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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건축이 판치는 세상에 나누고 늘리는 ‘채 나눔’

이일훈 × 정귀원

건축가 이일훈은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근간으로 하는 ‘채 나눔’1 을 주장하며, <가가불이>, <소행주> 등의 주거 건축, <도피안사 향적당>, <자비의 침묵 수도원>, <하늘 담은 성당>,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의 종교 건축, <문학과 지성사>, <청년사>, <세계사> 등의 출판사 사옥, <기찻길옆 공부방>, <민들레 희망지원센터>, <부평 노동자 인성센터>,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등의 착한 건축을 작업해 왔다. 얼마 전 그는 주택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의 건축주와 주고받은 이메일로 책을 엮어냈다. 새삼 ‘소통’의 중요성과 ‘일상’의 가치를 일깨우고, 건축 작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이 책을 빌미삼아 2012년 겨울의 문턱, 글맛과 입담 좋기로 소문난 그를 만났다. 


이일훈 바깥에서 지내는 곳을 다채롭게 만들고, 공간을 큰 덩어리로 만들기보다 쪼개고 나누어 늘리면, 사람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채 나눔’ 건축론을 편다. 설계뿐만 아니라 글쓰기로도 활발한 그는 일간지에 매주 칼럼을 쓰고 있으며, 단행본으로 환경산문집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뒷산이 하하하』, 건축백서 『불편을 위하여』, 건축산문집 『모형 속을 걷다』를 펴냈다. 

인터뷰 정귀원 『와이드 AR』 편집장


‘밖에 살기’를 보여주는 <잔서완석루> (2005~2007)의 마당과 툇마루 / 사진: 진효숙

정귀원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 화제입니다. 처음부터 책을 염두에 두고 기록 작업을 하신 건가요?

이일훈  그건 아니에요. 2년 전부터 집주인인 송승훈 선생이 진효숙 사진가에게 부탁하여 집을 기록하기 시작했죠. 송 선생은 집을 기록하는 것이 건축가에게 큰 선물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너무나 고맙죠.

정귀원  책에서 사계절을 담은 <잔서완석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유겠네요.

이일훈  단, 집을 온전히 담기 위해 송 선생은 사진가에게 하룻밤이라도 그 집에서 꼭 자 봐야 한다는 걸 전제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보지 않고 어떻게 집을 기록할 수 있느냐는 거죠.

정귀원  책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이일훈  책과 관련해서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중고등학교 혹은 소통과 연관 있는 연구소나 단체에서요. 저는 그게 무지 반갑습니다. 내일도 한 고등학교에서 송 선생과 함께하는 북토크쇼가 있어요.

정귀원  두 저자의 토크쇼라…. 책 내용만큼 재미있고 따뜻한 시간일 것 같은데요?

이일훈  집을 함께 지었으니 송 선생과는 잘 맞을 수밖에 없어요. 강연 내용을 미리 의논할 필요도 없고요. 있는 대로 얘기하면 되니까.

정귀원  집 짓는 과정에서 건축가와 건축주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간추려 엮었습니다.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부터 집을 지을 때 살펴야 하는 것들까지, 진솔한 이야기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데요, 특히 첫 물음 “어떤 집을 꿈꾸고 있는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가 참으로 유별납니다.

이일훈  저는 집을 지을 때 살기의 방식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짓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거지요. 책이 나온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에 송 선생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정귀원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건축주와 대화를 한 적이 있나요?

이일훈  이메일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요. 사실 이메일에 매우 서툴러요. 미팅이나 전화 통화 등으로 의뢰인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설계를 할 때 건축 용도와 상관없이 의뢰인과의 소통을 원칙적으로 합니다. 거의 이해가 됐다 싶을 때까지 소통합니다. 그래서 의뢰인의 생각이 바뀔 것 같으면 연필을 잡지 않습니다. 또 제 아이디어를 권하지도 않고요. 건축주의 확신이 없으면 그림은 언제든 바뀌게 될 테니까요. 혹자는 그러다가 일감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걸 겁내서 아무렇게나 설계하는 건 더 안 되는 거죠. 젊었을 때는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여도 봤는데, 결과가 좋지 않더라고요. 저는 나쁜 건축이 세상에 활개를 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소통의 부재라고 봐요.

