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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저장소’로서의 건축 아카이브

정다영

어느덧 한국 건축계도 ‘아카이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온 지 10여 년이 흘렀다. 학자들을 중심으로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지금은 담론보다는 실질적인 사업을 토대로 건축 아카이브의 초석을 다지고 있는 단계이다. 단번에 그 성과를 낼 수 없는 아카이브 사업의 속성상 현재 주요 추진 기관은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목천김정식문화재단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각자의 성격과 정책 방향 아래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는 국립현대미술관 건축 아카이브 사업을 맡은 실무자의 일원이자, 최근 기획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2013.2.28~9.22)1 전의 학예연구사로서 미술관이라는 제도권의 건축 아카이브가 갖는 성격과 의미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건축 아카이브의 구축 과정을 간략히 언급한 뒤, 특히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한 방법인 전시 기획 안에서 아카이브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건축 아카이브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미술관의 건축 아카이브를 촉발시킨 ‘고故 정기용 콜렉션’과 전시를 중심으로 아카이브라는 거대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은 실마리를 공유하고자 한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2013.2.28~9.22)의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의 수집에서 시작하는 건축 아카이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건축 아카이브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서울관 개관과 더불어 미술관 장르의 다양화와 전문화를 강조하는 일환으로, 전체 소장품의 0.06%에 불과한 건축 소장품의 확대를 추진하면서부터이다. 소장품은 미술관의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아카이브를 통한 건축 소장품 증대는 그만큼 미술관 내부에서 건축 장르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건축 아카이브는 ‘건물’이라는 최종 결과물의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 전반을 수집한다는 점에서 아카이브의 본질적 의미와 잘 통한다. 이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은 건축가 정기용의 자료를 2011년부터 수집하면서이다. 미술관에 기증된 약 2만 점에 이르는 그의 자료를 시범 프로젝트로 삼아 현재까지 외부 전문가들과 내부 아카이브 팀이 건축 아카이브를 꾸려가고 있다. 올해는 이타미 준いたみじゅん의 자료를 수집하고, 김수근문화재단과 함께 ‘김수근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실 위기에 놓인 작고 작가들의 원본 자료 수집에 집중하는 동시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건축가 김태수), 서울관 (건축가 민현준)과 관계된 기관자료 수집도 추진 중이다.

결국 ‘기록보관소’라는 아카이브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시작은 자료의 수집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카이브의 활용적인 측면, 예컨대 전시, 출판, 디지털 열람 서비스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정작 아카이브 고유의 특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부족”2 하고 자료의 수집, 분류, 기술description 등은 간과되고 있다. 아카이브를 정리하고 레벨level에 따른 기술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아키비스트의 역할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 초 건축 아키비스트를 영입하여 이를 진행하고 있다. 건축 아카이브는 미술관 전체 아카이브에 포함된 특수 분야 사업으로, ‘정기용’ 혹은 ‘이타미 준’ 등 작가별 콜렉션으로 관리된다. 따라서 아카이브 표준화에 알맞은 건축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건축가나 디자인 프로세스에 따라 결과물을 만들고 그 과정의 자료들이 존재하며 미술관은 이를 수집하는 것이다.

일단 자료가 수집되면 아키비스트를 비롯한 미술관의 전문인력들(큐레이터, 보존수복가, 레지스트라, 테크니션, 카탈로거 등)은 서로 협력하여 수집, 보관, 분류, 정리, 기술의 단계를 거쳐 아카이브를 구축한다. 이렇게 구축된 기록물은 외부 연구자에게 연구의 바탕을 제공하면서 미술관의 전시, 출판,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콘텐츠가 된다. 특히 미술관 안에서 “기록과 작품의 구분이 모호”3 한 건축의 경우, 아카이브는 건축 전시의 적극적인 활용 대상이 된다.

아카이브와 전시

앞서 설명한 대로 아카이브는 그 개념적 어원부터 실무적 차원에서의 기술 지침을 수립하는 것까지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에 따라 일이 진행된다. 국내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선례가 없다는 점에서 건축 아카이브 구축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유와 분배라는 아카이브의 소명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은 여러 기관과 협력하면서 표준용어 정리 등을 위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미술관의 첫 건축 아카이브인 ‘정기용 콜렉션’의 경우 자료 공개를 목적으로 전시가 올해 3월에 먼저 개최되었지만, 현재 각 아이템마다 메타데이터를 작성하는 기술작업이 병행 중이다. 아카이브는 통상 규모extent로 양을 파악하지만, 편의상 ‘정기용 콜렉션’을 매체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A3 사이즈 클리어 파일 208철에 작업도면과 일부 관련 문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안에는 건축 드로잉 약 15,000점, 작업 문서 약 2,000점, 작업 사진 약 200점이 보관되어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작업한 대형 도면과 모형 6점, 드로잉북 44권,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 제작한 공예 작품을 비롯해 생전에 전시 목적으로 만든 드로잉 액자 등이 남아있다. 또한 정기용 아카이브의 1/5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방대한 집필원고와 기타 사회활동을 보여주는 회의록, 보고서, 강의록과 같은 기록물로, 생애 전반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다. 즉 ‘정기용 콜렉션’은 드로잉과 모형 등 건축 자료뿐만 아니라 건축가 정기용의 활동을 반영하는 다양한 문헌도 함께 구성되어 있다.

