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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엔날레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호경윤

비엔날레, 불평과 불만의 영토

올해도 어김없이 비엔날레에 대한 비평과 비판이 쏟아졌다. 나 역시 지난 10여 년 동안 비엔날레를 보고 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더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마치 ‘투견꾼’처럼 비엔날레들이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을 지켜봤다. 돌이켜 보면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Massimiliano Gioni가 감독을 맡았던 2010년 광주비엔날레만 예외였을 뿐,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은 개막하기가 무섭게 욕을 먹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비엔날레는 개막까지 작품 설치가 끝나지 않았던 2002년 광주비엔날레였다. 예술성의 높음과 낮음을 떠나 대규모 국제 행사를 책임지는 예술감독이 기본적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일 감독이면 전시의 스펙트럼이 좁다고, 또 공동 감독제면 산만하다고 지적한다. 전시 주제가 명확하면 너무 쉽다고, 그 반대의 경우면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비엔날레 전시장 역시 넓으면 넓다고 또 좁으면 좁다고, 전시 예산도 많으면 많은 대로 또 적으면 적은 대로 불만이 나온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의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어디 비엔날레에 누가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어느 작가가 초청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에만 열을 올릴 뿐 막상 전시에 대한 반응은 싸늘하다. 전 세계 15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존재하는 지금, 이미 몇 해 전부터 비엔날레 제도에 대한 무용론과 회의론도 나올 만큼 나왔다. 사실 이제는 비엔날레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도 지쳤다. 실제로 매회 베니스비엔날레를 다녀온 사람치고, “전시가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주요 거물급 인사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교통도 불편하고 물가도 높은 베니스에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젠 비엔날레라면 지긋지긋하다던 당신 역시 지난 가을 KTX를 타고 광주로, 부산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비엔날레 강국, 코리아!

아마도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비엔날레를 보지 않으면 미술계라는 거대한 생태계에서 도태되는 듯한 기분에서 오는 의무감. 그러나 그 뒤에는 늘 ‘실망감’이 따른다. 이러한 굴레 속에서 한국 비엔날레의 역사는 어느덧 20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 미술계는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담론과 다양한 전시 방식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고, 더욱 풍요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1998년 부산비엔날레(부산국제아트페스티발PICAF), 2000년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가 연이어 출범했다. 이로써 ‘한국 3대 비엔날레’ 라는 경쟁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후 지자체 문화 사업의 부흥에 힘입어 금강자연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인천여성비엔날레 그리고 올해 새롭게 출범한 프로젝트대전까지 국내 주요 도시마다 비엔날레가 열리게 되었다. 특히 지난 10월 말 광주비엔날레에서 첫 세계비엔날레대회를 열어 전 세계 비엔날레 관계자 70여 명을 한자리에 모으고, 비공개 비엔날레대표자회의에서는 세계비엔날레협회IBA까지 창설하기에 이르렀으니 한국은 그야말로 ‘비엔날레 강국’이 된 셈이다. 그 사이 비엔날레는 일종의 ‘업계’로 구조화되었고, 미술 동네의 성수기를 결정짓는 새로운 제도로 특화되었다. 외국인 관계자의 방한 일정을 고려해, 최근 국내 비엔날레들은 짝수해 9월에 몰아서 개막하는 추세다. 이렇게 해서 VIP오프닝에 모인 국내외 인사들은 전시보다는 사람을 본다. 새로운 사람을 소개하고 소개받는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그룹들은 함께 전시를 스윽 둘러보고 비엔날레에 대한 몇몇 단상을 주고받고는, 이내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서울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역시 비엔날레 시즌에 열리는 전시에 특별히 신경 쓰는 눈치다. 그 중 몇몇 메이저 갤러리에서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계자를 위한 만찬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윽고 10월에는 각종 미술 월간지들이 비엔날레 현장을 스케치한 화보와 그럴싸한 글을 동어반복적으로 쏟아 내고 있다.

광주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비엔날레대회 광경 / ©광주비엔날레재단

어느새 ‘비즈니스의 공간’이 되어버린 비엔날레에서, 그 구조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을 살펴보면 ‘갑’과 ‘을’의 입장이 분명하게 갈린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갑과 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재단(지자체)과 예술감독 사이는 당연히 재단이 갑이고, 예술감독이 을이다. 재단 직원은 대부분 비엔날레 출범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이고, 예술감독은 매회 외부에서 선임하고 행사가 끝나면 내보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감독과 참여작가의 관계에서는 참여작가를 결정하는 예술감독이 갑이 된다. 그러나 이 관계에 관객이 들어오면, 예술감독과 참여작가는 같은 갑의 입장이 된다. 그렇다면 관객은 어디까지나 을이고, 재단(지자체) 은 갑인 것일까. 지방선거 때 그 둘의 관계는 극명하게 뒤바뀐다.

