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언어로 시대에 말을 거는 예술과 학문
현시원 × 김홍중
분량10,837자 / 22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대담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논 픽션 다이어리>는 사회학 연구와 예술 작업의 경계에 있다. 이 영화가 1990년대 널리 알려진 지존파 사건을 일깨워 낯선 자극을 직조해 낼 때 그 씨실과 날실은 과거와 현재다. 분명 존재했던 사건은 놀라움과 굴종에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가의 날 선 질문 사이에서 대련을 펼친다. 이 영화를 보고 사회학자 김홍중과 큐레이터 현시원이 만나 오랜 이야기를 나눈 이유다.
현시원 현시원은 독립 큐레이터로 전시를 기획하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쓴다. 2006년 ‘워킹매거진’을 만들기 시작했고 『13Balls』 (잭슨홍 개인전 책자), 『디자인 극과극』 등을 출간했다. 현재 ‘목소리’를 주제로 한 『옵.신』 3호를 마무리하며 기획전을 준비 중이다.
김홍중 김홍중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 중에서도 인문학과 예술에 가장 가까운 분야를 탐구해왔다. 오랫동안 발터 벤야민을 사숙했으며, 향후 한국사회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사회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비교연구를 수행할 꿈을 갖고 있다.
학문과 예술 또는 사회학과 예술
현시원 교수님께서 조은 선생님의 『사당동 더하기 25』를 학문으로 구분하기에 앞서 다른 형식의 글쓰기가 가진 힘으로 보신 리뷰를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학문이 시대에 어떻게 말을 걸어볼 수 있을까요? 사회학자가 학문적 글쓰기 외에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은 동시대 예술과 만나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라 봅니다.
김홍중 학문이 시대에 말을 거는 방식을 ‘시대착오’라고 생각합니다. 학문과 시대가 이처럼 결코 동시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학문의 가장 큰 비애이자 자랑일 수도 있겠지요.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면서 시대의 중요 핵심들을 관찰하고 짚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적 어긋남은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예술은 한 템포 빠르게 시대와 관계를 맺는데 그래서 때로는 의도치 않게 예언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나야 그 예술작품이 시대와 맺는 관계가 포착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술과 학문은 묘하게 엇갈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은 시대를 앞서서 표현하고 진단한다면, 학문은 한 템포가 지나서 진단을 하는 것 같아, 학문과 예술의 교감 그리고 소통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현시원 말씀을 들으니 정윤석 감독의 <논 픽션 다이어리>는 예언적이면서 시대착오적인 게 겸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윤석 감독은 5년 동안 ‘지존파 사건’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감독의 집착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언가적인 풍모이기도 한 것이죠. 이 작업의 이야기에 기본적으로 공감은 하지만 ‘소재를 쉽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소재적으로 쉽게 취할 수 있는 과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어렵게 취재한 ‘과정’ 자체에 너무 기댄 발언인 지도 모르겠고요.

김홍중 요즘의 예술가들이 과거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과거의 사건들을 탐구하는 것을 단순한 복고 취향이나 노스탤지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간적 구조를 제공하는 미디어 환경과 지각적 환경 속에 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탐구를 통해서 지금, 현재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령 용산참사라는 동시대적 문제는 그것 하나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그리고 아직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집합기억 속에 있는 ‘참사들’을 환기시키는 것이지요. 용산참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죽지 않은 과거를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윤석 감독의 작품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현시원 젊은 작가들이 현재 또는 과거를 불러내는 방법들에서 저는 선생님과 다른 측면을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부유하는 본인의 임시성을 드러내는 정도의 발언이 체화되는 정도의 것들이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에서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윤석 작가의 작업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 자신이 1990 년대를 보는지 명확하게 밝히는 면들에서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 픽션 다이어리> 이후에 정치적인 입장 또는 과거를 다루는 작업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호기심도 생기고요.
김홍중 그렇다면 같은 세대들의 사회, 정치를 다루는 미술 경향은 무엇인가요?