정귀원  어떤 건축가든 기본적으로 건축주와 소통하지 않나요?

이일훈  소통의 ‘결과’가 중요하겠죠. 결과가 없으면 소통이 아니에요.

정귀원  소통의 과정에서 건축가로서 자신만의 건축 언어를 건축주에게 은연중 내비치게 되지는 않습니까?

이일훈  전혀요. 저는 건축주에게 건축가의 설계 작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기능이나 건축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 혹은 작용, 그리고 그것이 사는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제 생각을 전달하지요. 그런데, <잔서완석루> 의 송 선생은 이미 『모형 속을 걷다』를 읽고 저에 대해 알고 오셨어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을 제가 알게 됐고, “바람이 잘 통하려면 채를 나눠야 한다, 반갑다” 그랬더니 또 건축주는 “내가 반갑다”, 그런 식으로 얘기가 잘 풀린 경우죠. 아마 앞으로도 그와 같은 건축주를 만나기는 어려울 듯해요.

정귀원  개인 주택은 물론 수도원, 성당 등의 종교 건축이나 출판사 사옥 등의 작업을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주목했던 선생님의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건축주와의 관계가 긴밀했던 것 같아요. 혹시 얘기가 잘 통하는 특별한 건축주들만 만나신 것은 아닌가요?

이일훈  보통의 의뢰인들이었어요. 보통의 의뢰인이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특별한 분이 된 거죠. ‘집을 짓기 위해서는 건축주의 의견을 정확히 줘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송 선생도 처음에는 물리적인 대답을 많이 하셨어요. 그것 말고,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있지 않나”, “살던 집이 있었지 않나” 하고 물었고, 그런 물음에 예민한 분이니까 금방 감을 잡은 거고, 그 다음에 정리가 쭉 된 거죠.

<자비의 침묵 수도원>, 경기도 화성 / 사진: 진효숙

정귀원  불통은 한 번도 없었나요?

이일훈  왜 없겠어요. 늘 좋기만 한 것은 위선이죠. 소통은 불통 과정을 포함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다만 저 분이 모르시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조곤조곤 설명을 하면 그런 문제는 금방 해결이 되고요.

정귀원  솔직히 건축가로서의 욕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이일훈  제 건축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가 왜 없겠습니까. 대학 은사인 박학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100가지 중 한 가지에 건축가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99가지를 다 잃을 수 있다.” 건축가로 성장하려면 이 말을 꼭 기억하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런데 젊었을 때는 선생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고요. 10가지, 50가지 다 내 맘대로 하고 싶었죠. 하지만 나이가 드니까 정말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99가지를 양보하더라도 한 가지를 통해서 정신을 구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의뢰 받은 일에 먼저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먼저 그려 놓은 그림이 나를 구현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정귀원  그러면 어느 단계에서 그림을 그리세요?

이일훈  전 우선 두 가지를 보는데, 첫째가 의뢰인이 갖고 있는 생각이 확고한가, 그에게 의사소통으로 이해된 것을 실천할 의지가 확고하게 있는가 입니다. 그것이 확인돼야 그림을 그리고 구상에 몰두하지요. 둘째는 건축주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세상에 유익한가 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 운동가의 자질을 건축주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요. 건축가 몰래 불법으로 건물을 증축한다든지, 겉으로는 명분이 근사하지만 치졸한 잡꾀를 부린다든지. 뭐, 그런 걸 많이 목격하거든요.

정귀원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이일훈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죠. 하지만 소통을 이룬 후에는 일사천리에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거죠.

