발) 활동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후쿠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삶을 지속해야 한다. 결국 이것은 멈출 수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관련된다.
대체 이런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큰 질문이다. 특히 미국이 시리아에 침공할지도 모르는 오늘날에는 말이다. 지금은 아주 어둡고, 결정적인 순간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도시재생 사업이 핵이나 전쟁과 같은 이 모든 파국적 순간과 어떻게든 엮여있다는 것이다. 전쟁에 관련된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은 사업이니까. 동시에, 단 하나의 적 혹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단 하나의 거대 권력을 찾기도 몹시 어렵다. 적들 역시 그들 가운데서 싸워나가고 있고, 이점은 우리 모두에게 괴멸적 영향을 미친다. 그런 것들은 돈을 버는 것, 즉 경제적 경쟁에서 누가 누구를 무찌르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 자신의 장치를 생존케 하기위해서라도 멈출 수 없는 사업이고, 여기에 끝없는 대도시화가 함께 한다. 이처럼 거대하고 또한 하나의 머리가 달려있지 않은 적에게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이런 생각은 아직 초기 단계이고, 명확히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지구 전역의 다른 도시들에 있는 지역 상황들에 관해 정보를 공유하도록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관해 토론 중이다. 봉기가 전 지구적으로 반향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내 관심사와 닿아있는 지점이다. 나는 지금 뉴욕에서 ‘더베이스The Base’라는 새로운 소셜 센터와 함께 일하고 있다. 브루클린 부쉬윅에 자리 잡은 곳으로, 주민 대부분이 히스패닉과 라틴계이고 현재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 진행 중이다. 뉴욕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지이다. 퇴거와 임대료 급상승 문제도 있다. 더베이스는 외부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오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적 문제에 직접 개입하려 노력 중으로, 두 가지 지향이 있는 셈이다. 더베이스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양면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 운동이나 문화와 같은 외부 세력을 들여오는 힘인 동시에 특정 지역에 뿌리박은 활동이고자 노력한다. 미국과 일본, 한국 전문가들이 방문해 논문을 교환하는 국가 대 국가 네트워크도 아니며, 심지어 도시 대 도시 차원의 교류도 더는 아니다. 전 지구적인 대도시화/파국의 힘에 대항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의 네트워크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동네와 동네를 잇는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각기 다른 구역들은 다른 문제로 각자 곤란을 겪는다. 이 프로젝트는 교육과 공유, 서로 다른 고통과 투쟁을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한국에 있는 이들에게도 곧 연락을 취하고 싶다.
박재용 몹시 흥미롭다. 하트와 네그리식의 ‘제국’ 담론에서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동네 차원에서 일어나는 아주 실질적인 내용을 말한다.
코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은 여러 면에서 영감을 주지만, 문제도 있다. 그들이 책을 쓴 뒤로 상황이 변했다. 세계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행성 차원에서 이뤄지는 저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 세밀한 동시에 더 거시적인 것으로, 더 통합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동네 네트워크는 확실히 세밀한 차원에 있지만, 행성 전체 차원에서 연결성을 만들고자 하면서 지정학적 분리뿐 아니라 국가라는 틀을 침범하고 있다. ‘제국’을 구성하는 거대 기관이나 주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실제로 전 지구를 가로질러 존재하는 활동을 배우는 데 더 관심이 크다. 이런 연결성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다층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이야기한 촛불시위와 같은 영향력 있는 사례들이 한국에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사례들이 뉴욕에까지 잘 공유되지는 않는다. 뉴욕과 유럽,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잘 연결되어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뉴욕과 동아시아는 그렇지 않다. 또한 세계의 다른 도시들이 각기 다른 역할과 지위를 띠는 듯 보인다. 촛불시위는 ‘점령’ 운동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격렬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점령’ 운동 만큼 정보화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가지는 않았다. 좋든 나쁘든 뉴욕에서 뭔가 일어나면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는데, 단지 뉴욕이 제국의 심장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명 차원에서 이를 촉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일본에서 일어나는 운동들이 한국의 활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치 운동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말이다.
박재용 예술적인 교류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마쓰모토 하지메가 몇 차례 한국을 찾은 적이 있고, 입국을 거부당한 적도 있다. 예술/행동주의 면에서는 두 나라 사이에 얼마간의 교류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마쓰모토 하지메가 입국을 거부당한 일을 바꿔 생각하면 정부가 뭔가 벌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 간에 공유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되겠다는 목표로 많은 행사와 시설을 만들고 있는데도. 언어의 문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코소 그 점이 문제라는 걸 안다. 나는 한국어를 잘 몰라서 한국에 올 때면 영어를 써야만 한다.
박재용 때로는 외부에서 이미 이뤄지거나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많은데도 제대로 참고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코소 나는 예술이나 디자인을 통해 성공적으로 도시재생을 해낸 경우를 하나도 모른다. 말하자면, 도시의 어떤 부분에서, 특정한 시기에 문화 생산으로 인한 멋진 순간들이 발생할 때도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적 개발에 이용당하고 만다.
박재용 긴 시간 이야기에 응해줘 고맙다. 한국에 다시 오면 서울 시내를 걸으며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코소 올 겨울이나 내년 초 쯤 서울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시내를 조금 둘러보기는 했지만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맬 시간은 없었다. 서울은 그리드로 이뤄진 도시가 아니라 거리에서 길을 잃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생각으로 이야기 나누어 기뻤다. 서울에서, 함께 길을 잃어보았으면 좋겠다.
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분량15,035자 / 3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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