현시원 1980년대에는 민중미술이 있었습니다. 이후 386세대의 경우 스스로를 ‘민중미술 이후’ 라고 적극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19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영향과 도시담론을 흡수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민중을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슈를 이야기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무렵 도시의 사라지는 공간이나 재개발 현장을 그린 회화가 많이 등장했던 것도 그러한 흐름 안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0년부터 2010년 무렵부터는 작가들이 협업과 콜렉티브를 결성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옥인콜렉티브는 세 명의 작가들이 팀을 이루어 활동합니다. 저는 팀이라는 것이 물론 게릴라성으로 활동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제도의 허약함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홍중 지존파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건의 형식으로 나타난 ‘구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990년대적인 것으로 사회가 전환하던 시점에서 돌출한 이 사건에서 계급 적대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갈등 등이 압축된 모나드monad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씩 벗겨내는 방법과 시선의 침투가 저한테는 조은 선생님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습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사회적 삶의 큰 모습을 보여줬다는 의미에서 정윤석 감독의 작업도 모범적인 사회학적 모나돌로지monadologie라고 봅니다. 작은 것 안에 우주 전체가 들어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회학에서 예술을 끌어오는 조은 선생님과 예술 쪽에서 사회학을 끌어 오는 정윤석 감독의 작업 모두가 흥미롭습니다. 사회학자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고통이 잘 보이는, 리얼리티가 있는 작품에 흥미를 갖게 마련입니다.
현시원 <논 픽션 다이어리>의 경우 극장이라는 장소에서 집단 관람의 형식을 통해 작업의 폭발력이 더 있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작품이 리얼리티를 다루는 방식 또한 극장이라는 대중예술의 공간적 장점을 취한 점에서 그 힘을 더 느낀 것 같습니다.
김홍중 지난 작품 상영 후 있었던 이야기 자리 역시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어우러졌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그와 연관된 이야기를 작품 외부에서 나누면서 작품이 관객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1990년대 중반을 대학, 대학원에서 보내면서 (저와 감독은 열살 차가 나는데) 정신적으로 저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들의 토대가 구성된 시기였습니다. 저는 제가 ‘90년대적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386세대의 세계관에는 100% 동의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성향과 혼란과 가벼움의 가면을 쓴 채로 생활했던 1990년대의 아이러니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윤석 감독의 작품에서 허를 찌르는, 나의 속살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은 이유도 그러한 시대를 겪었던 것과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신적 90년대 인간’이 객관적이고 날카롭게 거리를 두고 성찰할 수 없었던 영역, 그 시대의 내밀성을 형성했던 사회적 힘들을 저보다 십년 뒤에 태어난 누군가가 메스를 대고 째고 들어가듯이 보여주었다는 ‘황당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환상이나 노스탤지어 없이 비교적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 시대에 접근했기에 더 객관적이고 더 재미있게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대에 따른 망각과 기억
현시원 작품을 보면서 지존파 사건이 있던 1993년, 중학생이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작가에게 작업의 모티프가 되는 대중매체가 그의 어린 시절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물어봤습니다. 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작가의 원경험이 무엇이었을까 가장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미술가가 되려고 생각하기 훨씬 이전에, 작가가 꼬마였을 때 보았던 대중매체 이미지나 어른들의 이야기가 이 작업에 이상하게 스며들어 있을 거라 예상했었습니다.
김홍중 저는 모든 현상들을 ‘시간’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간과 경험 사이에는 묘한 엇갈림이 있어서 반드시 특정 시점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예술적, 학문적 접근에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작가가 보낸 1990년대는 저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1970년대 후반일 겁니다. 1970년대 후반, 텔레비전에서 본 박정희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의원의 이미지를 기억합니다. 그가 타고 다닌 검은 세단의 이미지도요. 유년기의 허술한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 중에는 의외로 정치적 이미지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년기에 스치듯 체험한 아련한 이미지에서 그 시대의 핵심을 발견하는 작업에 성공한다면 도리어 허를 찔리는 느낌을 받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시대를 청년으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 때문에 그 시대와 아직 냉정한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시원 스크리닝 직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 상영 중 젊은 세대들의 웃음에 놀란 한 40대 관객이 질문을 했습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20대를 보낸 그들에게는 <논 픽션 다이어리>가 당시 상황을 픽션처럼 다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홍중 <논 픽션 다이어리>에 나오는 사건들은 아마도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전혀 리얼리티가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폭격을 맞은 것도 아닌데 삼풍백화점이 맥없이 무너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 말입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일들이 많이 줄었기에 의아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초적 신뢰의 붕괴가 사람들이 원초적으로 갖는 존재론적인 안전감을 침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 곳곳에 흔적을 남겼지요. 이렇게 보면, 세대 간의 차이는 상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를 겪은 세대는 그 다음 세대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지 않겠어요? 망각과 기억이 쉬운 얘기가 아니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억하는 것 자체가 생존의 위협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용기 있게 기억을 불러내어 직시하라는 말이 그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묘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시원 ‘상처의 차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만약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는 존재라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을 겁니다. 상처라는 게 부조리하고 힘들긴 하지만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작품도 사망한 살인자(지존파) 보다도 사건을 해결하고 재판해야하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상처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증언과 인터뷰로서도 작품이 지니는 가치가 크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관객이 무엇에 반응해서 영화를 보고 웃는가도 흥미로웠습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이미지들에서 볼 수 있는 ‘구원할 수 있다’는 제스처가 웃기기도 한 거죠. 그런데 1990년대 나의 상황 등의 조건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웃음 포인트에서 웃음이 사회를 의식하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는 저항이 될 수도 있다고 나이브하게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2000년대 후반에는 사회가 너무 파편화됐다고 할까요? 황우석, 대통령의 자살, 88만원 세대 등 웃음이란 게 공통된 감각이 되긴 불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개인과 집단이 느끼는 리얼과 리얼리티
