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예술의 프로메테우스인가 시간의 예언자인가
정용도
분량5,679자 / 1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유형비평
최근 백남준아트센터와 소마미술관에서는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고,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능동적 주체로 만든 백남준의 작업이 오늘날과 미래의 미디어 환경에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는지, 문화의 패러다임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
미래의 낙관적 신화로서 기술매체 그리고 백남준
일반적으로 예술은 종교적인 신화, 정치적인 사건과 같은 위대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예술작품이 인간 정신의 지고한 이상과 그에 관련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표현의 중심에 두고 있고, 그런 과정에서 확산된 문화적 보편성이 예술을 우리 삶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로 은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술의 역사는 인간의 정신적 진보상황들을 표현해 왔다. 그리고 그에 따른 문화의 결과적 양태들은 역사의 발전이라는 테제 속에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신화를 생산하고 있다. 백남준의 예술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가 자신의 예술을 삶에 대한 희망으로 채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미술사(주로 서양 미술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일제 식민통치기의 문화 불모지인 한국에서 태어나 서양 문화의 중심으로 들어간 백남준은 상당히 특별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관심을 기울여볼 만한 예술가이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한국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써는 매우 보기 드문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당시 첨단의 매체인 비디오를 가지고 서양 미술의 본류로 들어갔고, 서양 중심의 세계 미술사에서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백남준은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쇤베르크 이후의 현대 음악을 비디오를 통해 시각적 서사로 풀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초기 활동인 플럭서스FLUXS에서 여타 미술의 새로운 장르들이 탄생할 때 그렇듯이 기존의 예술적 범주를 부정하는 파괴의 퍼포먼스가 존재한다. 그런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을 비롯한 플럭서스 멤버들은 악기를 부수고 괴성을 지르거나 혹은 비예술적인 재료들을 가지고 그들 예술의 감수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그들의 활동은 사진과 비디오나 필름에 담겼고, 백남준은 한발 더 나아가 그런 기록 이미지들의 예술적 활용성을 확대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흡수한다. 그러나 1930~4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들의 개념적 의도와 내용들을 간접적으로 영화를 이용해 표현했던 것과는 달리, 백남준은 TV와 비디오 이미지를 직접적인 예술의 매체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TV를 위한 선禪 Zen for TV>(1963)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수평으로 된 하나의 선만이 보이는 TV 화면을 통해 미래 사회에서는 TV가 인간 정신생활의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감각적 확장으로서 기술매체와 예술에의 적용
TV를 정보의 전달과 수용이라는 수동적인 매체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적 표현의 주체로서 그리고 인간적 활용의 대상으로 이해 가능했던 것은 백남준의 ‘기술낙관주의’ 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1974년 록펠러 재단에 제출한 기금신청 제안서에서 언급한 “전자 고속도로 Electronic Super Highway” 개념이다.1

여기서 언급된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복지에 기여할 것” 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술을 헤겔이 말하는 ‘지양Aufheben’ 의 개념처럼 부정과 긍정의 희망을 동시에 함의하는 진보의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테제가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이자 내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백남준의 초기 작품에는 TV와 같은 기술매체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 다시 말해 기존의 미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간적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의 경계에 서 있는 작품은 <TV부다 TV-Buddha>(1974)이다. 이 작품은 <TV를 위한 선禪>과 마찬가지로 구성이 단순하다.
TV를 바라보는 실제 부처상과 TV 뒤의 카메라를 통해 TV 안에 비추어지는 부처상 자신의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 작품에서 주체와 대상, 아我와 타他, 나와 타자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 케이지John Cage의 소음과 멜로디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관점과 유사한 의미의 대상으로서의 미술작품이 아니라 ‘참여의 근거’로서의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또 이것은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라는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의 비물리적인 이미지와 현실 속 인간이 삶의 총체성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세계, 즉 가상현실을 통해 가능해지는 감각적 현실이 포함되는 세계로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는 공간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성격에 따르는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공간의 지형학이 이미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리하여 공간의 지형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 생겨나고, 어떤 것들은 시간의 지리학 (시간을 현실적 개별 상황으로 개념화시키는)을 통해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간의 지리학을 적절하게 대변해주는 개념은 ‘속도’일 것이다. 빛보다 빠른 속도라는 개념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기인한 것이지만, 어쨌든 빛의 속도는 우리 생각의 속도 혹은 상상력의 전개 속도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논리적인 추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 혹은 계산기계라고 불리는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컴퓨터의 진화과정이 그래 왔듯이 초기 컴퓨터에서는 계산의 과정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처리장치 CPU 기술의 발전으로 논리적인 연산과 추론의 과정은 사라지고 소위 ‘아이콘’이라는 그림들이 컴퓨터 작업의 중심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추론의 과정이 이미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적 반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진보가 삶과의 유사성이라는 방향을 지향해 왔고, 현실을 모방해온 기존의 미술과는 달리 백남준으로부터 시작된 미디어 아트는 인간 자체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진보 과정에서 가능해진 감각적 확장의 기술적 요소들이 예술작품의 창조에 적용되면서 기존의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과 형식이 탄생하게 된다. 백남준 이전의 영화를 포함한 회화, 조각 등의 전통매체 예술 장르들은 관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해야만 하는 관조의 공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백남준 이후의 미디어 작품은 한 곳에서 텍스트를 읽어나가듯이 감상하기보다는 이미지의 콜라주를 통해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백남준이 예견했듯이 기술매체들이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캔버스가 되면서 가능해졌다.
