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가 있는 곳에 디자인도 있다
김황 × 안지용
분량12,642자 / 25분 / 도판 8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유형대담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주어진 조건이나 문제해결 모색이 곧 프로젝트의 시작이며, 논리적이고 감각적인 사유는 디자인의 기반이 된다. 디자인의 의미와 경계가 모호해지는 가운데 동시대 디자인의 정의를 생각해보기 위해 디자이너 김황과 건축가 안지용을 페이스북의 비공개그룹에 초대했다. 본질적 대화가 오갈수록, 디자인과 건축이 갖는 미학적·사회적 과제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갔다.
김황 200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금속조형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주)안그라픽스에서 일했다. 그후 2007년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제품 디자인과(Design Products)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RCA의 제품 디자인과, 플랫폼 13(Platform 13)에서 공부하며, 던 앤 라비Dunne & Raby, 트로이카Troika, 옹카 쿨라Onkar Kular 등의 중견 비평적 디자이너들과 디자인 철학의 공통점을 발견하였으며 비평적 디자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필립스에서 시니어 UX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안지용 2009년 뉴욕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매니페스토 건축Manifesto Architecture의 대표. 그의 디자인은 독특하고 혁신적인 콘셉트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일상의 재료와 조건으로부터 뛰어난 가치를 지닌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건축의 범위를 ‘건물’에 국한하지 않고 삶과 공간을 연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그의 프로젝트는 숟가락에서부터 가구, 인테리어, 구조, 건물, 도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현재 뉴욕, 로스앤젤레스, 런던, 서울, 심천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디자인의 개념과 경계의 확장
김황 디자인은 기능과 형태의 조화를 추구하는 행위이며, 주어진 조건과 문제해결을 위한 고유의 프로세스를 따릅니다. 하지만 현대의 디자인은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구분을 ‘기능’에 두었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원칙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대 디자이너들은 실용성과 관조의 이상적 통합을 실험하고 미학과 기능, 삶과 미술의 자의적 구분과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합니다. 심지어 산업 문명 논리의 본령에 도전하며 우리 삶의 환경에 다른 각도로 주목합니다. 고유의 내적 논리를 교묘하게 위반하며 상품 미학에 도전하고 소비 메커니즘을 전환시킬 수 있는 이색 아이디어와 시스템을 고안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제 미술, 디자인, 건축의 협업 및 통합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 최근의 전 인류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물질문명과 깊은 연관을 가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바우하우스 운동을 통해 디자인은 의도적으로 공예와 결별함으로써 (물론 아직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공예와 디자인을 한 맥락으로 연결하려는 노력들이 있지만) 디자인의 개념은 손보다는 기계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이별로 하여금 우리는 아직도 디자인을 진행하며 그리는 행위(기계가 만들 수 있도록)와 만드는 행위(사람의 손으로 제작하는), 생각하는 행위 등에서 명확하지 않은 경계를 경험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건축은 어떻게 전통을 유지하며 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시기를 건너왔는지 안지용 대표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안지용 역사가 담긴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디자이너의 창의성에 초점을 두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은 디자인 제품이 순수미술과 함께 미술관, 박물관 등에 전시되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차이점은 ‘문제해결’의 여부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순수미술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능’을 가진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들도 ‘디자인’ 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디자인의 범위를 순수미술과 대립점을 찾으면서 확인하기보다는 ‘디자인은 디자인이다’ 할 수 있는 거죠.