현시원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서 ‘특이성 singularity’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1990년대를 거쳐 2010년대를 살고 있는 개인에게 이 시간은 무수히 많은 단절과 변화의 과정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홍중 두 개의 쟁점/초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의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리얼리티라는 문제입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전대미문의 변화가 있었다고 진단할 때 크게 세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속화입니다. 매우 글로벌한 차원의 사회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만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결과적으로 경제논리가 정치, 사회, 문화 논리를 압도해나가는 현상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있어요. 20세기까지 단 한 번도 경제 논리가 사회 부문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를 넘어선 또 다른 사회적 실제가 국가 내부 일보다 중요한 적도 없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이 두 현상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후기근대성입니다. 19세기적 근대가 초기 근대라면 20세기 후반은 근대성이 완전히 심화되어 근대로부터도 다시 한 번 근대화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더 이상 집합적 정체성이 유효하지 않고 개인이 모든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고 전통과도 완전히 단절됩니다.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합리화되면서 전통적인 지식이나 가치가 소멸해버린 사회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개인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이를테면 죽음까지도 책임지겠지요. 마지막으로는 문화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관념, 고급예술, 소수의 예술가들의 창작문법이었던 포스트모던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와 있습니다. 거대서사를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취향이 다양화되고 탈중심화 되는 현상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세 가지의 복합적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의 사회 풍경입니다. 유일한 삶의 책임을 국가나 사회가 아닌 ‘나’라는 주체가 짊어져야 하는 사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삶 전체는 위험이 되었습니다. 큰 변동이 빠른 속도로, 글로벌하게 일어나는 소용돌이에서 한국 사회는 휘말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가장 가혹한 생존경쟁, 가장 처참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시원 이런 상황에 비추어보면, 정윤석 감독은 사회의 변화 그리고 현실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아직 긍정적인 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대에 말을 거는 것일 텐데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매우 오랜만에 “할 수 있다”는 제스처를 봤거든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김홍중 예술가니까요.
현시원 예술이나 학문이 해결책을 내놓는 완벽한 주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 혼돈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속도를 늦추는 것일까요, 이 상황을 직시하는 것일까요?
김홍중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를 “중심도 정점도 없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중심이 있다면 중심을 바꾸면 되고, 정점이 있다면 그 정점을 타격해서 점령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중심이 존재하며, 모두가 정점으로 기능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된다면 문제가 복잡해져요. 환경문제를 예로 들면 현대 사회는 이 중대한 사안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와 책임을 분산시키기 때문이죠. 학문과 예술이 이러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현실 세계 자체에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크게 느끼고, 원론적인 발언도 할 수 있어요. 그들의 발언을 중심으로 사회가 쉽사리 재편되거나 변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술과 학문이 처해 있는 위축된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예술의 역할은 리얼을 위한 순교
현시원 2010년에 제가 기획했던 전시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신문에서 본 기사에서 가져온 문장이에요. 이 문장을 보고 현실의 여러 가지 소스를 전시에 가져왔습니다. 제가 가져온 이 문장은 단편적인 ‘취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얼리티를 취하는 방식과 어투라는 측면에서 여러 작가들의 방법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후에도 젊은 작가와 나이 많은 작가를 정치적, 사회적 현실 태도로 한 데 같이 묶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어요. 2010, 2011년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매우 타자 지향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료 작가, 관람객, 동네사람 등을 작업에 참여시키려 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다시 콜렉티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작가들의 어법도 개인의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드는’ 어법을 따라가면서 살펴봐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그 어법이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홍중 예술은 본질적으로 리얼리티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파괴는 예술가의 삶을 계속 정지시키고 문제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가가 리얼리티에 편입되는 순간 예술적 가능성은 소진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리얼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파국의 체험이기 때문에 인생의 사건, 사고, 질병, 사랑의 실패, 고통, 죽음과 같은 실존적 체험, 혼돈의 체험, 정신적 상실의 체험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일상적 세계와는 깊은 연관이 없습니다. 예술은 리얼리티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리얼을 위한 순교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죠. 작품이 되는 순간 리얼리티를 교란시키거든요. 문제는 예술이 일깨우는 정치성은 다시 리얼리티 안에 자리를 잡거나, 아니면 리얼리티에 의해서 다시 뒤덮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통제가 된다면 리얼이 아닐 테니까요. 궁극적으로 작가는 수동성에 노출되고 그 수동성이 어떻게 보면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미스터리한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논 픽션 다이어리>도 좀 더 수동성을 개방했으면 어땠을까요?
