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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흔적

염상훈

20여 년 전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가 떠오른다. 당시에는 임시 학장이었던 마크 위글리(Mark Wigley) 교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뉴욕이 높은 밀도를 가진 도시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또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는 장소라고 했다. 이 스쳐 지나감이 단순히 지나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에게 작은 흔적을 남기며 수많은 흔적이 쌓이게 되는 것이 뉴욕에서의 특별한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뉴욕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캠퍼스를 가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밀집된 환경에서 비좁은 공간과 환경에서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 학생들의 불만을 원천차단하고 오히려 거기서 장점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계산된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흔적이라는 불완전 정보도 때론 굉장히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과 많은 중요한 연구와 활동이 이런 작은 흔적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림건축문화재단과 연세대학교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공동주택연구〉 포럼은 다양한 각도에서 밀도 있는 만남과 흔적을 만들어낸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공동주택의 흐름과 공동체성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건축가들을 초청하고, 공동주택을 소형(S), 중형(M), 대형(L)으로 구분해 토론의 장을 기획한 것은, 단순히 건축물의 규모를 나누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성격이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실험적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이 완벽할 수는 없었겠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에게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건축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신선한 자극이 되었고, 청중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때로는 청중의 질문이 발표자가 의도한 방향과 다르기도 했지만, 그런 발표와 질문들이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새로운 대화를 이끌어내며 뜻밖의 심도 있는 논의를 만들어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공동’과 ‘공유’라는 단어가 여전히 정치적 함의와 사회적 부담을 안고 있다는 점이 이번 포럼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난 것 같다. ‘공동체성’이라는 주제가 청중들에게 다양한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했고, 이 단어들이 주는 무게감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며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동주택을 단순히 자산의 의미를 넘어선 사회적 가치로 논의할 수 있는 자리는 혼재된 개념들을 탐구하고 새로운 인식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주택’ 또는 ‘주거’라는 단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울은 아직 주거 유형의 다양성을 논의하기에 충분한 경험과 사례를 쌓지 못했다. 서울에서의 삶의 유형 또한 여전히 한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나 다른 해외 도시들이 이 부분에서 앞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 나라 건축가들이 각자의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다양한 고민과 시도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실험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이번 일본과의 교류는 그런 측면에서 작지만 큰 즐거움을 준 시간이었다. 유사하면서도 매우 다른 환경 속에서 동질감과 새로움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은 언제나 의미 있는 배움이 된다. 각국 건축가들이 논의한 실무 환경, 정치경제적 영향, 직주환경에 대한 인식,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나 유사점 등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이번 포럼은 공동체라는 개념이 단순히 주거와 건축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그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양한 공동체와 주거의 형태들이 전달하는 의미는 단지 도시와 건축을 넘어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더 깊이 탐구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측면이 다음 포럼의 질문과 과제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건축 유관 분야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유의미한 소통을 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고민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또 다른 흔적을 남기고, 장기적인 공감대와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스쳐 지나가는 흔적을 통해서 서로 다른 관점에서의 사고를 촉진하고, 다양한 분야의 통합적인 이해와 협력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우연히 여러 해외 대학들과 교류하면서 우리나라 교육 환경의 강점을 재발견하기도 했고, 반대로 해외의 풍부한 교육 환경에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자유로운 다른 나라의 교육 환경을 접하며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 포럼이 내게 남긴 긍정적인 흔적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보고자 한다. 이번 같은 교류와 토론이 우리에게 작은 듯하지만 큰 흔적을 남겼으리라 생각하고, 앞으로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염상훈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며 CAT 건축도시디자인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도심밀도, 재개발, 재사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기술 변화를 이용한 건축 작업도 진행하고 있으며, 전시, 문화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래를 위한 흔적

분량2,488자 / 5분

발행일2024년 10월 22일

유형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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