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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성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 용어이다

김광수, 김일현, 배형민, 임근준, 황두진

한국 건축에서 ‘지역성’ 논의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기도 했고, 입장에 따라 그 해석도 달랐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지역성을 이야기한다면, 개인이 중심이 된 열린 개념일 것이다. 10월 8일 이화여대에서 김광수, 황두진, 배형민, 김일현, 임근준 씨가 모여 “건축의 지역성을 다시 생각한다”란 주제로 열띠고 사방으로 튄 토론회를 가졌다.1


김일현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배형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임근준(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소장 

사회 김광수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김광수 ‘지역성’은 대단히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심지어 지리적인 의미에 국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로컬리티locality를 국지성局地性 이라는 단어로 해석한다면 ‘지역’보다는 어떤 국면에 놓인 ‘개인’의 차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건축계에서는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주제로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한국 건축계에서는 특히 4.3그룹2과 같은 건축가들이 장소성 담론과 함께 그러한 논의를 많이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한국 내 중추적인 건축가로서 나름의 건축 철학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중·일 건축가의 김옥길기념강좌에서도 그런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보편성의 대응, 한국성 혹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지역성

김일현 지역성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케네스 프램톤Kenneth Frampton이 『비판적 지역주의Towards a Critical Regionalism』 라는 책을 냈을 때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 같지만 사실 많은 경우에 건축가들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념을 강조하는 담론에 지속적으로 환멸을 느낀 것이 종종 드러났다고 봅니다.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의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 부터 시작해서 혹은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Neo-realismo 운동과 같은 시도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모더니즘과 병행하여 불연속적이지만 지속적인 그에 관한 성찰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역성이라는 주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성 혹은 그 이전부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통’이나 ‘한국성’ 혹은 한때 유행했던 ‘현대적 재해석’과 같은 표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실된 실체에 대한 향수와 분노까지 포함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논의의 본질보다는 그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처럼, 구체적인 논제보다는 논의의 반복 자체에 존재 의의를 부여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탈시간적인 본질에 대한 동경의 반복 속에서 담론은 누적되지 않고 항상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도 이어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배형민 그런 점이 지역성이나 장소성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김옥길기념강좌에 초대된 한·중·일 3명의 건축가에게 스스로가 지역적인 건축가인가, 본인의 건축에 지역성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별로 답변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지역성의 문제가 너무 규정적이고 단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정의된 이 개념이 굉장히 지배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건축에 대해 한국적이냐 아니냐를 물었을 때도 그에 따라 담론이 움직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쉽게 풀어보면, 지역성을 ‘실천’이라고 규정하면 됩니다. 개념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우니, 지역성을 하나의 실천양식이며 계속 움직이는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역성에 대한 담론은 서구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많은 경우 우리가 가진 담론의 범주가 서구적인 틀 속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김광수 교수께서 이미 제시했지만 대개 지역성과 장소성은 보편성에 반反하는 개념으로 설정됩니다. 국제적인 경향, 그리고 모더니즘이 보편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을 때 거기에 반하는 개념으로 지역성과 장소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틀 안에서 이야기한다면 먼저 ‘보편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설정되었기에 ‘지역성’이 대응하게 되었는지를 봐야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서구적인 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기되었던 한국성과 지역성의 문제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지역성에 반했던 보편성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보편성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성을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했는가에 대해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체성’ 문제로 연결되는 모더니즘의 지역성을 넘어

임근준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지역성 논의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파생됐던 지역성 논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이후 근대화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야기했던 건축의 지역성 논의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산업화 시대, 모더니즘 시대의 지역성을 논하게 된다면 토의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고 말 겁니다. 모더니즘 시절의 지역성을 따지다보면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체 나는 누구(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관련된 질문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한국적 디자인, 한국적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적인 폐쇄 회로에 갇혀버리기 십상입니다.

배형민 모더니즘의 유입과 한국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문제의 기점을 1990년대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논의의 갈래를 제시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 후의 지역성의 속성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모더니즘에 대해 더 이야기할 부분은 있지만 탈산업시대의 상황에 집중하는 것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임근준 물론 좀 더 모더니즘에 관해 이야기할 부분은 있습니다. 모더니스트 건축가에게 중요했던 지역성 혹은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의 배경에는 더 큰 질문이 잠복해있습니다. 현대성의 추구는 전통성의 문제와 동전의 앞뒤처럼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조선 땅에서 현대성을 추구했던 모든 지식인은, ‘나는 전통을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 전통의 재해석은 현대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그래서 ‘한국적 건축은 무엇인가?’라는 갑갑한 질문보다는, ‘각각의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현대성을 정의 내리기 위해서 전통을 어떻게 타자화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쪽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이후에 대두된 지역성 담론에서 시기별로 건축가들이 어떻게 ‘지역’이라는 타자를 각기 다르게 해석해왔는지 비교 고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으로 논의를 이끌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고 길어지니까, 오늘은 포스트모더니즘 대두 이후의 지역성 논의에 국한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외부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개인과 일상의 경험을 전제로 하는 지역성