현시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작가들은 자신의 수동성을 내어주면서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것 같거든요. 1990, 2000년대 작가들은 “난 할 수 있어” 보다는,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어떤 실패의 감각에서 작업의 추동력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홍중 비관주의가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가능성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같으면 ‘넌 너무 허무주의/패배주의적이야’라고 얘기했을 법한 태도들이 이제는 정치적으로 긍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황이 존재합니다. 실제와 예술이 맺는 운명적 관계도 좀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이 리얼리티에 기능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되, 경제나 정치 체계에 의해 전용되지 않는 방법에 더 시선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공공성’이라는 개념이나 ‘사회적’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될 것입니다. 보수주의나 패배주의를 끌어안고 그것을 다시 가치화시키고, 좋은 리얼리티를 만드는 구성적 예술 혹은 기능적 예술도 훌륭하다고 인정해줄 수 있는 비평의 아량도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예술은 고사하고 말겠죠.
사회를 체감한다는 것
현시원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회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집니다. 다시 사회와 예술의 관계로 돌아가는 질문인 셈이네요.
김홍중 사회를 꼭 체감해야 할까요? 저는 학생들에게 ‘사회를 비추는 거울은 없다’고 가르쳐요. 그런 거울이 있다면 그 거울은 깨져있겠죠. 예술가들이 사회를 잊은 상태에서 사회를 작품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더 치열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라는 게 있는 그대로 작품 안으로 기어 들어오면 작품을 잡아먹거든요. 정치도 마찬가지고요.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 철학 등이 작품으로 들어오면 감각이나 작품성을 갉아먹는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숨겨서 들여와야 하는데, 이 숨기는 것은 의도적으로는 안 돼요. 묻혀와야죠. 그래서 저는 ‘기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회 정치 윤리 등은 작품 안에 기생해야지, 작품의 색을 규정하는 실체적인 무엇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고 봐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작가는 사회 정치 윤리를 대상으로 다루면 안 되고, 거기에 물들어야, 병들고 오염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작품이 사회 정치 윤리를 기생충으로 품고 있는 병든 숙주가 되어야지, 작가가 대상으로 조작하는 순간이 오면 사회 정치 윤리는 작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작품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오히려 방법론적으로 그것을 차단하는 게 낫다고 봐요.
현시원 매우 재미있습니다. <논 픽션 다이어리> 는 사회를 일정 부분 대상화시키는 것 아닌가요? 90년대 벌어졌던 한 사건을 추적하고 벗겨내면서요.
김홍중 그런데 충분히 죽였기 때문에 (저는 더 죽였으면 좋겠는데) 아까 말한 수동성과 연결이 되는데, 오염됐을 때, 그래서 작가가 위험한 상태에 있을 때 좋은 사회적 정수가 작품 안에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이건 근데 제 개인적인 생각이어서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생충, 즉 숨겨져 있는 사회 현상과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은 관객과 독자에게 있어요. 그걸 믿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을 믿어야 해요. 이 독자와 관객은 동시대인일 수도 100년 뒤의 사람일 수도 있어요. 미지성을 가진 독자와 관객을 내 오염을 뚫고 봐줄 수 있는 이들이라고 믿지 않으면, 절대 못하겠죠. 작가는 그들을 가르치려고만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을 믿어야 해요. 그러므로 질문으로 돌아가면, 결국 사회를 체감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오히려 사회에 오염되고 사회에 의해서 병들되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시원 여러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술과 사회가 어떤 입장이나 생각이 정리돼서 말하긴 힘들 것 같고, 오늘의 대화에서 느낀 건 어떤 어제와 다른 ‘경험’입니다.
*본 대담은 지난 6월 27일 포럼앤포럼의 스크리닝시리즈 #1 이후 서로 다른 세대와 분야에서 바라보는 지존파와 90년대를 되짚어본 것이다.
다른 언어로 시대에 말을 거는 예술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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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3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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