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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구술채록, 그리고 김종성 구술집에 대하여

최원준

우리 건축가에 대한 구술채록은 일찍이 2003년부터 국립문화예술자료관에서 진행한 박춘명, 송민구, 엄덕문, 이광노, 장기인의 구술채록이 있었고, 2010년부터는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건축가 구술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김정식, 안영배, 윤승중, 4.3그룹, 원정수+지순, 김태수 구술집에 이어 일곱 번째로 김종성 구술집이 발간되었고, 이후 서상우, 유걸 구술집도 출간되었다. 4.3그룹을 제외한다면 구술의 목표는 우리의 전후 현대사에서 현대건축의 기반을 형성한 1세대 건축가들, 즉 1930년대에 태어나 195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 성장기에 활동한 건축인들의 다양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건축잡지가 확산되고 각종 출간을 통해 건축관과 설계과정의 기록을 남기는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1세대에게는 상대적으로 그러한 기회가 적었다는 측면에서 구술채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건축가 구술사업 진행

역사학에서 구술채록은 거대담론, 영웅서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공식적 기록에 근거하고 사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기존의 담론에서 벗어나 일상사적, 미시사적 관점의 역사학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한 소통방식의 변화도 구술채록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20세기 중반 이후 업무에 관계된 소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전화는, 이전의 서신과 달리 어떠한 물리적 기록도 남지 않는 것이어서 사건과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구술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메일로 ‘쓰기’의 문화가 부활한 오늘날은 또다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구술채록의 가치는 건축에서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설계에서 시공에 이르는 긴 과정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분야이기에(이처럼 복잡한 협업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분야로는 영화 정도가 더 있을 것이다), 건축의 총체적인 이야기는 건축물 자체나 도면, 시방서, 혹은 건축작품집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다. 건축가의 창조적 영감과 계획과정, 그리고 최종 결과물로 건축에 접근하기 쉽지만, 그 사이사이와 이후에는 훨씬 넓은 시간과 영역, 활동, 인물, 영향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또한 구술은 이야기의 형식을 띠었기에 추상적인 건축을 우리의 삶에 좀 더 쉽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건축을 흔히 조형언어로 접근하지만, 그 창조와 사용에 얽힌 다양한 인간사의 집적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구술채록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구술채록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도 있다. 구술자의 기억과 주관적 해석에 의존한다는 점인데, 특히 기억은 원본대로 영구히 저장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시로 다시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구술만의 속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서 역시 근본적으로는 누군가에 의한 기록이고, 여기에는 주관에 의한 개입이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술집의 출판에서는 기억과 사실의 차이가 확인되는 부분은 각주에서 이를 밝힘으로써 일종의 보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보완의 필요성이 거의 없었던 것이 김종성 구술집이었다. 2016-17년에 걸쳐 필자와 전봉희, 우동선, 남성택 교수가 진행한 김종성의 구술채록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억력이었다. 구술채록은 유년시절,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재학 중 2학년을 마치고 바로 유학을 떠나면서, 당시로서는 매우 일반적이지 않은 건축인생을 걸어왔다. 유학을 결심한 후 J. M. 리처즈의 『근대건축입문』에서 접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 사진에 감명받아, 미스가 학장으로 있던 일리노이공과대학(IIT)에 다른 대안 없이 지원해서 합격하였다. 시카고로의 직항 노선이 없던 시절, 네 곳의 경유지를 거쳐 추운 겨울밤에 시카고에 착륙해 택시를 타고 찾아간 IIT에서, 그는 막 완공되어 푸르스름한 형광등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크라운 홀의 야경에 압도되었다고 회고했다. “머리에 있는 막연한 건축의 개념을 다 깨는” 순간으로, 미스의 건축에 매료되어 간 건축학도에게 이보다 더 인상적인 첫 경험은 상상하기 어렵다. 비록 그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의 증언으로도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말이 가진 힘에 연유할 것이다. 김종성은 미스가 구축한 독특한 근대적 건축교육체제에서 수학한 후 그의 사무실에서 12년 간 일했으며, 또 그의 뒤를 이어 IIT의 교수, 부학장, 학장서리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소위 ‘미시안(Miesian)’ 건축의 정통한 계승자가 되었다.

IIT 유학시절 미스의 <크라운 홀> 앞에 선 김종성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 기증

구술의 구체적인 방향은 건축가의 성향에 따라서 조정이 되는데, 김종성의 경우에는 작품 자체의 분석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소위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는 미스의 건축관을 상기할 때,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고, 또 정인하 교수의 선행 연구가 있기에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작품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기존의 구술작업이 6-10회 규모로 진행된 데에 비해 김종성 선생의 경우에는 13회차까지 진행되었다. 방법론적으로도 보다 많은 시각 자료를 동원하여 구술에 구체성을 더하고자 했다. 도면이나 사진을 구술 현장의 모니터에 띄워 구체적으로 참고하며 진행하였으며, 도면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현장에서 직접 스케치로 설명을 보충해주기도 했다.