김광수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성에 대한 논의 이후 장소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4.3그룹에 속하는 분들이 그런 논의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보며, 이 이야기는 실무와 이론 모두에서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상황이 생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형민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건축가가 어떻게 설계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건축가가 어떻게든 창작의 힘을 가져야 하는 상황에서 4.3그룹 세대는 창작의 원천을 경험에서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장소에 기반을 두게 됩니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의 <롱샹 교회Ronchamp Pilgrim Church>나 <라 투레트 수도원The Monastery of Sainte-Marie de La Tourette>에서의 체험이 건축의 동력원이 되는 것입니다. 지역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체험이지만 자신의 건축은 장소성에 기반을 두겠다는 생각입니다. 개념적으로 (모더니즘의 이슈를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장소가 중요했지만 막상 설계 할 때의 방법론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체험의 언어가 장소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담론의 표면상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에 건축의 방법론, 건축 기율discipline의 문제가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광수 이러한 맥락에서 4.3그룹 세대보다 후학이신 황두진 소장은 어떠한 고민을 하시나요?

황두진 저는 80년대 초반 학번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 한국성이나 정체성과 같은 지역성 -그때는 지역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과 관련된 논의가 당시 기성 건축가들 세대에서 활발했습니다. 저희는 그 논의가 가지고 있던 무게감을 상당히 느끼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세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상황을 보자면, 지역성이나 한국성이라는 논의가 건축가 커뮤니티에서 자생적으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건축가 자신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좀 더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로 사용했던 측면보다는, 어떤 정치적이고 비건축적인 이유 때문에 강요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의 현상설계지침을 보면, “유명한 전통건축물의 각 부분을 조합해서 설계할 것” 이라는, 지금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분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저항을 하면서 또 다른 논의들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막상 제가 기성 건축가가 되고 보니 외부에서 강요되는 ‘한국성’ 논의의 압박은 많이 약해졌습니다. 오히려 ‘개인, 일상의 삶과 방식, 일상적인 삶의 스타일, 아니면 어떤 작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동네 단위의 이야기들로 건축을 풍요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논의가 있습니다. 지역이라는 개념이 특정 지역에 한정해서 쓰이는 어휘가 아니라 비교적 열린 개념이라고 보았을 때, 이것은 한국 건축계 내지는 아시아 건축계에서 시작해 결국 개인이 자기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김일현 저도 그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선 지역성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이것이 지역성이다’, ‘이것이 한국성이다’와 같은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고민한 것은 ‘사람이 배제된 상태에서 과연 지역성을 논의할 수 있는가’ 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과 지역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건축물만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저는 ‘터무니’와 그와 유사한 수구적인 논의로 회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시적인 개인의 인생이 결국은 인류사와 접점이 있다고 보고, 어차피 더 위로 올라가면 신념에 따라 원숭이나 최초의 인간과 그 계보가 연결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체적인 개인사, 그리고 사물, 상황들을 가지고 논해야 지역성에 대한 논의가 힘을 가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보편성에 대립되는 구도로 지역성을 논의하면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 중심과 변방 속에 또 다른 변방이 있는 형국이 되어 그 자체에서 아무런 실효성을 가지지 못하고 끝날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의 보편성은 컨템포러리 버내큘러와 어떻게 관계하나

