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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에게 저작권이란

황두진

한국 건축계의 저작권 사수에 대한 입장은 항상 미지근했다.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말하는데, 우리 건축은 그 지점을 피해왔다. 건축가 황두진은 한국 건축의 건강한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저작권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작권 개념을 확립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제도적 보호를 요구하는 것과, 저작물을 세상과 널리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은 완벽하게 상보적이다.” 황두진건축사사무소가 제니텀과의 협업으로 개발한 건축 전문 증강현실 어플리케이션 ‘건축산책Architecture Walks’을 북촌에 위치한 <무무헌> 앞에서 실행하는 모습. / 사진: 정림건축문화재단

에피소드

몇 년 전의 일이다. 서울시건축상에 응모하려고 요강을 보니 “응모하여 수상하면 저작권은 서울시에 귀속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시청에 전화를 걸어 서울시의 공식입장인지 물었다. 담당 공무원은 수상하게 되었을 때 각종 홍보나 전시, 출판 등의 일에 동의를 구하는 절차의 간소화라고 설명했다. 그런 내용이라면 ‘제출한 자료에 대하여 각종 홍보, 전시, 출판 등에 대한 사전 동의를 구한 것으로 한다’ 정도의 문구로 충분하지 않을까? 저작권은 이런 경우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물론 나 말고도 다른 분들의 항의가 있었을 것이므로 적어도 서울시건축상과 관련해서 이후 이러한 구절은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저작권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는 문서로서의 효력을 갖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그 문구가 살아있을 시절에 수상한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은 과연 지금 누구의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것이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문제와 관련, 공정거래위원회가 2009년 건축설계경기에서 입상작의 저작권이 설계자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위배한 국가기관 및 지자체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상황이 분명히 점차로 개선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건축설계 의뢰를 마치 물품구매 정도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기 불과 3일 전에도 이런 신문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외국은 설계가 당선되더라도 저작권은 설계사가 가져가지만, 우리나라는 저작권이 발주청으로 귀속된다. 이 때문에 용산공원사업 당시에도 국토해양부와 WEST8이 마찰을 빚었다.” (《건설경제신문》, “초대형 건축프로젝트 설계, 외국업계 독식 문제는”, 2012. 10. 30일자) 한편 인접 분야로서 디자인 관련 저작권 이슈는 더욱 복잡하다. 디자인 공모전이 알고 보니 자체의 디자인 개발 노력 없이 적은 비용으로 타인의 디자인을 소유, 활용하려는 얕은 속셈의 산물로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안타까운 것은 불법 소프트웨어나 음원, 도서 등의 저작권 보호는 사법기관인 검사의 영장까지 동원하며 앞장서서 보호해주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독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의 저작권 보호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지식문화산업을 중요한 미래 전략으로 삼고 있는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저작권 침해는 물론, 이를 방조하는 행위 또한 미래의 비전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역사의 이면

몇 년 전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집합주거 단지Weissenhofsiedlung를 찾아갔을 때 흥미로운 것을 보았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주택을 복원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트레이드마크인 수평창의 특허를 받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에 대한 내용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한편 그와 동시대인인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는 건축가로서는 궁핍했으나 가구 디자인의 로열티 수입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는 이야기를 미스의 제자인 김종성 교수로부터 들은 바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유감스럽게도 건축사책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근대건축의 거장들은 알고 보니 제도판에서만 치열히 작업한 것이 아니었다. 뒤로 돌아서서는 자기들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또 치열하게 싸웠다. 근대건축의 역사는 저작권 전쟁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이었으면 두 가지 모두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사회 전체가 저작권 문제에 그리 민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약 누군가 가구 디자인을 했다고 해도 생산자가 그냥 적당히 변형해서 모조품을 만들거나, 설사 대가를 지불한다고 해도 장기적 로열티보다는 한 번에 모든 권리를 다 사들이는 소위 매절 계약을 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결코 ‘누적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왜 저작권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창작인인 건축가의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 건축이 세상에 좀 더 풍성하게 기여할 수 있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건축계에는 물리적으로 건물을 짓는 것 못지않게 지어진 건물을 가지고 각종 다양한 2차, 3차 저작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확산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의 건축가들은 오직 건축물을 통해서만 사회에 기여했으나 앞으로는 전통적인 도서출판은 물론이고 각종 게임, 장난감, 스마트폰 앱 등 무궁무진한 파생상품을 생산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으로는 ‘건축가의 고객=건축주=민간과 공공의 대규모 자본가’라는 해묵은 등식에서 벗어나 건축가가 특정 계층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와 재화의 종류가 급격히 증가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작권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으며 또 어떤 역할을 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이 설계한 공공과 민간의 건물들이 등장하는 3차원 증강현실 도시 안내 프로그램의 개발 주체는 과연 누구여야 하는가?

카피레프트, 오픈소스, CCL (Creative Commons License 1)

정보통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위의 세 단어와 아주 친숙할 것이다. 부분적인 의미는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창작물의 저작권을 너무 좁게 제한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절한 방식과 과정을 통해 서로 공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상이 더욱 다양해질 것이라는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저작권을 사수하고자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작권 개념을 확립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제도적 보호를 요구하는 것과 저작물을 세상과 널리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은 완벽하게 상보적이다. 그 중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다른 것도 성립하기 어렵다. 게다가 건축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카피레프트, 오픈소스,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센스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분야가 아닌가. 팔라디오 Andrea Palladio가 있었기 때문에 이니고 존스 Inigo Jones가 있었고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있었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아니었더라면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 나 렘 쿨하스Rem Koolhaas도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문화는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만들어져 온 것이다. 다만 21세기 대한민국 건축계는 한쪽 바퀴가 워낙 부실하여 이를 대폭 보강하지 않으면 나머지 바퀴도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마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각각의 후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건축계, 아니 나아가 문화계의 이름으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런 광경을 상상한다. 후보가 뒤에 서고 그 앞에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소프트웨어, 게임, 영화, 연극, 무용, 사진 등 다양한 창작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나란히 선다. 그들이 한 구절씩 읽어나간다.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앞으로 이 학생들이 만들어낼 수많은 창작물들의 정당한 권리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호해 주겠노라고.

저작권을 사수하자, 그래야 건축이, 문화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해진다.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건축가에게 저작권이란

분량3,980자 / 8분

발행일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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