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장소성을 기억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바라며
김경민
분량5,977자 / 12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유형오피니언
9세기 말 이탈리아계 이민자, 도밍고 기라델리Domingo Ghirardelli가 샌프란시스코에 기라델리 초콜릿 제조 회사를 설립한 이래, 기라델리 초콜릿은 풍부한 맛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 되었다. 하지만 도시적 맥락에서 기라델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옛 기라델리 초콜릿 공장을 변형한 기라델리 광장Ghirardelli Square 때문이다. 기라델리 광장은 건물의 전용adaptive reuse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적용된 도시재생 사이트다. 이 개념은 하버드 건축대학원GSD 교수 벤자민 톰슨Benjamin Thompson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건물을 부수지 않고 내부에 문화예술공간 또는 소매점으로서의 기능 등 과거와 쓰임이 다른 시설들을 입점시켜 장소를 재생하는 것이다. 기라델리 광장의 성공을 경험한 톰슨은 택지 개발 업자인 제임스 라우즈James Rouse와 함께 미국 도시재생의 역사를 바꿔놓은 실험을 보스톤에서 전개한다. 보스톤 다운타운의 쇠락한 재래시장 퀸시마켓을 ‘페스티발 마켓플레이스Festival Marketplace’라는 새로운 전략을 적용하여 재생한 것이다. 퀸시마켓 재생 전략 역시 공간의 전용에 기초하여 기념비적인 사례가 되었으며 미국 전 도시에 파급되었다. 이 성공사례는 여러 시사점을 준다. 쇠퇴한 지역의 별볼 일 없는 건물조차도 문화예술 기능과 지역 기반의 상점 입점을 통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너지는 단순히 건물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넘어서 도시에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퀸시마켓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많은 지역 특색이 강한, 작지만 경쟁력 있는 상점(문화예술 시설 포함)들을 앵커로 활용한 것이다. 도시재생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 효과가 지역에 파급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지역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이는 부동산 개발의 성공 측면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위험한 전략이었기에 초기에는 그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는 이가 많았다.
여기서 쉽게 간과되는 중요 성공 요인이 있는데, 바로 지속 가능한 운영을 가능케 하는 운영주체다. 미국의 공공기관(시정부)과 민간파트너 (택지개발업자)는 계획 및 기획단계부터 프로젝트 완공 후의 운영방식와 활용방식(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활용한 재생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민한다. 퀸시마켓 재생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당사자는 개발운용회사인 라우즈사社였다. 보스톤시는 퀸시마켓 토지와 건물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으나 라우즈사는 99년간 장기 임대권을 확보하여 프로젝트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단일의 운영주체가 프로젝트 계획단계부터 시정부와 함께 프로젝트의 미래를 고민하고 운영권을 확보하였기에 건물 내부에 어떤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할지, 어떤 이벤트를 개최할지, 어떤 임차인들을 입점시킬지를 체계적으로 고려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문화예술시설들이 입점하였기에 퀸시마켓이 성공했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 접근이다.
장기적 비전을 갖추고 공익성을 고민하는 개발업자를 찾기 힘든 우리의 현실에 이는 요원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미래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이해하면서 문화예술 기능 활용 능력이 있는 운영주체의 존재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도한 현실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와 같이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 건물을 건설하면 문화예술 디자인 기능이 들어올 것이고 그럼 어떻게든 성공하겠지, 라는 무지한 만용이었다.

DDP는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기념비적 장소를 철거한 자리에 건설되었다. 더 나아가 동대문 운동장 지표 아래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유적1 위 에 그 거대한 몸뚱이가 올라섰다.상징적인 건물이나 랜드마크와 같은 피상에 경도되어 역사성과 장소성을 파괴하였다. 백 번 양보하여 랜드마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DDP가 진정으로 동대문 패션 타운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미래에 DDP 내부에 동대문 패션 타운과 조화로운 기능들이 입점하면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계획 초기부터 그런 고민을 하였는가, 라는 질문에는 도저히 답을 할 수 없다.
