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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멋진 신세계: 신자유주의와 민주화

이택광

한국의 민주화와 소비자민주주의

오해와 달리, 1970년대 박정희 체제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것 같지만 생산력이라는 점에서 그랬을 뿐, 소비주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금욕적이었다. 특히 부유한 계층을 압박해서 너무 많은 재화를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특권층의 과소비에 대한 단속은 이 체제가 소비주의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과정은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을 포함해서 소비주의의 확장을 초래했고, 산업역군을 소비자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외식문화가 창궐하고 대중문화에 관심이 폭증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은 욕망의 분할이다. 이 분할 방식을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욕망의 향유를 고르게 분배하는 제도가 민주주의이고, 이를 유지·보수하는 게 정치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소비자민주주의’를 안착시켜온 경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1987년 이후 이루어진 한국의 민주화가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아니다. 소비라는 본질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된 욕망의 분배 구조가 바로 소비자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화폐를 매개로 해서 쾌락을 공정하게 교환할 수 있는 체제는 공평한 구매력의 분배를 전제한다. 구매력은 즐거움과 만족의 준거점이다. 소비자민주주의에서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동시에 만족을 구현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소비자민주주의에 근거한 쾌락의 분배는 형식적으로 1/n 형태를 띠고 ‘평등의 고원’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원 위에 거주하는 이들은 고원 아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의 최소화가 평등이 된 시대

신자유주의는 세대나 계급 격차의 문제를 일자리의 한계로 전환시킨다. 일자리는 늘어났지만 안정성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환경의 특징이다. 좋은 일자리 하나를 쪼개어 불안정한 일자리 여럿을 만드는 것은 기업의 처지에서 본다면 생색내기에 적절한 조처이다. 이런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 각인됐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갈라놓는 차별의 문제이지, 고용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실업률이 높아서 문제라기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서 문제인 셈이다. 여기에서 평등의 문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요구로 나타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말한 것처럼, 정규직화 투쟁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착취해주기를 바라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 불평등의 문제가 고용조건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용조건은 지난 대선의 이슈였던 경제민주화와 무관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최근 ‘신자유주의 한국’에서 유행어가 된 ‘민생’과 ‘서민경제’라는 막연한 개념이 포괄하는 내용은, 노동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를 써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을 두텁게 만들겠다는 공약이 제시했던 전망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쾌락의 평등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이 성공의 평등이다.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성공의 평등을 “각각의 사람들이 현재의 삶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합당하게 가질 수 있는 유감의 양 또는 정도에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성공하지 못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최소화하려는 것이 성공의 평등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공의 평등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방대를 다니는 학생이 명문대를 다니는 학생과 자신의 대학을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보다, 같은 대학 내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 학생 사이에 불평등한 처우가 발생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다. 평등의 문제가 복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런 변화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평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평등의 관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높이 솟아오른 고원에서 이루어지는 평등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변용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쾌락의 평등주의이다. 말만 평등주의이지, 쾌락의 평등주의는 ‘평등의 고원’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고원은 일정한 높이를 전제한다. 그 높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주변은 고원의 평등주의에서 배제된다. 솟아오른 고원의 평등에 집착하면서도, 주변과 고원 사이에 조성되어 있는 근본적 불평등에 대해 눈 감는 것이 쾌락의 평등주의이다. 이 평등주의는 부단한 자기계발을 통해 고원에 올라올 것을 주문한다. 고원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개인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주권을 획득한다. 실질적인 평등의 문제는 성공이나 쾌락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원의 평등이 중요하고, 이런 까닭에 경제민주화는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경제민주화는 자원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귀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정치의 담당자를 선출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난 대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 담당하는 제도의 문제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주관적인 평등의 태도와 무관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노동’의 의제가 소멸하고 ‘중산층 복원’이 지난 선거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중산층이라고 호명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중산층에 합당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우스푸어’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성공과 쾌락의 평등에 대한 지향이 이들에게 중산층 의식을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중간계급으로서 신분 상승과 소비주의에서 공평한 권리를 요구한다.