배형민 그런데 저는 보편성과 지역성의 논의를 폐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방법론 discipline의 이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근대적인 건축의 보편적 시스템, 그리고 건축 내부의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을 대표하는 보편적 건축이라는 것은 고전건축이고, 이것은 인터내셔널 스타일입니다. 대단히 넓은 시기에 다양한 장소, 지역, 문화에 걸쳐서 고전 건축이라는 매우 보편적인 건축 체계가 수천 년간 눌러앉았는데, 우리가 그런 고전 건축이 지배하는 장소들이 보편적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팔라디오Andrea Palladio 의 베니스,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의 로마, 랜Christopher Wren의 런던, 18세기의 에딘버러, 라브르스트Henri Labrouste의 파리 등 각기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인 건축 시스템이 지역과 장소를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중국의 목조시스템이 오랜 기간 동안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옛 건축을 보고 보편적 목조시스템이 장소성과 지역성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편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더불어 모더니즘도 구체적으로 정의를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차이를 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더니즘의 지역과 시기, 그리고 그 이후의 대응 방식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근준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논의가 상식 차원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 같습니다. 단순화한 논리로 부연하자면, 모더니즘 건축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등장했을 때, 각 지역별로 정치적 입장이 달랐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던 세대의 건축가들은 모더니즘 건축의 위대한 바벨탑을 무너뜨림으로써 붕괴의 힘을 제 자산으로 삼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다 옛말입니다. 모더니스트의 유산을 무너뜨리는 방법론 차원에서 어찌 각기 다른 지역성이 논의됐는지, 그게 정말로 합당한 주장이었는지 좀 따져봐야 옳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포럼에서 왕슈 선생이나 승효상 선생이 이야기했던 지역성 담론에서, 원천으로 전유專有된 버내큘러vernacular는 죄다 과거의 것입니다. 반면, 사나SANAA의 니시자와 류 선생이 말한 지역성이라고 하는 것은 동시대의 특수 지역에 존재하는 컨템포러리 버내큘러에 국한됐습니다. 이렇게, 두 명의 연사와 한 명의 연사가 말한 지역성이 굉장히 이질적입니다. 그저 동일한 단어로 이질적 요소를 통칭하는 바람에, 같은 주제라고 오인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니시자와 류 선생은 지역성을 이야기할 때 동시대의 지역적 특색에 초점을 맞추고, 승효상, 왕슈 선생은 과거에서 문화적 원형을 찾으려 들까요?

역으로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통 혹은 과거의 버내큘러 요소를 전유해서 새로운 조형을 구축해낸 성공적인 사례가 있나요? 지역의 과거에서 문화적 원형을 추출해낸 걸작 건축이 있다면, 그게 뭔지 궁금합니다. 만약 없다면, 왜 없을까요? 아니면, 한국에서 동시대의 버내큘러 요소를 전유하고 그 데이터를 유형학적으로 과대평가함으로써 성공적인 건축물을 도출해낸 사례가 있습니까? 동시대의 지역성에 성공적으로 화답한 걸작 건축은 무엇입니까? 만약 없다면, 이 또한 왜 없을까요?

황두진 제가 모더니즘에 관심 갖는 이유는 과학적 합리성을 전제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비판 받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합리성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건축가들이 어떻게 지역성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건축을 풍요롭게 만들고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저는 당연히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의 지역성에 대한 논의가 저와 같은 사람에게 유의미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통해서 담론을 정리하는 지적인 측면 이상의 문제입니다. 즉 모더니즘 논의와 지역성 논의는 서로 상반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더니즘의 합리적인 면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지역성 논의와 결합이 되면서 작업이 더욱 풍성해지고, 사람들에게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결과적으로 좋은 건축이 되는 예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는 이념으로서의 모더니즘과 근대적 태도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지역성 논의가 저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건축가 개인이 자신의 건축을 풍요롭게 하는데 어떻게 이것을 사용하는가라는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지역성 담론에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나