동대문 운동장 재개발에 관한 초기의 논의는 대상지를 공원화하는 것이었으나, 2006년 오세훈 전 시장이 취임 후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 사업은 랜드마크 건물 건설로 방향이 선회된다. 시장 취임 후 1~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결정되었고, 그 와중에 예산은 초기 900억 원에서 4배 이상 증가된 3,700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그럼에도 연면적 85,000㎡ (공원포함), 건축 면적 기준으로 63빌딩 1/4에 해당하는 육중한 DDP 건물 내부에 들어설 구체적 기능은 확립되지 않았다.
DDP 탄생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되짚어 보아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과연 DDP에 적합한 기능이 무엇인가? 둘째, 무엇이 진정한 랜드마크이고 지역의 아이콘인가?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DDP와 주변 지역 도시 기능과의 연결성 파악에서 시작된다. DDP 주변 지역의 도시 기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24시간 쇼핑이 가능한 우리나라 최고의 패션 타운 동대문 시장이다. 따라서 DDP 주변 도시기능에 대한 이해는 동대문 패션 시장 더 나아가서는 동대문 패션 산업 분석에서 출발한다. 과연 동대문 패션 타운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으며, 글로벌 패션 중심지와는 대비되는 점이 있는가? ‘동대문 패션 타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려 30,000여 개의 상점이 존재하는 패션 상점들의 집적지이다. 글로벌 패션 도시들과 경쟁할만한 독특한 디자인이 있는 지역이라기 보다는 거대상권으로써의 동대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패션 도시들은 어떤 기능들이 뭉쳐 있을까? 글로벌 패션 중심지인 뉴욕 맨하튼의 패션지구, 가먼트 지구Garment District에는 다양한 의류 디자이너와 봉제공장, 소매상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동대문에서 볼 수 있는 소매점의 개수는 고작 300여 개에 불과하다. 글로벌 패션 중심지들이 인식하는 패션 산업 경쟁기반은 디자인업과 패션제조업 집적지이지, 단순히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의 집적지가 아니다. 따라서 동대문 패션 타운을 대규모 패션상권으로 보는 시각은 패션 산업의 고부가가치 영역인 디자인과 패턴, 재단, 샘플 제작 등 고부가 제조업의 가치를 도외시한 것이다. 이에 비해, 글로벌 패션 중심지에서는 패션 디자인과 제조업, 판매 3가지 기능의 유기적 연계성을 중요 요소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뉴욕 패션 지구에서 가장 뜻 깊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패션 제조업이다.

패션제조업의 중요성을 잘 일깨워주는 또 다른 사례는 런던이다. 영국 정부는 패션 디자인업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유망 디자이너들이 파리와 밀라노로 둥지를 옮기는 현실이었다. 디자이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패션 제조업체들의 존재가 너무 소중한데, 런던은 패션 제조업 기반이 두 도시에 비해 미약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사실 동대문 패션 타운의 성장은 인접지역에 위치한 패션 봉제공장과의 지리적 근접성에 기반한다. 하지만 창신동과 같은 패션 봉제공장 밀집지역의 가치는 쉽게 잊혀지는데,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창신·숭인 뉴타운 계획’이다. 창신동 봉제공장 지역을 철거하고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려 했던 ‘창신·숭인 뉴타운 계획’은 패션 산업의 가치 (디자인업과 패션제조업의 중요성)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정판이었다. 다행히 창신·숭인 뉴타운 현재 뉴타운은 해제절차를 밟고 있기에, 동대문 패션의 생산기지는 그 역할이 이어질 것 같다.
