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공공디자인 전도사는 어디로 갔을까?
김상규
분량5,423자 / 11분 / 도판 2장
발행일2013년 6월 20일
유형오피니언
공공의 추억
2010년 7월 1일 민선 5기 서울특별시장의 취임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민선 4기는 맑고 매력 있는 세계도시 서울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민선 5기 역시, 그 꿈은 계속됩니다. 동시에 한발 더 나아가서 ‘서울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취임사에는 ‘맑고 매력 있는 서울’을 만들어 온 중요한 수단이 ‘디자인과 문화’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우선, 디자인은 “서울이 갖고 있는 회색 도시의 이미지를 매력적인 선진 도시로 바꾸어 나가기 위한 시정운영의 원칙”이자 “도시를 쾌적하고, 편리하고, 안전하게 바꾸어 나가는” 효과적인 정책 수단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문화는 “팍팍한 도시민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정의되어 “세계 선진 도시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문화는 경제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투자”이기도 하다고 언급되었다. 재선에 성공한 시장은 “서울 시민의 삶의 질을 더욱 높여 줄” 문화와 디자인 정책을 중단 없이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디자인을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특히나 ‘공공디자인’은 입에 담지 말아야 했다. 이날 이후로 공공디자인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찾기 힘들었고 공공디자인을 질타하는 얘기를 지겨울 만큼 듣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토록 공공디자인을 외치면서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관련 단체에서 중책을 맡았던 이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십 년 동안 출판된 디자인 관련 단행본을 분류해 보면 흐름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표1)

공공디자인이라는 정치
사실, 공공디자인은 서울시 만의 해프닝은 아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서 쉽게 비판할지언정 무시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이었다. 같은 시기에 해외에서도 (공공성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공익적인 실천을 촉구하는 묘한 담론이 형성되었다. 아마도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디자인 담론이 탈정치화되면서 도덕적 실천으로 피신한 탓일 것이다. 아무튼 국내외에서 각종 ‘디자인 선언문’이 터져 나오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디자인사업이 지속되었다. 공공디자인사업은 국가(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수행되었는데 서울시와 경기도를 제외한 광역 단체 및 기초단체는 중앙정부의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형식이었다. 2009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서 발행한 『공공디자인 품질관리 방안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와 같은 구도에서는 ‘지역개발의 정치화’,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의 상업화’, ‘관 주도와 행정의 비전문성’의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고 한다. 각 부처와 지자체에서 수행한 행사와 제도 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2)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2008년에 발표한 매력적인 도시 평가에서 서울이 세계 52개국 중 하위 수준으로 평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행정시스템의 문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UN 공공행정상UN Public Service Awards을 2011년까지 4년 연속 수상했고 올해는 UN 공공행정상의 4개 부분을 모두 수상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짧은 시간에 행정시스템이 어떻게 개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9년을 전후로 각 부처에서 공공디자인을 둘러싼 수상제도와 법적 토대 마련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져서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당시에 공공디자인은 공공성이라는 확고한 명분을 내세워 몇몇 국회의원들이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내 자치 단체장들도 방관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비슷한 사업들이 생겨났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그토록 쉽게 내버린 것을 보면 공공성에 대해 그들의 인식이 높아졌다기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게다가 공공디자인의 타이틀을 놓고 주도권을 다투던 디자인, 건축, 조경 분야의 전문가들도 쉽게 자기 변신을 했으니 공공성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물론 각 시기마다 중요한 쟁점이 있고 그것에 관심이 쏠릴 수는 있으나 공공성 논의가 단 몇 년 만에 급감한 것은 그 분야의 진정성과 전문성의 수준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관료뿐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전문가들도 정치를 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다시 공공성을 생각한다면
디자인의 공공성은 논의하기에는 지금이 오히려 적기인 것 같다. 공공디자인의 골드러시가 끝났다고 판단한 이들이 블루오션을 찾아 떠났기 때문에 이제야 차분히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공공 영역을 너무 단순하게 보았고 새로운 도시성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우베 레비츠키Uwe Lewitzky가 모두를 위한 예술?KUNST FÜR ALLE?』에서 새로운 도시에 대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대도시들은 기업적 도시로 바뀌었고 이 도시들의 도심은 대중과 투자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엔터테인먼트 지구가 되었다. 그곳에서 도시 공간에 체험세계를 형성하고 온갖 행사로 축제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다채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예술 영역은 이윤 지향적 도시 마케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우베 라다Uwe Rada와 같은 도시사회학자는 이때 공공미술이 이른바 문화적 추방기술의 도구가 된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중상위 계층’의 ‘자격 있는’ 대중을 위한 공공적 도시 공간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전형적인 방식으로 공공디자인이 개입하게 되면 계층별로 시민을 격리하여 배타적인 공공성을 고착시키는 인프라를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갑을 컴퍼니
몇몇 기업의 ‘밀어내기’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갑을 관계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런데 이는 비단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도 얼마나 정상적인 발주가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회의 중에 무작정 아이디어를 내달라는 경우도 겪었고, 예산과 감사를 핑계로 전문가와 전문회사에 짐을 떠안기는 사례를 주변에서 듣기도 했다. 그래서 모처럼 괜찮아 보이는 행사가 있으면 이번에는 어떤 이들이 속병을 앓았을까 걱정이 앞설 정도다. 정당하지 않은 계약관계, 공공이라는 이름의 착취일 뿐이다.