건축의 경우는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디자인과는 또 다른 영역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능적 측면, 즉, 비를 막기 위해, 추위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만든 보호장비 가운데 고정된 것이 건축이 되었다고 한다면, 건축이 디자인이라는 것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바퀴를 둥글게 만들고, 부엌의 아궁이와 온돌을 연결시키는 ‘디자인 행위’를 인류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부싯돌을 만드는 것은 디자인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관하고 다시 사용하면 좋을지 고민한 것은 디자인적 사고입니다. 그에 해당하는 어휘만 없었을 뿐,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이 특별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디자인의 원리를 공유함에도, 건축이 기본적으로 산업 · 공업 · 시각디자인과 다른 점은 ‘일회성’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뿌리를 내리고 머물러야 하는 기능을 가졌던 건축은 수시로 변화하기 힘든 인간의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건축은 ‘특정 클라이언트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14세기 이후 등장한 개인 주거를 위한 건축행위는 물론이고 공공건축 역시 사용자가 거주하는 곳의 지역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디자인 분야가 보편성mass production을 띤 것과는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도 장인정신(지역성, 공예)과 결별하면서 ’20세기 모더니즘과 인터내셔널리즘’ 이라는 보편화된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역성을 무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일회성’의 원칙은 건축가는 물론, 건축주와 시공자, 21세기 일반적인 건축 계약서에도 명시하여, 하나의 건축이 다른 하나의 건축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건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성으로 그 시장을 넓히고, 동시에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황 ‘순수 미술은 문제를 제기하고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오래전부터 ‘디자인 행위’는 존재해왔습니다. 특히 둥근 바퀴나 아궁이-온돌은 ‘발명으로서의 디자인’, 즉 특정 문제해결을 위해 특정 기능을 가진 물체나 시스템을 창조하는 맥락에서의 디자인입니다. 한편, 문제해결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기능에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디자인 행위도 있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후자의 디자인 행위를 하고 있는데, ‘스타일링 디자이너’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후자의 현실적인 디자인의 경우 ‘기능’이나 ‘문제해결’로 디자인과 순수예술을 구분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경우 이윤창출, 대량생산manufacturing, 산업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그 경계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산업에 깊이 연결된 예술가도 있고, 극히 개인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디자이너들의 경우는 제외합니다.)
70년대 널리 유행했던 이탈리아의 급진적 디자인 Italian Radical Design, 90년대의 개념적 디자인 Conceptual Design 그리고 최근 언급되고 있는 비평적 디자인Critical Design 1은 디자인 중 가장 순수 미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디자인들은 기능도, 문제해결 목적도, 산업과의 연결점도 없지만, 디자인 범주에 위치합니다. 안토니 던Anthony Dunne의 『헤르츠 이야기 Hertzian Tales』(1999)에 의하면 디자인과 순수 예술을 구분하는 잣대로 “일상에 귀 기울임”을 듭니다. 즉 순수예술은 자기 자신의 성찰에서 시작하여 아름다움의 본질에 접근하는 행위라면, 디자인은 외부에서 시작하여 본질적인 미에 접근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이는 마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와도 흡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순수미술에도 행동주의적 예술Art Activism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시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공예와 디자인의 경계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한정판Limited Edition을 만드는 디자이너를 제외하고 (최근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한정품 디자인 장르가 개척되어 프로토타입을 판매합니다) 디자이너는 완성된 제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대학에서도 졸업전시회를 위한 프로토타입 제작을 끝으로 교육과정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공예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용 / 판매 가능한 완제품을 제작합니다.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손을 이용해 마무리하는 섬세한 책임감은 공예가의 기본 정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을 디자이너이자 메이커 Maker라고 부르는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디자인은 발견, 생각, 콘셉트의 창조에서부터 그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까지 넓게 정의할 수 있지만 좁게 정의한다면 위와 같은 논리로 공예와 디자인을 구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는 설계, 시공, 감리 등이 더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 책임의 범위도 규정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그 경계에서 표류하는 예가 있을까요?

안지용 예술의 범위는 사실 광범위해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것이 예술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고, 나아가 인간의 기술이나 삶 자체도 어떠한 관점에서는 예술로 담을 수 있어서 그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 경우도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미적 가치의 흐름이 생기면서, 건축가 스스로 ‘작가’라는 의식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축주를 위한 건물이 아닌 건축가 자신을 위한 건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최근 이야기를 나눈 한 건축주의 경우,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건축가가 건축주의 의견은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지 못해 계약을 파기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20세기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실현했습니다. 대표작 중 하나가 ‘빌라 사보아Villa Savoye'(1929)인데, 이 작품(?)은 그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만들어주기도 하였으나 그 이면을 보면, 르 코르뷔지에가 클라이언트의 끊임없는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건축관을 관철시킵니다. 그가 재판소에 오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벌어진 2차 세계대전으로 사보아 부부가 피난을 갔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사례를 접할수록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그들의 삶과 상관없는 디자인을 각오하게끔 만들고, 또한 건축가는 점차 건축주를 무시하고서라도 자아실현을 해야 거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디자인이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게 하는 이유가 되겠죠.