따라서 DDP가 지역의 맥락을 이해하고 최소한의 장소성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패션 디자인업과 더불어 패션제조업에 대한 가치를 보여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DDP계획 공론화 이전 그리고 이후,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이야기는 서울에는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상징이 될 수 있는 건물 또는 랜드마크에 대한 환상은 지난 몇 년간 우리를 지배했던 일종의 절대적 이데올로기였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자문할 사항은 과연 랜드마크란 무엇이며, 랜드마크는 과연 큰 규모의 건축물이어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DDP라는 건물을 마주하며 할 수 있는 답은 ‘Yes!’이다. 다시 뉴욕 패션지역의 랜드마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뉴욕 패션지구 입구에는 DDP의 1/100 아니 1/1,000도 안 되는 사이즈의 두 조형물이 있다. 바늘이 들어가는 단추와 그 옆에 있는 조그만 조각상이다. 그 조각상은 위대한 패션디자이너를 기념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이름 모를 봉제 노동자가 재봉틀 앞에 앉아 노동을 하는 모습이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국가 그리고 전세계 금융 중심지 맨하튼의 글로벌 패션타운, 그 앞의 랜드마크는 DDP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비록 초라할지라도 그 랜드마크가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강렬할 뿐 아니라 의미가 정확하기에 보는 사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패션 디자인의 가치는 누구나 인정하는 것임에도 그들이 표현하고자 한 진정한 가치는 패션 디자인을 위해 땀을 흘리는 봉제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주변의 역사와 장소성을 도저히 보여주지 못하는 5,000억 원짜리 메가스트럭쳐 DDP 그리고 뉴욕 패션타운 앞의 두 조각물, 진정한 랜드마크는 무엇인가?
우리를 더욱 부끄럽고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현재 구체화되어 가는 DDP계획안이다. 우수한 기능들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나 대다수가 디자인과 관련된 기능으로 읽힌다. 건축면적 약 40,000㎡에 해당하는 장소에 최소한 전태일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과 창신동 봉제노동자들의 지친 삶을 예우하는 공간을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요구일까. 창신동 소재 전태일재단은 면적이 너무나 좁아 주로 사무기능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태일과 관련된 전시기능은 당연히 취약할 수 밖에 없다. 해외에서도 찾아 방문하는 곳인데도 말이다.
DDP가 패션산업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을 통해 동대문 경쟁력 향상에 기여한다면, 제 아무리 5,000억 원이 소요된 건물이어도, 디자인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냥 비난할 수 없다. 서울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파괴하며 건설된 지금의 DDP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동대문 패션 타운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패션 디자인과 패션 제조업의 가치를 기리고 그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적 기능을 해야 한다. 또 봉제산업센터인 창신동의 역사성과 스토리를 발굴하여 이를 기념하여야 한다.
봉제산업과는 다른 차원이나 창신동에는 고故 백남준 작가 자택 터가 있었다. 그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창신동이라 밝혔다. DDP 내부 기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구상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으나 백남준 작품 전시공간과 같은 지역과 연계된 이야기와 장소성에 대해서는 고민이 더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바는 DDP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문화예술 프로그램 운영은 반드시 필요하나, 문화예술에 경도된 나머지 건물 활용에 있어서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5,000억 원짜리 건물은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할 것이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창출하는 퀸시마켓의 사례를 교훈 삼아, 문화예술과 경제적 지속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DDP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김경민
하버드대에서 도시계획/부동산분야 박사학위 취득 후, 보스톤 소재 상업용부동산리서치회사 Property & Portfolio Research, Inc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2009년부터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개발과 계획, Urban Computing을 강의하고 있다. 2011 년 용산국제업무지구의 실패가능성을 언급한 『도시개발 길을 잃다』를 출간하였고, 현재 프레시안에 ‘김경민의 도시이야기’를 연재중이다. 『서울 갱고更考 – Rethinking Seoul』(가제)가 발행될 예정이다. 현재 비영리 커뮤니티 개발회사 Urban Hybrid(소셜벤쳐)의 고문을 맡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장소성을 기억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바라며
분량5,977자 / 12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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