김종성 구술채록의 진행(목천건축아카이브 유튜브 영상 캡쳐 이미지)

이러한 자료들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한 것은 경외할 만큼 정밀하고도 섬세한 그의 기억력이었다. 각 작품마다 설정된 모듈의 크기에서부터 재료의 선택, 부재의 연결 방식까지, 구체적 수치마저도 망라하는 언술에서 그의 작품이 갖는 명료한 건축언어의 연원을 쉽게 인식할 수 있었다. 작품별로 기둥의 형태나 배치 방식이 갖는 차이가 뚜렷한 구축적 논리로 설명되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이지적 전율은, 자율적 예술의지에 기반한 공간과 형태가 안겨주는 감각적 감흥과는 또다른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도서관(1980-82년)의 구술에서는 캔틸레버로 셋백된 진입영역의 상부, 보와 천정을 추녀처럼 조금 들어 올려줬다는 언급이 기억에 남는다.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던 우리 건축계에서, 건축의 기술적 완성도를 우선적으로 도모하자는 이례적인 목소리를 냈던 그였지만, 전통건축에서 어린 시절을 살아오며 체화된 공간적 경험이 섬세하게 설계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 기증

힐튼호텔(1977-83년)은 그가 IIT에서 사직하고 귀국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미국이 산업강국으로서 미스의 건축이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면, 우리나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실질적인 건설기술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힐튼호텔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미스 작품 중 퀄리티가 높은 건물의 98퍼센트 정도”의 시공 완성도를 이끌어낸 사례다. 넉넉한 예산의 지원과, 도전적인 젊은 현장소장과, 출근과 퇴근 시 매일 현장에 두 번씩 방문했던 김종성의 열정이 이루어낸 성취임을 구술채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칫 이러한 기념적 작품이 글과 기록으로만 남을 수도 있는 현재 힐튼호텔의 운명이 매우 안타깝다. 

힐튼호텔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 기증

99년 세기말에 완공된 SK서린빌딩은 고층건물의 텍토닉한 표현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취를 보여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스가 I형강의 부착을 통해 수직구조재를 표상하는 언어를 개발하였다면, 김종성은 서울역사박물관, 선재미술관 등 저층건물에서 선보이셨던 수직, 수평의 표현 형식을 도입하여 오피스건축의 구조적 체계를 보다 복합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다 투명한 유리를, 또한 개폐가 가능한 창을 계획했지만 외적 조건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다는 증언에서는 단단하고 기념비적인 모노리스(monolith)의 존재감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활동과 활기가 도시에 투영되는 것 또한 중요한 목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SK서린빌딩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 기증

그의 작품들에는 대지가 사면으로 면한 개별적 상황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있다. 그 기저에는 건축의 통합된 내재적 규율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미스와 달리, 건물이 들어설 곳의 상황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를 함께 강조했던 루트비히 힐버자이머 교수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그는 언급하였다. 이처럼 미스 뿐 아니라 함께 바우하우스에서 건너 온 힐버자이머와 발터 페터한스, 또 미스의 제자 출신으로 교육자가 된 알프레드 칼드웰 교수의 교육철학과 방법론을 보다 폭넓고 상세히 접한 것도 구술채록의 큰 수확이었다. 그의 구술을 통해 우리는 1960년대 IIT에서 이루어진 건축교육의 현장을 간접체험할 수 있었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고찰을 기반으로 엄정한 비례 속에 건축의 구축술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사고의 전개 과정을 볼 수 있었으며, 그 실현에 관계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대지, 재료, 시공기술에 대한 합리적이고도 종합적인 해석에서 설정되는 모듈과, 그로부터의 역설적인 자유,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건축의 내재적, 보편적 원칙뿐 아니라 대지의 상황에 대한 유동적인 대응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의 구술집에 담겨 있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구술채록 과정에서 하나 언급할 것은 국립현대미술관과의 협업이다. 2014년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_건축가 김종성>전을 기해 기증된 그의 많은 자료들이 미술관의 미술연구센터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구술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었다. 이후 열린 윤승중 전시회의 경우는 역으로 구술채록의 내용이 전시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아카이빙의 일환으로써 구술채록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처럼 상보적인 관계로 협업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말과 디자인의 종합을 통해 건축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집은 최종목표이기보다는 새로운 학문적 접근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다. 일례로 정림건축을 설립한 김정식, 간삼건축을 설립한 원정수와 지순, 서울건축을 설립한 김종성, 원도시건축을 설립한 윤승중의 구술채록이 이루어지면서, 소위 경제개발기의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대형사무소 조직과 협업체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고층오피스에 대한 유형학적 연구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권 한권의 구술집이 더해지며 누적되는 우리 현대건축사의 내러티브들은 서로의 빈 부분을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극적으로 교차하며 한 시대와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드러낸다. 우리 건축의 전후 현대사라는 큰 그림은 아직 채워질 부분이 많겠지만, 그 화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에 구술과 관련된 다양한 노력들이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최원준

숭실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건축 역사, 이론,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이로재에서 실무를 익혔으며,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를 진행하였다. 최근 공저로 『김종성 구술집』(2018), 『유걸 구술집』(2020) 등이 있고, 공동 큐레이터로 <Sections of Autonomy: Six Korean Architects>(2017)와 <Cosmopolitan Look: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1989-2019>(2019)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목천건축아카이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가 구술채록, 그리고 김종성 구술집에 대하여

분량5,797자 / 12분 / 도판 9장

발행일2022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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