정귀원  조금 다른 이야긴데요, 요즘 동네 건축가, 일상의 건축 등을 내세워 잠재적 건축주인 일반 대중과 소통하려는 시도들이 더러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일훈  동네 건축이 따로 있고 도시 건축이 따로 있나요? 건축의 본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도시 건축, 동네 건축, 나라 건축, 다 잘하겠죠. 그런데, 이 세상은 말 만들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주 나쁘게 얘기하면, 일로 연결하기 위해 말로 포장하는 행위 자체는 건축의 본령으로 비춰볼 때 바람직하지 않아요. 마치 새로 발견한 것처럼! 그건 웃기는 일이죠. 일상의 건축이란 것도, 건축에서 일상성 또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위대함이 안 보이니까 안타까운 마음에서 자꾸만 일상 이야기를 하는 거겠죠. 그런데, 건축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것 아닌가요? 아무리 특별한 기념관이라고 하더라도 늘 일상적으로 쓰입니다. 건축이야말로 일상의 가치를 온전히, 늘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안 보인다는 것은 흡사 리얼리즘을 앞세우면서 리얼리티가 없는 예술과 똑같은 거예요. 이건 건축인들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박성태(동석자)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2013 정림학생건축상>의 주제 ‘일상의 건축: 삶과 공간의 회복을 위한 건축’은 우리가 반성을 해 보자는 의미가 깔려 있어요. 사실 대형 사무소에서는 클라이언트를 한 번도 만나 보지 않은 상태에서, 심지어 건축주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프로젝트를 할당받은 팀장이 설계를 진행한다고도 해요.

이일훈  일상의 의미를 존중하는 뜻에서 보면 그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냉소적인 분석을 해보면, 그들은 클라이언트를 늘 만나고 있지요. 자본이라고 하는 클라이언트를! 아무튼 건축은 빨리 일상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데, 인구가 준다는 것은 건설량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양질의 건축이 귀해집니다. 이젠 사고방식을,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해요. 건축의 본령인 일상성, 일상의 발견이 그것에 좋은 단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귀원  요즘 건축판에서 뵙기가 힘듭니다. 건축 작업은 여전히 하고 계신 거지요?

이일훈  물론이죠. 건축은 내게 신앙과도 같아요. 하지만 건축판은 재미가 없어요. 어쩌다 접하는 건축 소식들도 흥미를 자극하지 않고,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게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정귀원  건축판이 왜 재미가 없나요?

이일훈  건축판 이야기가 여전히 자기 위안용이죠. 이 나이에 자위하러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더구나 이야기들이 나를 감동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폐하게 하더란 말이지요. 그게 싫은 겁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건축가들의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건축가들의 제안이나 제언 중에 별로 귀담아들을 게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해요. 이를테면 환경에 별로 유익하지도 않은데 유익하다고 그러잖아요? 요즘은 전문가 뺨치는 일반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음악 평론가와 미술 평론가를 뺨치는 음악, 미술 애호가가 많은 것처럼, 건축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많을 거라고요. 그들이 볼 때 신통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거죠.

정귀원  그래도 건축 바깥에서의 활동은 열의를 갖고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경향신문»에 칼럼도 여전히 쓰시고 있고요.

이일훈  네. 요란한 사회적 성취는 없지만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들입니다. «경향신문»에는 ‘사물과 사람 사이’라는 타이틀로 제 이름이 걸린 란인데, 일주일에 한 번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바빠요. 칼럼니스트가 아닌 데다가 또 제 일도 해야 하고, 글과 사진을 함께 게재하는 란이어서 더 바쁘지요. 하지만 즐거운 일입니다. 사물을 관찰하면서, 보이지 않는 독자들과 내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도 많이 배우고 있고요.

정귀원  글을 쓰고 강연으로 대중들과 만나고, 또 건축주와 긴밀하게 소통하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가 선생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양도 양이지만 다양한 종류의 책에 놀랐습니다. 독특한 사전 같은 것도 눈에 띄었고요.

이일훈  개인적으로 지도와 사전에 관심이 많아요. 저는 건축이란 게 ‘새로 그리는 지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도시를 만들었던 황제는 땅 위에 새로운 지도를 그린 사람이지요. 근대 건축가들도 도시를 그렸고요. 새로운 근대의 지도죠. 현대의 건축가들은 건물이라고 하는 파편화된 흔적에 몰두하지만, 하나의 점이 잘 그려지면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물리적 지도가 되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지도가 세상을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에 관심이 있어요. 이를테면 고古지도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고지도에 나타난 세상에 관심이 있는 거죠. 지도를 통해서 보이는 세상을 공부하고 싶은 겁니다.

