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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도시를 만드는 작은 집

홍지학

애정결핍

우리가 거주하는 집의 형식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과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학의 제분야 중에서 주택과 관련된 학문은 별도의 독자적인 줄기로 어느 정도 독립성을 띠고 있다. 인간의 몸과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일체화되는 집은 여러모로 골치 아픈, 복잡한 존재다. 다양한 욕구가 집이라는 단어 위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축가들이 집을 순수하게 공간의 질과 감흥으로 치환된 건축적 경험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의지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현상과 해석들이 집에서 교차되면서 집을 특별한 장르로 만든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주거 방식은 전 국민의 워너비이자 ‘국평’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아파트(특히 대단지 아파트)를 위시하여, 단독주택, 그리고 다세대, 다가구 혹은 빌라라는 용어가 혼재되어 사용되는 소규모 도시집합주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 단연 각광받는 것은 대단지 아파트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좋은 입지의 아파트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편,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단독주택을 갖는 것은 〈응답하라 1988〉의 정겨운 골목길을 마주하는 소박한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버렸다. 일반 서민이 단독주택을 지어 혼자 살면서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동네는 거의 멸종 직전이다. 이 역시 자산 규모 최상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옵션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중산층의 대단지 아파트와 상류층의 단독주택 사이에 소규모 도시집합주거가 자리한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 사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넣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로 다음 단계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로 취급받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보니 정책적으로도 건축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소홀하게 다루어져왔다. 이 자그마한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한번도 애정을 듬뿍 받아보지 못한 가여운 존재다.

소규모 도시집합주거

다세대, 다가구 주택 관련 제도는 ‘공급 확대를 통한 서민층 주거 안정’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게 정비되어 왔다. 하지만 뒤따른 일련의 조치들은 주거지로서 소규모 필지의 매력을 반감시켰다. ‘발코니 확장 합법화’는 섀시로 꽁꽁 에워싸인 입면 풍경을 양산했고, ‘옥외계단 바닥면적 산정 제외’는 동일한 대지에서 건축물 면적이 늘어나는 효과를 끌어냈고, ‘필로티 층 주택 층수 산입 제외’는 건축물 높이가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소규모 필지는 점점 열악한 주거지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공동주택의 대량 공급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주택정책의 전부였던 시대를 겪다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주거 형식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촉발되기 시작했다. 젊은 건축가들을 주축으로 기성 건축판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태동했던 청년건축인협의회는 ‘도심지 내 소필지 재건축’에 대한 워크숍과 토론회를 제안했다.1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작가로서 의식 고취를 목표로 했던 4.3 그룹은 도시 주거에 마당이라는 개념을 담론화하면서 소규모 도시집합주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커다란 물결을 이루지 못했지만, 건축가가 설계한 몇몇 다세대, 다가구 주택의 건축적 성과도 있었다. 이들은 ‘집 속에 길’, ‘주민 소통 공간으로서의 복도와 계단’ 등 이전까지 효율적인 평면 구성을 위해 희생되었던 집합의 사이공간에 주목했다.

특히, ‘가회동 11번지 주거계획’은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였다. 4.3 그룹을 중심으로 6인의 건축가들이 집장사에 의해 점령되어가는 북촌에 공동체를 위한 길과 마당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도시 주거 모델을 제안하려는 시도였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소규모 도시집합주거에 대해 이렇다 할 건축계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필지의 가치

지금 다시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 애정을 쏟아야 하는 이유는 모두가 갈망하는 단지형 아파트가 만드는 도시 문제 때문이다. 단지형 아파트는 ‘공공재의 투자 없이 취약한 도시기반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 기획’2이기에 공공의 입장에서 편리하게 대규모로 주택을 공급하면서 동시에 도시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양질의 거주환경을 위해 필요한 기반시설을 아파트 단지의 개발 주체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근린상가, 놀이터, 어린이집, 유치원, 경로당, 주차장, 운동시설 등을 부대복리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입주자가 사적으로 부담하는 꼴이다. 반면, 단지 이면의 소규모 도시집합주거가 들어서는 곳에는 쾌적한 주거환경에 필요한 적절한 기반시설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다. 그렇게 소필지 주거환경은 악화되고 임시적인 거처로만 받아들여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단지형 아파트는 개발 과정에서 도시가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길과 골목을 병합해 수백 개의 필지를 하나의 필지로 합필한다. 토지의 합필은 사실상 비가역적 과정이다. 수백수천 명이 공동으로 소유하게 된 하나의 땅을 다시 분리해 길과 골목을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제인 제이콥스의 ‘작은 블록(small blocks)’ 예찬에서 알 수 있듯3 길로 둘러싸인 블록의 크기는 중요한 문제다. 큰 블록은 도시를 분리하고 고립시키고 생활의 활력을 빼앗아간다. 제인 제이콥스가 비판한 맨해튼 웨스트 88번가의 긴 블록은 길이가 240m다. 그런데 강남의 대단지 블록의 길이는 500m가량 된다. 게다가 그 블록을 걷는 동안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단지의 경계 조경뿐이다.

