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가 그리는 계통수
김상호
분량2,917자 / 6분
발행일2022년 7월 11일
유형서문
조호의 건축은 쉽게 읽힌다. 어느 건물이든 건축가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렸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작업을 펼쳐놓고 볼 때는 이 건물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혹은 같은 DNA에서 생성되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업 묶음을 몇 다발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건물 하나하나의 디자인이 매우 직설적이고 다이어그램적이며, 그런 일련의 작업이 조호라는 계통수를 그려 나간다.
쉽게 읽힌다는 점은 전략과 전술을 주고받는, 속고 속이는 대결에서라면 약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도구를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의 경험치가 쌓여 있는지를 알리는 데에는 장점이 된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디자인의 특징과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시장에서 빠른 선택과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블랙박스 속 순수 이성에서 직접 사출된 듯한 건축보다, 디자인 프로세스가 그대로 보이는 투명한 상자를 거친 기계적 생산품에 사람들은 더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조호의 웹사이트에서 프로젝트 목록을 보고 있으면, 계열을 연결해보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예를 들면, [플랫폼엘 — T 웨딩홀 — 다비치 안경점]으로 이어지는 줄기, [마블링 오피스 — 크로싱 브릭]으로 이어지는 줄기, [헤르마 주차장 — 루버 주차장 — 울산 KTX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줄기 등이다. 이 줄기들이 디자인의 형태적/형식적 요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재료의 구법이라는 시점에서 다른 각도의 계열을 그려볼 수도 있다. 유독 도드라지는 것은 벽돌이다. 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패턴과 표면이라는 테마가 계통수의 다른 가지로 뻗어 있다.
조호에는 특별한 줄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한국성’이다. 한국성은 조호가 알게 모르게 꾸준히 추구해온 화두로, 주로 한국 처마의 변용 혹은 진화, 다른 말로 현대화를 통해 이어져 왔다. 특히, ‘한국의 처마’라는 테마는 최신작 설해원에서부터 이브 하우스, 기하학의 집, 커빙 하우스, 남해 처마 하우스로 거슬러 올라가며 발견된다. 발견이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한국성과 처마는 애초부터 조호의 작업 전면에 늘 드러나 있었으나, 언급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인지, 평가절하되어서인지 건축계 비평의 레이더에 별로 잡히지 않았다. ‘처마 하우스(Cheo-ma House)’, 어떻게 이 이름보다 더 분명하게 자기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낼 수 있겠는가. 처마 하우스가 조호 초창기 두 번째 작업이었음을 생각하면, ‘한국성’은 조호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소급적으로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성에 대한 열의가 너무 높은 나머지 플랫폼엘의 ‘중정’과 나인 브릿지 파고라의 ‘이중 덕트’까지 한국적인 어떤 것으로 포섭(혹은 설명)하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시도 같다. 나인 브릿지 파고라는 그 자체로 건축 기술의 전선을 한 칸 전진시킨 도전적인 작업이고(그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김종성건축상의 영예도 얻었다), 플랫폼엘은 조호의 계통수 한 줄기에 정점을 찍은 건물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직접 가 본 조호의 건물이 둘뿐인데, 그중 하나가 운 좋게도 플랫폼엘이다. 플랫폼엘은 스킨의 화신이랄까, 조호의 작업을 ‘스킨에서 볼륨으로’ 전환해준 중요한 작업이다. 조호가 연마한 스킨 만들기 스킬을 집대성하여, ‘레이어드 된’ 면들로 만든 ‘레이어드 된’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물을 칭칭 감고 있는 금속 표피다. 중정으로 들어서면 바깥과 다른, 매끈한 내피가 중정을 차분하게 감싸고 있다. 같은 재료로 가공한 서로 다른 질감의 표면이 대조를 이루며 안과 밖을 확실히 구별 짓고 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외피와 내피는 저마다 두 가지 이상의 면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그 모든 표면 재료는 수(십) 차례 테스트를 거친, 그러고도 결국 원하는 바를 다 충족시키지는 못한 채 주문 제작된 것들이다. 그렇게 겹겹의 면들로 감싼 공간이 다시 튜브처럼 중정을 두르며 차곡차곡 쌓이고 이어진다. 선으로 면을, 면으로 공간을, 공간을 다시 선으로 환원해가며 만든 건축이다. 한편, 지하에는 선이 아닌 볼륨으로 만든 큰 전시 공간이 묻혀 있다. 강철 같은 실과 납작한 튜브로 촘촘하게 짠 공간 대신 하나의 큰 덩어리 공간으로서 지상의 중정과 호응한다. 이 두 개의 큰 보이드가 이 건물의 중심 공간이다.
마블링 오피스는 강남의 전형적인 도시 블록 속 근생 건물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전형적인 근생 건물로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FAR 게임’에 충실하게 최대로 뽑아낸 볼륨을 섬세하게 표면 처리함으로써 범상치 않게 마무리했다. 대리석 띠로 건물 전체를 감싸듯 두르면서 띠를 벌려 길게 찢어진 창을 내고, 코너와 모서리를 부드러운 곡면으로 처리함으로써 ‘랩핑’ 효과를 높였다. 건물을 감아오르던 대리석 면이 상층부 외벽 코너에서 원뿔의 꼭짓점으로 수렴한 뒤 다시 평면으로 전환되는 부위에서 표면 처리의 쾌감이 전해진다. 마블링 오피스에서 쓰인 입면과 창의 구성 방식은 플랫폼엘로도 이어진다.
자료와 정보만으로 조호 건축의 DNA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조호가 지향하고 있는 ‘기계 주도적 설계(machine-driven design)’ 때문일 것이다. 그 기계는 다름 아닌 컴퓨터, 즉 라이노, 레빗, 카티아로 이루어진 디지털화된 디자인 기계다. 조호는 디지털 모델링을 바탕으로 모든 프로젝트에서 BIM 설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 일련의 기계가 조호라는 시스템의 중심에 있다. 거기로부터, 또 거기를 향해 아카이브가 생성되고, 머신-러닝과 연동된 휴먼-러닝이 작동하고, 실험치와 결과값이 데이터베이스에 누적, 관리된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초기 구동에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면 효율적으로, 체계적으로 돌아가게 되고, 관성 주행 단계에 접어들면 남는 리소스로 다른(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지금 조호는 그 지점에 막 들어서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김상호 건축신문 편집장
조호가 그리는 계통수
분량2,917자 / 6분
발행일202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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