디자인의 공공성을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관료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디자인 전문가들의 의식을 탓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디자이너들을 두들겨 대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디자인의 공공성은 공정한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공공성은 봉사하고 퍼주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소득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지역의 구성원이자 납세자로서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고 디자인 전문가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 자치 단체라면 세수를 잘 관리하고 정책적 판단에 따라 공정하게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 예산을 절감한다는 명분으로 전문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시민에게 싸구려 경험을 제공한다면 공공성은 요원한 일이다. 훌륭한 ‘갑’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그걸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프로젝트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닌 셈이다. 레슬링이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따져보자. 아마추어 레슬링과 프로 레슬링은 다르다. 전자는 정해진 규칙대로 경기가 진행되고 선수들도 안정적인 조건에서 힘을 겨룬다. 간혹 한국 선수가 질 때면 상대편의 부당한 행위에 분개하는 경우는 있으나 그래도 선수들이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는 당연한 원칙이 통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선수도 메달을 딸 수 있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올림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미없어서 벌써 퇴출되었을 것이다. 결국, 공정하지 못한 상황을 직시하고 공정하게 바꾸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공공적인 명분이 있는 사업이라고 해서, 또는 다음에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뻔히 착취당하는 구조를 알고도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부분은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적극적인 이의제기가 쉽지 않다면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조직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집단이 공공성을 제대로 생각할 리가 없다.
보이콧, 거부할 권리
개별적인 작은 단위의 공공적인 노력도 무척 중요하다. 공정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누는 그것이 그 분야의 최소한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재원을 ‘공공’과 ‘복지’, ‘사회적’,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마치 디자인 사업인양 투입하고 있는 것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망해야 할 것을 억지로 살려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업화된 도시에서 특정한 집단의 문화적 삶을 돕는 것에 재원이 몰리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물리적 공간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공공 영역에서 다양성을 지키고 진취적인 시도들이 묵살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앞에서 나열한 얘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동안 공공디자인 정책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짚어내고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되어서 올바른 정책이 실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공무원과 경영자가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몇 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고 논의하고 사업을 진행해보았지만 그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해서, 부지런히 전문가의 의견에 듣고 결국에는 자신의 생각을 더 견고하게 다듬곤 했다. 간혹 공공디자인 전문직과 같은 새로운 제도가 생기는 것은 단언컨대, 정치적 이해관계가 잘 맞았거나 어느 행정가가 정말로 이례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이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는데 정작 전문가 집단과 시민들을 생각하면 그들 못지않게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남아있다. 우선 시민들은 축제화된 도시에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그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것을 공공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은 지원금을 받지 않고서는 공공성을 논의하지 않게 되었다. 『침묵의 공장』에서 강명관 교수가 지적하듯이, 이미 대학이 기업과 정부의 지원금에 익숙해져 있어서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으니 전문가 집단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지적하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성의 회복은 ‘공공’을 빌미로 하는 허울 좋은 사업에 대해서 보이콧을 감행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상규
서울대와 국민대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퍼시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껏 의자를 디자인하고 있다. 전시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동안 《Droog Design》, 《한국의 디자인》, 《갖고 싶은 의자》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어바웃 디자인』, 『의자의 재발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디자인 아트』, 『사회를 위한 디자인』 등이 있다.
그 많던 공공디자인 전도사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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