비엔날레, 비즈니스와 정치의 공간으로

결국 예술과 정치의 기묘한 공생 관계로 귀결되는데, 이러한 진풍경이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개막식에서 그려졌다. 지난 9월 6일 오후 7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장인 강운태 광주 시장, 광주비엔날레 홍보대사 배우 임수정과 이병헌,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당시 민주통합당 경선 후보였던 문재인, 손학규가 모두 참석해 엄청난 경호팀과 취재진이 몰렸다. 이들의 출현은 이날 개막 축하 행사로 진행되었던 뮤지션 어어부프로젝트, 달파란 &병준의 공연보다 더욱 임팩트 강한 퍼포먼스였다.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시민들을 앞에 둔 채 차기 대선주자들의 손을 잡고 인사하는 장면 하나로,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는 광주 시장은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지자체장들이 지역 예산을 들여 비엔날레를 운영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운태 광주 시장은 3명의 대선 후보에게 개막식 현장에서 함께 손을 잡아보라고 권하며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 ‘라운드테이블’처럼 둥글게 힘을 뭉쳐 국민에게 이로운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언급을 했다. 순식간에 비엔날레가 ‘정치적 공간’으로 뒤바뀐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비엔날레는 해당 국가의 수도보다는 제2의 도시에서 열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방자치제 이후 각 도시별 지역 문화 마케팅의 한 방편으로 설립된 배경이다. 이것을 도시가 아닌 국가 단위로 확대시켜 살펴보면, 비슷한 이유로 최근 20년간 설립된 비엔날레의 대다수는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이 차지한다. 100년이 넘는 긴 역사와 인지도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베니스비엔날레와 달리, 최근 30년간 새롭게 출범한 후발주자들은 미술 자체보다는 외부의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합당한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비엔날레는 제3세계가 가진 한계성을 예술적 화두로 내세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중복 편성에 대한 차별성 전략으로서 ‘장르’ 중심의 특수성을 설정하고 있다. 현대미술 전반을 다루는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 외에 다른 지역의 비엔날레 대부분은 미디어(서울), 사진(대구), 도자(이천), 자연미술(금강) 등 장르를 강화시키는 성격을 갖고 출범했다. 비슷한 작가, 비슷한 작품으로 채워진 대형 전시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에 대한 대안적 선택일 것이다. 또한 비교적 소외된 장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장르의 프레임 안에 예술을 가두는 것은 비엔날레가 가지고 있는 애초의 목적과는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올해 열린 대구사진비엔날레는 이러한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사진이 아닌 ‘사진다움’이라는 주제 아래 매체의 확장성에 주목하면서 지난 회보다 7억 원이 증액된 16억 원의 예산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재단 측의 역부족한 행정 능력과 일부 구태의연한 기획자에 의해 성공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다. 또한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지난 2010년 전시에서 ‘미디어아트’를 탈피하려고 했다가, 올해는 다시 장르 중심적인 전시로 되돌아왔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오히려 이번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지역’의 프레임에 갇힌 비엔날레

한편 부산비엔날레는 해양도시라는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초창기부터 유지해 왔던 바다미술제를 이제 홀수해로 옮겨 개최하기로 바꿨다. 대중을 모으는 데 효과적이었을지는 좋았을지 모르나, 본전시와 상이한 수준으로 오히려 비엔날레 전체의 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이번 부산비엔날레 측의 결정은 옳았다고 본다. ‘축제’라는 형식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대중성’이라는 과제 때문에 비엔날레의 성패는 예술성보다는 관객 수와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로 환원되곤 한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용우는 “이제 예술은 정신적 가치라기보다는 물질적 가치가 점유하는 거래 중심의 질서가 완성되어 가고 있으며, 시장이 문화적 재미를 첨가시킨 새로운 프로그램까지 등장시킴으로써 예술의 공공성이나 공동체적 가치 등을 제어하는 슬로건들을 만들어 낸다”는 다소 현실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모순과 한계, 그것에 대한 대안과 실천을 동시에 안고 가는 것이 오늘날 비엔날레의 현실이다. 비엔날레에 대한 의무감과 실망감.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엔날레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비엔날레가 ‘갑’과 ‘을’의 관계로 둘러싸인 비즈니스와 정치의 무대가 되면서, 가장 중요한 전시는 최종의 ‘을’의 존재로 남는다. 여전히 우리가 기대를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전시’다. (로저 M. 브뤼겔Roger M. Buergel 감독이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배움의 정원’ 이라는 테마 뒤로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갑’과 ‘을’의 관계를 비틀고, 다시 ‘전시’라는 마당으로 모두를 초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 2010년 부산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일본 큐레이터 아주마야 다카시Azumaya Takashi가 죽음을 선택한 소식을 들었을 때, 혹자의 말대로 어쩌면 현대미술은 이미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끝으로 향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끝이 언제든 간에 여전히 비엔날레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수없이 질문하고 싶다. 학습하기보다는 감동하고 싶다. 꼭 새로운 작품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으면 한다. 전시의 단위, 즉 작가-작품-개념- 기표의 배치 속에서 그 행간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말이지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호경윤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엔날레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분량5,215자 / 1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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