경쟁하고 경쟁하는 중간계급

정치적인 의미에서 중도보수의 증가는 한국사회가 보수 지배의 지형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은 ‘1987년 체제’로 불리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이념 구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이른바 민주세력이 두 번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일정하게 제도화한 것과 이 변화는 무관하지 않다. 민주화가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작동하기보다 일종의 조건으로 흡수됐다는 생각이 팽배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환경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민주주의보다 안전에 대한 요구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간계급은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이들은 계급적으로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기술자산skill assets’과 ‘조직자산organization assets’을 다른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보유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집단이다. 한국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즐겨 인용되는 교육열의 동력이 중간계급이다. ‘기술자산’과 ‘조직자산’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가 계급분석을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사회주의 체제에서 ‘왜 착취가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라이트는 계급의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이른바 지식정보사회로 진입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의 범주에 기술이나 지식, 또는 자격 같은 것이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한 집단이 도시중간계급으로서, 증권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고자 ‘금융파생상품’을 구입했다가 ‘하우스푸어’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근대화와 맞물려 있는 중간계급의 교육열은, 농촌에서 도시로 급속하게 이동하면서 부를 축적했던 경험을 토대로 삼고 있다. ‘금의환향’이라는 고전 서사는 명절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귀성인파’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도시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농촌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여기에 짙게 배여 있다. 물론 이런 믿음은 인구 이동을 통해 확보한 값싼 노동력으로 부를 축적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법칙이 종언을 고한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르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에 주도권을 주는 이데올로기이다. 금융자본은 더 이상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 중간계급은 이런 현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노동력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인간 자본human capital’의 확보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평등의 고원’에 먼저 진입할 수 있었다.

‘인간 자본’은 자식교육이라는 형태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어머니의 역할이 강조되고, 그에 따라 아버지의 지위도 변화를 맞이한다. 이 과정에서 자식교육에 정보나 열의가 없는 부모는 문제 있는 것으로 낙인찍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자식을 낳는 것만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준 받았던 어머니가, 이제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서 인재로 성공시켜야만 ‘탁월한 역량’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어두운 측면만 진작시킨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어머니의 자격을 갖춘 여성의 지위가 격상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부분적인 반성들이 일어났던 측면도 있다.

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나

최근 두드러지는 변화를 꼽으면, 중간계급이 정상국가보다 ‘안전사회’를 요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정상국가라면 안전사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 명제가 두 항목을 하나로 연결해준다. 이들이 원하는 정상국가는 ‘중립’에 존재하는 국가이다. 어디에도 편향되지 않는 중립적 국가에 대한 요청은 정치를 배제하고 행정 기능만 남겨놓은 정부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진다. 전문가주의는 여기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려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념을 지지한다. 노동자를 정치에서 분리시키고 현장을 효율성의 이름으로 통제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요구는 타협주의로 귀결한다.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만드는 규제 완화는 규제 자체를 없앤다기보다 자본의 축적을 가로막는 장애들, 무엇보다 임금체계를 자본의 논리에 맞춰 개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 지급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용 형태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이런 논리의 산물이다. 고용 형태의 변화는 삶의 양식을 바꾸는 근본적 전환을 초래하며, 한국사회가 보수 지배 사회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보수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그 이념을 혐오하는 정서이다. 보수는 이념을 가치의 문제로 만든다. 보수의 이데올로기는 가치와 사실을 뒤섞어 전자로 후자에 대한 판단을 뒤집는다. 중립성은 ‘도덕성’을 구성하는 기준이다. 이 중립성은 국가의 위치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중립에 서 있는 국가는 무엇인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국가이다. 이 국가는 ‘누구의 국가’를 정확하게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음에도 경제개발을 이룬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가시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립적인 국가에 대한 요청은 국가 없는, 또는 사회 없는 상황을 최선의 상태로 여기는 태도를 내포한다. 사회는 규제의 온상이다. 따라서, 사회가 없는 상태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대처주의자Thatcherites들은 ‘사회 없음the absence of society’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다. 사회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가치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이런 까닭에 신자유주의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화는 자유의 조건이고, 문화적 진화가 자유를 만들어낸다.

이런 논리로 인해 신자유주의는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보수주의를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특정한 문화를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더 진화한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를 제시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멋진 신세계’는 90년대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고유한 행위자로부터 떼어내어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원래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절충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이택광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학부 교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멋진 신세계: 신자유주의와 민주화

분량5,942자 / 10분

발행일2013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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