백남준은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자연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헤겔Hegel은 『정신현상학Phenomenology of Mind』(1807)에서, 진리를 경험하는 가운데 진리의 개념이 사라지므로 지속적인 부정의 변증법적 사유 과정을 통해 ‘절대지the absolute knowledge’ 에 다다르고자 했다. 헤겔과 백남준의 공통점은 그들 각자의 예술과 철학을 시간의 지속성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에서는 시간성 자체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재정의 되어야만 한다. 아날로그 동영상 기록과 디지털 동영상 기록이 이미지의 활용성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시간적 선후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날로그의 한계를 <비디오 신시사이저Video Synthesizer>(1969) 를 통해 극복했다. 그는 신시사이저를 가지고 이미지를 분할하고, 합성하고, 왜곡시키면서 이곳과 저곳,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시공간의 콜라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예술의 가치를 넘어 진보적인 삶을 위한 비전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 작품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촬영한 동영상 이미지를 콜라주처럼 합성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이것은 공간적인 동시성을 극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삶의 편재성ubiquity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나와 타자의 구별 없음이 삶의 일반성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고, 그런 삶 안에서 제1세계 중심적인 근대주의적 가치의 우월성의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한 화면에 공존함으로 인해 시간의 불가역성이 예술적 상상력과 삶의 사건들로 구성되는 시간의 지리학, 말하자면 탈역사적 현실성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디오 이미지에서 시간은 존재의 한계가 아니라, 기억의 보편적 현재성을 보증하는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의 지리학’의 현실적 이미지는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1973)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과 함께 한 퍼포먼스를 비롯해 자신의 예술가 친구들의 공연 장면을 편집해 넣었다. 그리고 기록영화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이미지가 아닌 왜곡과 색의 유희가 가득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고급예술계의 인물들을 대중적인 광고와 대비시켜 대중문화와 고급예술의 구별을 없애고, 현대 사회의 이미지적 평등성, 현대 사회의 광고 이미지와 포스트모던한 삶의 유사성을 제시함으로써 비디오 아트가 가질 수 있는 직관적인 보편 예술 형식으로서의 존재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1984년 1월 1일 뉴욕과 파리를 연결한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1984)에서 백남준은 <글로벌 그루브>와 마찬가지 이미지 형식을 가지고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존 케이지,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등의 세계 여러 예술가들을 위성을 매개로 하나의 정신으로 종합시켰다. 그것은 기술을 통해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내용의 미학적 차원들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984년 도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에서 백남준은 위성 기술의 발전 방향성에 관해 “위성으로 강한 자의 자유를 증대시키는 것은 나약한 문화를 보호하고 여러 문화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2
이런 그의 주장은 실제로 현재 인터넷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건들이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달되고,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는 인터넷의 혜택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의 모든 작품은 개인의 예술적 생산물이 아니라 보편 가치를 지닌 문화의 상징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기존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으로 완전히 변화시킨 인물이었다. 또한 문화의 다양한 발현이 예술의 가치를 넘어 진보적인 삶의 문화를 향해 항해할 수 있게 만든 비전을 제시한 예술가였다. 그가 활동했던 반세기 동안 세계는 기술과 문화 모두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자신의 문화가 아니라 그동안 타자라고 생각되어 왔던 변방의 문화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화 상황이 진리를 부정하는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본질적인 정신을 지향하는 이성의 단계로 다가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백남준에게 문화는 예술이라는 부정의 매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변화 속에서 사유하는 정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정용도
미술비평가
백남준, 예술의 프로메테우스인가 시간의 예언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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