김광수 지역성이 갖는 사회적 의미 혹은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지역성 논의에 대한 필요성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제가 우연히 안성의 세계민속축제를 갔다가 각 지역의 토속물들이 장사진을 이룬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공간 자체가 일시적이지만 테마파크와 같은 논리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정체성 문제와 당연히 결부가 되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지역성 시도가 오히려 지역민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했습니다. 여기에 건축가와 예술가들도 문화기획의 형태로 많이 가세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탑다운top- down이 아니라 바텀업bottom-up의 시도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름의 지역성을 기반으로 전문가들과 소통하고 문화 및 생산 활동을 하며 광역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습니다. 또한 글로벌 논의의 ‘지역’과 지역의 ‘지역’도 마구잡이로 섞여 있습니다. 각종 비엔날레 및 국제행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황두진 제가 아까 정치적인 이유 또는 비건축적인 이유에서 한국성이 강요되는 것을 제 피부로 많이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부연 설명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용어가 바뀌었을 뿐, 건축계 밖에서 이런저런 개념들을 억압처럼 저희에게 강요하는 현상이 강도 측면에서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양적으로는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각 지역에서 축제를 할 때 지역의 특색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전근대적인 것으로 보고 대부분 농경사회의 특징을 통해 고착화 시킨 다음, 그 안에서 일하는 건축가나 디자이너 등 관련된 사람들에게 그 틀 안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지난 포럼에서 질문을 했던 것처럼, 지역성이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다가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인 것, 세습적인 것, 관습적인 것 등이 -우리가 무진 애를 써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들- 이런 저런 사탕발림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시 오고 있고, 또 그런 문맥에서 지역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렸듯이 어떠한 거대 담론으로서 지역성을 이야기할 때는 저는 드릴 말씀이 별로 없고, 다만 근대적 사고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에 그것이 획일화된 결과로 가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고 다양하게 갈 수 있게 해주는 개념으로서 지역성이라는 논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임근준 지역성에 대한 논의로 ‘담론’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역성이라고 하는 키워드가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조형예술분야에서 대두된 때는, 모더니즘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였고, 이제 그 문제의식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소멸됐습니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지역성을 내세웠던 건축가들은, 다들 모더니즘 시기 주류 건축계가 아니었던 지역에 속해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타자의 위치에 서있던 건축가들이 지역성을 열쇠말로 내세워 각각의 지역과 공동체에서 찾아낸 특질은, 과연 민족적 특성과 얼마나 달랐을까요? 저는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이 찾아낸 지역성이 이론의 차원에서 탐구한 민족지적 특성에 다름 아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건축에서의 지역성 담론은 초기의 비평적 힘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고,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제 작업의 모자란 부분을 (타 지역에서 온 건축가의 디자인안과의 비교로부터) 방어하는, 소위 ‘까방권’으로 활용되는 퇴행적 경향을 띠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지역성을 장소성으로 전치해 고찰해도 결론은 대동소이합니다. 장소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장소 특정성’입니다. 건축에서의 장소 특정성 담론은 1970년대에 미술계에서 미니멀리즘이 추상 미술의 정점을 장식한 이후, 장소 특정성을 추구하는 제도 비평 미술이나 대지 미술이 등장하게 되자, 그 논의를 건축계 내부로 포용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것입니다. 건축에 있어서의 장소 특정성이라고 하면 말은 그럴듯합니다만, 실상은 브랜드 이미지로서의 건축, 제 스스로 로고가 되는 랜드마크 건축과 맞물려 대두된 주제죠. 그런데, 농반진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세상에 장소 특정적이지 않은 건축도 있나?’

승효상 선생의 강연에서 드러났듯, 지역성이라고 하는 주제는 과거 전통의 버내큘러 디자인의 어떤 요소/차원과 서양건축사에서 주류 건축으로 제시됐던 서양의 버내큘러 건축(의 아키타입) 을 대치시켜 놓고, 그 대립 갈등 구조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비평적 논점을 조형 과정에 도입한 나 자신의 건축(물), 이렇게 3가지를 교차 비교하면서 자신의 건축 문법을 합리화해내는 담론 기제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정치적 합리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과거 세대의 모더니스트 건축가와 나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건축 문법을 합리화해내는 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속한 지역에서 건축적 헤게모니를 사수하기 위해 국외 건축가들과의 수주경쟁에서 나 자신의 건축 문법을 합리화해내는 일입니다. 이 2가지 이외에 더는 긍정적인 기능을 찾기 어렵다고 확신합니다.

황두진 저는 임근준 선생의 말씀에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지역성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시작된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 좀 더 첨예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근준 선생도 언급하셨지만 우리나라가 많은 해외 건축가들의 수주경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 건축가들이 불리한 입장에 놓이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 때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은 2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물론 내가 저 일을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고, 또 한 가지는 다른 누군가가 그 건물을 지었을 때 그 건물이 뉴욕에 세워지는 것과 서울에 세워질 때 분명히 기후, 지형, 여러 가지 사회적 구도, 사람들의 생활방식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문법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공허함입니다.

서로 논의가 빗겨나가지 않기 위해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도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사실 글로벌한 보편성을 이야기하기가 더 쉬워지고, 전원이나 자연으로 갈수록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크기 -렘 쿨하스가 자기 책의 제목에도 썼던 것처럼- 에 따라서 자본의 속성도 바뀝니다. 저는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당장 대규모 자본이 지역성 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대규모 자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중소규모 자본이 매개가 되어, 건축계의 헤게모니를 잡는다는 식의 측면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의 생활 문화와 패턴이 잘 반영된 건축물을 원하는 수요가 분명히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차원의 이야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형민 앞서 임근준 선생이 세 건축가를 단칼로 지워버렸지만 실제로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세 건축가 중 어느 한 사람도 강연 중에 ‘지역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시에 썼던 말은 ‘풍경’ 또는 ‘landscape’ 입니다. 그 이유는 지역성이라는 말이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지역성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 세계가 변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황두진 소장은 건축가로서 ‘지역성’이나 ‘장소성’이 가지고 있는 생산성을 믿기 때문에 함께 했다고 생각합니다. 세 건축가가 모두 기성이고 그 지역성이 의심받더라도, 방법론적으로 그들의 건축을 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지역 이슈와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중·일에서 중심과 변방의 논리가 바뀌고 있습니다.