한두 사람이 직접 집을 세우는 작은 규모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규모가 큰 건축은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전문인이 등장해 구조, 전기, 배관은 물론 시공, 감리까지 책임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디자이너로서의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요즘 예민하게 다뤄지는 부분인데, 바로 ‘저작권’입니다. 대형 공사는 물론이고, 작은 집이라도 실제 짓기 시작하면 처음 계획 단계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수없이 나오면서 원 디자인과 100퍼센트 일치하게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예와 디자인의 불분명한 경계에서 갖게 되는 질문에서처럼, 건축 역시 1인의 아이디어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결과물임에도 저작권이 모두 최초 아이디어 제안자에게 귀속된다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행법상 건축가의 건축물에 대한 저작권이 설계도서와 모형으로 한계를 갖는 것은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시각 · 제품 · 광고 등의 디자인인 경우 저작권의 범위가 어디까지, 어떻게 보장되는지요? 기획, 설계, 제조, 유통, 판매까지 하는 애플을 보면 디자인 저작권에 관한 부분이 조금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이것을 가장 일반적인 사례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디자인과 저작권
김황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빌라 사보아’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럼 디자인에서의 저작권 문제를 언급하면서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관계를 함께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디자인 업계에서는 저작권에 의한 권리 보호는 아주 미미하며 저작권보다도 실용신안권과 의장권이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지적 창조물에 대한 공유는 인류 문명의 발현에 가장 큰 토대가 되는 명제 중 하나입니다. 문명의 기원부터 시작된 이 특질, 공유의 욕망은 이제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자리 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창작자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하여 단순 공유가 아니라 대가성 교환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 공유를 위해 창조된 결과물의 공유를 제한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순이 나타납니다.

경제학자 미쉘 볼드린Michele Boldrin과 데이빗 케이 레빈David K. Levine의 저서 『지적 독점에 대항하여Against Intellectual Monopoly』 (2008) 나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2 등은 너무 심하게 규제하는 지적재산권 제도를 비판하고, 음원의 불법다운로드 근절 운동은 느슨한 제도를 비판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입장과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지적 재산권 문제는 근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저작권이 실용신안, 의장등록 등 다른 권리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1886년 베른협약Bern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literary and artistic works에 의해 명시된 ‘무방식주의’일 것입니다. 사실 저작권은 예술이나 음악, 문학 등에 주로 쓰이는 권리이며 디자인에서는 윤리적인 관점을 제외하고는 크게 고려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디자인 피보호 대상은 주로 실용신안, 의장등록에 의해서만 보호됩니다. 만약 디자인이 이미 공개되어 버렸고, 그에 대해 누구도 등록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도 이 제품의 제조, 판매 혹은 배포 행위를 금지할 수 없습니다. 건축이 저작권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점, 저로서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문서의 하나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요?