약 2년간의 정리 작업을 거쳐 그 일부가 공개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전은 제목처럼 정기용의 드로잉에 담긴 ‘그림’과 ‘글’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시다. 『감응의 건축』(2008)에서 발췌한 ‘그림일기Figurative Journal’라는 제목은 그가 일생에 걸쳐 남긴 드로잉이 마치 풍경을 저장하는 길처럼 건축과 삶에 대해 새긴 일상의 보고라는 점에서 붙였다.4 이 전시는 정기용의 작품을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생의 여정에서 만나는 공간들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나누어, 관람객들이 그곳에 내재된 의미를 치열하게 파헤쳤던 한 건축가의 궤적을 따라 걷는 느낌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그림일기’에 담긴 의미

정기용은 최근 몇 년 사이 영화 <말하는 건축가> (2012)와 작고 직전 남긴 여러 저서를 통해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드물게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했던 그의 행보는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독특한 지점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행보와는 달리, 그의 건축 자체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 진행된 것이 많지 않으며, 그가 남긴 기록에 비해 비평가 등 타자의 시선으로 기록된 문헌들 또한 그 수가 매우 적다. 이렇듯 ‘건축가 정기용’ 혹은 ‘정기용 건축’은 앞으로 발굴해야 할 많은 의미들이 남아있다. 그의 아카이브는 이를 발견하게 하는 의미의 저장소다. 정기용은 생전 건축가 김헌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건축을 제대로 바라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5 필자 역시 아직 그의 건축은 그가 남긴 말과 건물로만 비춰졌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공 건축가’,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라는 명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의 다양한 업적과 행보는 아카이브 속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도 출품되었지만, 정기용의 아카이브에는 <무주 프로젝트>나 <기적의 도서관> 외 초기 인테리어 작업부터 개인 주택, 다가구 주택, 아파트 계획안, 근생시설, 문화시설, 추모시설 등 여러 현실적 조건에서 고민했던 다양한 작업의 갈래가 있다. 한편으로, 그의 건물을 설명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아카이브에서 찾아내는 작업도 가능하다. 그의 건물이 사회적 측면의 업적과는 달리 미학적인 측면에서 성취한 것이 없다는 세간의 지적은 엄청난 자본과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개입하는 현대 건축의 진행 과정 속에서 살아남은 미학적 가치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정기용의 아카이브에는 한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건축가가 고민했던 실무적 문제뿐만 아니라 그가 담고 싶었던 건축의 본질적 가치인 땅의 의미, 자연과의 관계, 실존의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즉 드로잉과 같은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들은 정기용 건축의 미학적 근원을 탐색케 하는 지점들이다. “건축은 문헌과 독특한 관계를 갖는다. 그 중에 하나는 도면이며 또 하나는 건물이다. 도면은 실현 여부를 떠나서 가상적인 자율성을 갖는 예시와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6는 설명은 문헌으로 존재하는 아카이브가 정기용 건축을 표상하는 또 다른 실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건축은 건물 그 자체로 수집될 수 없으며, 그 건물이 만들어지기 까지 사고한 여러 재현의 과정들이 아카이브로 남는다. 주로 옐로우 트레이싱지에 과감한 필치로 그려진 그의 드로잉에는 실제 건축물을 구상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드로잉이 아닌 건축가가 건축을 사유한 정신의 흔적 그 자체를 담고 있다. 예컨대 그의 주요 작업 중 하나인 <광주 목화나무의 집> 드로잉의 경우, ‘경계 – 영역 – 시간 -행위 – 관계 – 땅의 잠재력’과 같은 일련의 사고 과정을 통해 건축을 창조하는 그의 작업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드로잉 속 ‘그림’과 함께 곁들여진 ‘글’은 생전 정기용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한 지시어가 아닌 존재를 선언하는 행위인 셈이다.

의미 저장소로서의 건축 아카이브

많은 건축가들이 실현되지 않은 계획안을 자신의 중요한 작업으로 설명하고, 건물을 짓는 기회 자체가 많지 않은 오늘날 건축의 또 다른 실체인 기록자료로서의 아카이브는 건축을 이해하는 다양한 지점을 잇는 플랫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의 첫 번째 건축 아카이브 건축가인 정기용은 아카이브의 숨은 의미를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대상이다. 그의 아카이브는 외부의 물리적 건물과 그가 일갈했던 여러 말과 의식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자료 외에 미술관에 보관 중인 정기용의 자료들은 향후 미술관 연구센터를 통해 디지털 목록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앞으로 정기용 건축의 지평을 넓혀줄 중요한 보고가 될 것이다.

아카이브는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고 전시는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앞으로 진행될 연구나 새로운 전시를 통해 미처 이번 전시에 선보이지 못한 수많은 자료들을 재해석하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카이브가 부재한 우리의 현실은 건축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건축이 문화로 존재하기 위해서, 혹은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닌 사유의 체계가 되기 위해서 아카이브라는 ‘의미의 저장소’는 구축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외국과 비교해 건축문화가 부재하다고 한탄했던 것은 건축을 건물로서만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장의 드로잉이나 글, 메모, 모형과 사진, 영상과 같은 과정의 단편을 통해 건축을 이해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담긴 장소가 아카이브라면 우리는 기꺼이 이를 애정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 연구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아카이브 속에서 누군가의 건축을 해석하고 이야깃거리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아카이브는 느리더라도 오랫동안 진행되어야 한다. 묻혀있던 건축의 수많은 의미들이 발견되는 순간, 한국 현대 건축의 지형이 더욱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정다영

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월간 『공간』에서 건축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2011년 7월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의미 저장소’로서의 건축 아카이브

분량5,757자 / 12분 / 도판 3장

발행일2013년 6월 20일

유형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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