또, ‘사전이란 죽은 지식의 창고다’라는 정의가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나는 죽은 지식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혼자 어찌나 창피하던지.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지도책과 총람 류의 책을 좌우에 두고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게 나오면 재빨리 찾아보는 거죠. 찾아보는 지식이기 때문에 죽은 지식이라고 말하는 거고요. 그처럼 저도 더 빨리 알기 위해서 사전을 보는데, 모든 사전을 다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사전이 아니면 그렇게 빠르게 많은 걸 파악하기 어려운 분야에만 한정해요.

정귀원  이를 테면, 꽃말 사전 같은 거지요? 아무튼 건축가들은 공부를 많이 해야겠어요.

이일훈  건축가들은 기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합니다. 다만 어떻게 써먹느냐가 문제겠지요.

정귀원  건축 일이 적을 때는 그만큼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아지겠죠?

이일훈  그건 상관없어요. 저는 일이 많을 때도 읽고 쓰는 시간은 똑같아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일 없어서 책 내는 사람들이에요. 일이 있거나 말거나 읽고 쓰는 일은 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안 하면 저는 좀 답답하거든요.

정귀원  1990년대 초부터 설계 방법론으로 ‘채 나눔’을 주장하셨습니다. 여전히 선생님 건축에서 유효한 개념이겠지요?

이일훈  한 20년 동안 계속 떠드는 데도 아직 국어사전에 올라가 있지 않아요. 지금도 하는 얘기들이고 멈출 수 없는 얘기들이죠. 학교나 공동체, 시민 문화 강좌 등에서 강연 요청이 종종 있기도 하고요.

정귀원  워낙 오래전부터 설파해 오신 거라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아무리 들어도 넘치지 않는 얘기니만큼 다시 한 번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일훈  ‘채 나눔’은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근간으로 합니다. 불편하게 살기는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에요. 맹목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을 반성하고 싶어서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근원적인 인간의 의식을 건드리는 문제예요. 사람이 불편하게 살면 환경 문제가 일단 없어지고 인간이 건강해집니다. 근본적으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것은 실내에서 편하게 살고자 한 데서 오고, 폐수 문제는 빨래를 편하게 하려는 데서 발생하죠. 빨래를 불편하게 하면, 빨래하는 나는 힘들지만 환경은 깨끗해집니다. ‘밖에 살기’는 공간의 사용 방식에 대한 질문이에요. 내부 지향적 공간 사용의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거죠. 전통 건축의 특징은 내부 공간이 아닌 마당과 마루 중심의 외부 공간에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내부로 들어와 있죠. 외부를 중요하게 보자는 건 인간의 삶에서 자연을 회복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이일훈  마지막으로 ‘늘려 살기’는 시간에 대한 겁니다. 짧은 동선이 합리적이라는 근대 건축의 슬로건에 반대하는 거죠. 최단거리에 위치해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식 건물의 구조를 거부하고, 좀 불편하더라도 좁은 집일수록 이동 거리를 길게 하여 움직이는 시간을 늘려 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는 모습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집요하게 분석을 해서 얻은 이 세 가지 방식은 결국 인간, 공간, 시간이라는 건축의 중요한 명제와 맞물려 있어요.

정귀원  인간, 공간, 시간의 ‘3간’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세 가지 명제라고 하죠. 종교와 철학 역시 이 명제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요. 그렇다면 ‘채 나눔’은 건축 설계 방법론을 넘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일훈  네. 미래의 우리 삶을 위해 그렇게 살자는 거지요. 저는 그것을 사람이 회복해야 할 가치라고 보는 겁니다. 건축만의 가치라고 보지 말자고요.

나쁜 건축이 판치는 세상에 나누고 늘리는 ‘채 나눔’

분량7,896자 / 16분 / 도판 4장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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