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레이팅 시스템
이정훈
분량4,214자 / 8분
발행일2022년 7월 11일
유형인터뷰
튜토리얼 현상설계
직원이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예습하고 복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 직원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공모전을 시킨다. 이것이 예습에 해당한다. 새 직원을 가르치고 성장시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현상설계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준비 단계에서 당선 가능성과 관계없이 우리 사무소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를 함께 생각해보고, 스스로 고민한 것을 두고 소장과 직접 호흡하며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신입 친구도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압축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 사무소는 이렇게 일한다’고 깨닫게 된다.
회사 차원에서 현상설계는 지금까지 우리가 써보지 않은 어휘를 새롭게 시도해보자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일도 있고, 일을 따야 해서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목적이든 공모전은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어 달 내에 결론을 내리는 일이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 글 쓰는 법, 표현하는 법 등 회사 시스템을 종합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다. 1년에 한두 개 현상설계는 해볼 만하고, 공모전 주제가 재미있을수록 배우는 게 많다.
어떤 직원이든 나중에 독립된 건축가로 일하려면 자기가 생각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기본이고, 그다음에 실제로 짓는 일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은 또 다른 얘기다.
집단지능 라이브러리
복습은 프로젝트를 완공한 뒤 추적하고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로부터 우리가 시도한 디자인과 기술이 국내 환경에 얼마나 최적화되었는지 분석하고 문제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하자 관리를 통해 계속 스터디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좋은 점은 반영하고 부족한 점은 보완하여 유형별로 레벨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연계된 시스템으로 담당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프로젝트 리뷰’가 있다. 예를 들어 담당 주무관이 어떤 부분을 지적해서 문제가 생겼다든지, 법규 검토를 이렇게 했는데 실제로는 저렇게 해석이 돼야 했었다는, 지극히 실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또 직원이 퇴사하기 6개월 전부터는 강의를 시킨다. 조호에서 배운 것, 노하우, 법규, 렌더링하는 방법, 특정 프로젝트 시공상에서의 문제점 등을 주 1회 공유한다. 이를 동영상으로 다 녹화해두었고, 각자 뛰어난 부분을 편집해서 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 일주일 내에 회사 시스템을 학습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초기부터 이런 시스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나 영국에 있을 때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경험하긴 했지만 내가 그걸 할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에 입사했던 친구들이 퇴사하면서 새로운 직원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예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하는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최근 들어 직원이 한 사무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아졌다. 인력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소장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신입 직원이 최대한 빨리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 시스템, 도서관 구축이었다.
좋은 도서관은 자기가 원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명확한 분류 체계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주택, 주차장, 미술관, 상업시설,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그걸 만들어왔다. 법규 체계와 재료부터 프로젝트 심의, 인허가 등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 있다. 결과물은 디지털 파일로 정리해두어서 직원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유사 프로젝트 자료를 검토해보면 예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고, 나는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프로젝트를 확인해보라고 일러줄 수 있다. 그러면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앞으로는 그것을 조금 더 체계화하려 한다. 이제는 내가 해외에 한두 달 출장을 나가더라도 시스템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무소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디지-로그 인터페이스
우리는 BIM으로 설계하므로 모든 작업이 3D 디지털 파일로 정리돼 있다. 그런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3D 파일을 2D로 도면화하는 부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도서화는 기존 관행일 뿐, 시공할 때 3D 파일을 곧바로 독해해서 3D로 만들면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내에서도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맡는 대형 건설사는 어느 정도 인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젊은 건축가들이 주로 함께 일하는 상대인 중소규모 건설사에는 3D 파일 자체를 독해하고 다룰 수 있는 인력이 거의 없다. 우리가 공사비 200~300억 원 규모의 건물을 짓기 위해 2군 정도의 건설사와 함께 일해봐도 3D 디지털 파일만으로 소통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면서 설계사무소 노동력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가 업종 분할을 해서 실시설계를 외주화하고, 내부에서는 기본설계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의 완성도는 실시설계로 발현되기 때문에 아직은 내가 실시설계를 직접 관리하고 현장에서 시공한 결과를 확인해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디지털 설계와 아날로그 시공 사이의 괴리를 잡아내고 보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의 안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실시설계팀을 사무소 밖에 두는 것도 건축가의 능력이고, 언젠가는 외부에 팀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기본 설계부터 현장 감리까지 다양한 단계에 걸친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책임자로서 주요 프로젝트를 선택해 집중하기보다 실수할 확률을 줄이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에 신경 쓴다. 예전에는 나도 경험이 적어서 현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제야 알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작전을 짠다. 특기 시방서에 명시하고, 건축주에게 알리고, 공사 업체가 선정된 직후부터 시공 난이도가 높은 부분의 디테일 의도 구현을 위해 공사 감리 포인트를 짚고, 시공사 담당자를 사전 교육하고 회의도 많이 한다. 비용이 맞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리 말해달라고 일러둔다. 현장 소장이 의도 구현에 동의하고 내용을 숙지하면 공사하면서 생기는 문제에 관한 피드백이 온다. 그래서 예전에는 현장에 열 번 나가서 점검했을 일을, 지금은 다섯 번만 가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일을 여러 번 같이하면서 노하우가 생긴 업체 풀이 생겼다. 이들을 프로젝트 성격이나 공사비 규모에 따라 구분해두었고, 적합한 프로젝트와 연결해 함께 일하고 있다. 또 새롭게 일을 같이하는 팀에게는 우리 프로젝트 현장 답사를 권한다. 기준치를 설정해주면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시스템 로그 출판
프랑스에 있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70년대 프랑스 건축가들 아카이브를 접했다. 비정형 건축을 향한 실험이 너무나 훌륭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실물 자료를 직접 보고 나니 기록을 남기는 것은 건축가로서 소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마칠 때마다 내가 어떤 일을 했고, 과정이 어땠고, 누구와 함께 만들었고,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인지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판함으로써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일하는 모두를 긴장시키고, 자기 실력의 120%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당장 나부터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하니까 일하는 자세를 다잡게 된다. 또 누군가를 모셔서 비평받을 땐 굉장히 긴장된다. 나도 그에게 할 이야기를 간결한 어휘로 정리해내야 한다. 협력업체, 클라이언트 등 모두에게 엄청난 시너지가 생긴다. 이런 측면에서 출판은 굉장한 도구다. 궁극적으로는 주요 프로젝트를 모두 출판하고 싶다. 플랫폼엘, 나인브릿지 파고라, 바다감각 EL16.52의 건축주와 함께 계약해 국영문판 책을 제작했고, 동영상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출판과 영상 제작 관련한 내부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출판 경험을 매뉴얼로 만들어 제작을 위한 준비 방법, 인력, 전 세계 주요 도서관과 주요 연구자 등 배포처 목록을 만들었다. 몇 권의 책이 쌓이니까 이제는 다른 클라이언트도 일정 비용을 투자해서 책을 만들면 이걸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더 크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치를 만드는 작업에 동의하게끔 하는 게 내 역할이다. 그리고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함께 일한 사람, 구조 엔지니어, 시공자 등 모두의 이름을 모두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인터뷰이 이정훈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오퍼레이팅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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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2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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