반면, 소필지로 구성된 도시는 유연성이 있다. 도시는 유기체와 같아서 경제, 문화의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꿔가며 생명력을 유지해야 한다. 거대 필지는 변화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소필지는 도시의 욕구가 변덕을 부릴 때도 기능을 유연하게 바꾸며 도시의 콘텐츠를 갱신해나갈 수 있다. 도시계획 차원에서 소소한 공공사업이 필요에 따라 도시 곳곳에 스며들 여지도 많아진다. 다가구, 다세대 주택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역동성은 사회가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목전에 들이닥친 인구구조의 변화, 즉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와 세대 구성원의 노령화는 서서히 막대한 영향을 사회에 미칠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주거 상품이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작은 단위의 건축 행위가 가능한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유리하다. 최근에 사회주택, 공유주택, 공동체주택과 같은 대안 주거가 회자되는 빈도가 잦아지는 것은 그 전조현상으로 볼 수 있다. 뜻있는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형식의 주택공급을 실험하고 있지만, 자본력이 영세한 민간이 주도하는 데서 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보편적 주거의 선택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민간의 실천을 바탕으로 공공이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을 위해 해야 할 일

소규모 도시집합주거의 거주성을 저하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소필지의 한계다. 건축 행위는 필지 단위로 발생하고, 이를 규제하는 다양한 장치들 역시 필지를 단위로 고안되어 있다. 예를 들면, 모든 건축 행위는 그 규모에 수반되는 주차장을 갖추게 되어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오래된 소필지가 이를 만족시키려면 건물의 저층부를 주차장으로만 가득 메워야 한다. 결과적으로 필로티 주차장이 연속되는 끔찍한 가로 환경을 만든다. 소필지의 가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주차장 설치 규정의 변화나 공공 주차장 확보가 절실하다.

소필지에 대한 건폐율 완화도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다. 현재 건축법은 필지 규모와 관계없이 같은 용도의 토지는 같은 건폐율을 적용하고 있다. 건축물은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등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차지하는 최소한의 크기가 있다. 소필지에 이를 반영해 공간을 계획하다보면 여분의 공간이 협소해지고 거주공간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 규모 이하의 소필지에 대해서는 유연한 건폐율 적용이 필요한 이유다.

소필지가 들어선 오래된 동네는 도로 폭이 건축 행위의 최소 요건인 4m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행 법규는 모자란 도로 폭을 건축 행위의 주체가 공공에 떼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뜩이나 작은 필지에서 도로확폭과 가각전제를 하고 나면 땅이 크게 줄어드는 데다가, 건폐율과 용적률 산정은 도로를 내어준 이후의 대지면적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공공이 해야 할 일을 민간에게 떠넘기면서 땅을 빼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규모 개발에서는 개발이익의 대가로 환경개선에 기여하라는 명분이 타당해보이지만, 동네의 작은 땅에 대해서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적어도 건폐율과 용적률 산정을 도로를 공제하기 이전인 원 지적상 대지면적을 기준으로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개선안을 고려해야 한다.

소규모 도시집합주거를 상대적으로 열위의 주거공간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큰 원인은 부족한 공공 인프라다.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개발 주체에 책임을 부여해 적절한 공공 인프라를 조성하도록 할 수 있지만, 소필지 개발은 기댈 곳이 없다. 결국 공공 자원이 투여될 수밖에 없다. 동네 단위 관리 회사의 활성화, 공용 쓰레기 처리장 설치, 공영주차장 증설, 공원 면적 확보, 마을도서관 같은 커뮤니티 시설 확충 등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자리한 동네의 거주성 개선을 위한 공공의 책무는 막중하다.

대단지 아파트의 압도적 편리성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 삶의 방식에 서열을 부여하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아파트에서 벗어난 대안적 선택지 역시 동등하게 필요하다. 효용성 있는 대안으로서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우리 주거 선택지에 올라오는 것이 도시와 사회의 건강을 살리기 위한 해법이다.


홍지학

서울건축, 해안건축, 미국 보스턴의 CAU(Center for Advanced Urbanism)에서 연구와 실무경험을 쌓은 후 조윤희와 함께 2015년 구보건축을 설립했다. 미국 MIT에서 Architectural Urbanism을 전공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역사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로서 GUBO Urban Research Lab을 운영하며 구보건축의 디자인협력파트너로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 중이다.

건강한 도시를 만드는 작은 집

분량4,907자 / 10분

발행일2024년 10월 22일

유형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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