안 대표님께서 애플의 경우는 기획, 설계, 제조, 유통, 판매까지 디자인 저작권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자인 저작권은 작은 부분이라도 디자인 창조행위가 있었다면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이것은 애플뿐만 아니라 디자인 업계에서 광범위하게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것이 도용되거나 변형되었을 때 안타깝지만 디자인 저작권으로는 재산권을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도덕성에 근거한 인격권은 보호를 받습니다.) 재산권을 보호받고자 원한다면 특허, 실용신안, 의장등록이 되어있어야만 하고 애플이 법적 소송을 하는 부분은 앞에 말씀드린 세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적 지적 재산권 문제를 떠나서 다시 저작권으로 돌아와 ‘저작권’과 클라이언트에 관해 포커스를 맞추어 보죠. 먼저 이 경우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인데, ‘디자이너(소규모 스튜디오, 프리랜서)-클라이언트’의 경우와 ‘인하우스 디자이너in house designer(기업에 속한 디자이너)-기업’의 관계가 있겠습니다. 전자의 경우 대부분 디자인 인격 저작권은 디자이너가 갖습니다. 예를 들어 알레산드로 맨디니Alessandro Mendini가 알레시Alessi사社를 위해 디자인한 와인오프너가 있죠. 디자인 재산 저작권의 경우 계약에 따라 디자인의 재산권을 전적으로 클라이언트에게 양도할 수도 있고 디자인 재산권을 디자이너가 요구해 로열티를 받는 예도 있습니다. 보통 이름이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들이 후자의 계약을 합니다.
많은 디자이너가 함께 일하는 ‘인하우스 디자이너- 기업’의 관계에서는 디자인을 창조해내는 업무구조상 디자이너가 인격/재산 저작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는 아이팟이 조나단 아이브Jonathan Ive의 작품으로 컬렉션되어 있는데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것으로 보통은 저작권이 회사에 귀속됩니다. 최근에는 기업이 기업에 속한 디자이너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하우스와 프리랜서라는 디자이너의 큰 두 개의 틀에 균열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작권이 기업에 귀속되는 후자의 경우에도 자신의 디자인을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넣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디자인 저작권은 윤리로서의 인격 저작권은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디자이너도 본인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가집니다. 하지만 재산으로서 디자인 저작권의 힘은 미미하여 디자이너가 직접 생산하거나 재산권을 보호하며 클라이언트와 계약하는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디자인은 클라이언트나 기업에 귀속됩니다.

사실 건축은 디자인의 개념정립과 이론, 트렌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특히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가구 디자인의 경우 모더니즘 건축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의자 디자인에 큰 획을 그은 상징적인 의자들 다수가 건축가의 손에서 탄생한 것만 보아도 논란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매니페스토 건축Manifesto Architecture 도 건축사무소이지만 <바이크 행어 Bike Hanger>, <보틀 스로틀Bottle Throttle> 같은 흥미로운 디자인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건축가는 무엇을 계기로 가구나 제품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나요? 그리고 어떤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건축과 디자인의 관계 그리고 경계에 대한 안 대표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건축 vs 디자인, 건축가의 생각
안지용 건축의 일부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부분은, 이것 또한 하나의 창작물로써 인정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은 사실 특허와는 조금 달라서, 등록을 하지 않아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이너들이 보다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회사를 처음 시작할 무렵 가졌던 의문은 디자인과 예술의 관계였습니다. 지금은 그 부분은 스스로 납득할만한 정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스스로도 디자인과 건축의 경계에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건축과 디자인은 제가 건축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다 그 관계를 모호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건축과 디자인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시간 순으로 ‘건축architecture’이라는 단어가 ‘디자인design’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므로 근본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특히 건축 쪽에서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디자인이 하는 일의 범위가 19, 20세기 산업화, 자본화에 집중되어 있던 과거와 달리, 21세기에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접근법부터 디자인적 방법론에 집중하여 거론되고 있습니다. 분명 19, 20세기 산업 · 공업 · 시각 · 공간디자인은 건축과 경계면이 겹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일정 디자인 분야와 건축의 경계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21세기 디자인은 거대한 뿌리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동물에 비유하면, 건축이 호랑이라면, 공업 디자인은 치타, 산업 디자인은 고릴라, 시각 디자인은 고래와 같이 모두 다른 영역을 이루지만, 근본적으로 ‘디자인’ 이라는 포유류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상위와 하위 개념으로 나누기보다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디자인이 넓은 개념이라면 건축은 좁고, 깊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건축이라는 것이 ‘건물’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느덧 인간은 사라지고, ‘건물을 위한 건축’을 하는 지금의 건축계를 보면서 다시 한 번 ’21세기 르네상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 이론Modulor’3 에 의하면, 도시의 스케일도 결국 숟가락과 포크의 길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크가 긴 문화에서는 테이블 또한 비례해서 길어지고 이를 담는 방, 방을 담는 집, 집을 담는 구역, 길 등의 모습이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가 지금 다양한 분야에 시도를 하지만, 건축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숟가락/포크> 가 2D의 조형물을 3D로 인식한 친환경적인 시도였고, <바이크 행어> 역시 건축의 공간 디자인은 건물 내부에 그치지 않고, 건물 사이의 공간도 디자인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도시의 버려진 공간을 이용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으니까요.