글로벌리즘의 논리와 대자본이 횡행하면서 지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과 ‘자본’의 논리가 명백합니다. 심지어는 글로벌리즘이 끝났다는 주장들이 서양학계에서 진행되고 또 다시 자기중심적으로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새로운 논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서구중심적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중심이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한·중·일의 건축가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 건축에서 지역성을 생각한다

김광수 한·중·일 건축가의 강연에 대한 패널 분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보며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황두진 그 때 강연장에서 짧게 질문했던 것처럼, 전근대성이라는 것이 이러한 논의에 포장되어 들어오는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니시자와 류 선생은 조금 달랐던 것 같지만, 나머지 두 분이 머릿속에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한 농촌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직한 현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시아 각 지역에서 도시화가 굉장히 빨리 진행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인류역사상 도시화 진행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로 기록이 될 것 같습니다. 도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밀도와 다양성입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과연 그 날의 프레젠테이션 어디에 담겨있는지 의문스럽고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계속 나아간다고 했을 때, 도시화를 그만 두고 전원형 프로토타입의 건축을 만드는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강연을 들었습니다.

김일현 세 분의 건축가는 각각 한·중·일 국적을 가지고 있고 그 구도에서 초청이 된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그것을 가로 질러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몇 가지 -성별, 국적, 나이 등- 가 있지만, 반면에 국적을 넘어서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는 “내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곳은 나의 조국이다” 라는 나름 공감할 수 있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이긴 하지만, 배타적인 것을 넘어서서 그런 배경에서 자신의 작업을 하는데 풍부하게 하는 원천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왕슈 선생은 집요하게 자신이 살았던 도시를 이야기했고, 니시자와 류 선생은 각각의 프로젝트가 다루었던 상황들을, 승효상 선생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고유한 본질과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 3가지 방식이 직간접적으로 지역성에 대해서 논하지만 굉장히 다른 방식의 사고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참 논의하기 힘들 것입니다. 좀 전에 임근준 선생께서 말씀하신 역사의 전개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여전히 선형적인, 모더니즘적인 시각을 전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감하는 단어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즉 동시대성이라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차용한다면 이전과 지금의 차이는 시간에 대한 태도라고 봅니다. 이전에는 쭉 이어져 와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펼쳐져 있는 시점에서 보고 있다는 태도이고 이것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지역성에 있어서도 굉장히 자유롭게 대할 수도 있고, 과거의 유산과 더불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그렇고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규정되기보다는 선택과 조합이라는 작업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근준 저는 한·중·일 세 분의 강연을 듣고 나서 ‘건축가가 머리가 좋다고 해서 건축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날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건축가의 시각뇌를 동시대 차원에서 비교해보면 왕슈 선생의 뇌가 가장 구식입니다. 그야말로 가슴이 뜨거운, 21세기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옛 정취가 망가진 현실을 개탄하면서 과거의 송나라 시대의 그림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그 아름다움을 제 건축 프로젝트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말도 안 되는 욕망을 지녔죠. 건축사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거나, 직관력이 조금이라도 더 좋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씀을 정말 끝도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물은 몹시 아름답습니다. ‘건축가가 과대망상을 품을 때야 비로소, 결과는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그를 기동시키는 시각뇌가 가장 현대적인 인물은 니시자와 류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의 방법론은 아주 정교하고, 동시대 경쟁자들의 그것에 견주어 뒤처지는 바가 없도록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들이 대단히 ‘스마트’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이 대단히 흥미롭거나 위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더군요. 반면, 승효상 선생의 논의를 듣고 있자면, 아주 강하게 자신이 동시대인이라고 웅변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점은 아직까지 모더니스트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수차례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 건축물의 조형을 봐도 모더니스트의 시각뇌로 만들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운 모양이죠. 지속적으로 과거의 전통에서 하나의 건축적 원형을 찾아서 어떤 차원을 이론적으로 해석해내고, 또 그것을 서구의 건축적 원형과 비교해가며 자신의 건축적 알리바이로 제시합니다만, 그 숱한 논의 전개가 결과물과 아무 상관이 없어 뵈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성이라고 하는 방법론 차원의 개념도 최종적으론 결과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 성과 자체로만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일현 제 생각에는, 지금 말씀하시는 바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지난 한·중·일의 건축가가 각자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지 않을까요. 그것을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우리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12회 김옥길기념강좌의 일환으로 열린 연계 포럼의 전경. 2012. 10. 8

지역성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 용어이다

분량14,502자 / 3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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