김황 디자이너께서 생각하는 ‘건축과 디자인의 경계’란 무엇인가요? <코쿤Cocoon>(2005)을 보면 제품디자인이지만 동시에 ‘집’이라는 건축이고, 사회적 컨텍스트를 살린 스토리가 살아있는 디자인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시는 분야도 UX 디자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건축 vs 디자인, 디자이너의 생각
김황 ‘디자인’이 이미 오래 전에 존재했고 잠재되어 있었던 명제라는 점은 흥미롭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이 부분이 더 심화될 수 있다면, 세상에 있는 디자인 역사나 개론 서적들의 서론 부분은 모두 새로 쓰여야겠네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제가 건축과 디자인의 경계에 서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코쿤> 작업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졸업할 당시 크게 유행했던 유니버설 디자인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것은 작업 발표 당시 디자이너보다는 건축가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비온대지 BEONDEGI 학생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디자이너와 건축의 경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건으로 운이 좋게도 이필훈 전前 정림건축문화재단 대표님과 대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차이점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필훈 대표님 말씀으로는 건축가는 디자이너보다 훨씬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에서 생기는 사명감을 이야기하시는 것이겠죠. 그제야 저는 제 작업이 왜 건축가들에게 더 어필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들의 사명감을 자극한 것이죠. 대표님 말씀을 조금 더 빌리자면, 건축에서 새롭게 개발된 구조는 하나의 개념Conception이기보다는 서식 Forming으로서 다른 건축가들도 사용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마치 개방형 어플리케이션open source application이나 개념적인 프리웨어Freeware로서 타 건축가들의 직업에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명감 때문에 건축이 타 장르 예술보다 약간은 더 저작권 문제에 대하여 넉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자인 행위는 이러한 사명감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가 받은 디자인 교육에서는) 물론 사회적인 책임이나 사회적인 디자인을 보고 듣지만 굳이 그것을 작업의 중심에 두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안 대표님께서 언급한 르 코르뷔지에와 사보아 부부같이 아티스트의 강한 에고ego로 인해 기능이 무시되는 경우는 디자인에서도 매우 많습니다. 기능이나 논리보다는 스토리가 더 중시되는 거장의 디자인이 그러하죠.
제가 하는 디자인은 건축보다는 순수 예술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디자인의 개념을 고민하기 이전에 저는 먼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지금도 질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의 본질은 소통과 해방(카타르시스 Catharsis)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삶에 있어서 전진보다는 후진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추상적인 콘셉트, 유형, 의제들을 도출하는 행위로 사용합니다. 이 행위는 우리에게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먼저 고민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으며, 이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그저 우리를 스쳐갈 뿐이며 제품과 서비스는 인류의 진정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경제와 기술적인 압박에 의해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모두를 위한 피자Pizzas for the People>(2008)가 지금까지의 작업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 피자>는 디자인이면서 디자인이 아니고, 물성을 가지면서도 가지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상황에 따라 정의가 마구 변하는 이런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정의를 잠시 미루고자 합니다.
현재는 필립스Philips에서 UX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저의 개인 작업과 회사에서의 작업들은 상당한 거리감이 있습니다. 이 두 원의 접점을 최대한 넓혀 언젠가 하나의 원이 되게 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결국 현대의 개인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광범위하게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초상이자 도전이기도 합니다.
사유가 있는 곳에 디자인도 있다
분량12,642자 / 25분 / 도판 8장
발행일2012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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