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세대와 차이, 동세대와 공통분모
김현정, 류인근, 김도란, 이승환, 박혜선, 오승현, 신주영, 김미희, 고석홍
분량4,331자 / 8분
발행일2020년 2월 29일
유형인터뷰
앞세대가 건축 담론을 위한 설계 작업에 몰두했다면, 동 세대 건축가들은 앞세대의 무거움을 덜고 넓어진 건축가의 스펙트럼 위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간다. 작업을 보여주는 매체와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조건이 달라졌을 뿐, 이들이 건축을 대하는 진지함과 고민의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중 ‘앞세대와 차이, 동 세대와 공통 분모’에 대해 이야기한 건축가 여섯 팀의 말을 한데 모았다.
그라운드: 확장 대신 협업
김현정 어디까지가 나의 앞세대인지 애매하지만 굳이 구분을 한다면, 나에게 학교에서 가르침을 준 선생님들을 앞세대라 말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젊은 그들을 앞세대라 말하긴 좀 미안하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준 작업 환경과 사무실 운영 방식인 것 같다. 앞세대는 독립과 함께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작업을 시작했고,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맡을 경우 직원을 늘리거나, 실시설계를 외주 주는 방식으로 일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사무실을 시작한 세대들은 사무소 규모가 작다. 프로젝트가 많아져도 규모를 키우는 대신 다른 팀과 협업을 통해 해결한다. 어쩌면 생태계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적응 같다.
요앞건축: 우리도 진지하다
류인근 4.3그룹 멤버들은 내 나이에 건축 선언을 했다. 이다음 세대에는 현재 50대 건축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OMA, MVRDV 등의 영향으로 다이어그램에 강하고 작업에서 팝한 느낌이 많이 난다. 그다음을 우리 세대라고 보면, OBBA, JYA를 비롯해 5~6년 사이에 많은 팀이 생겼다. 우리 세대 중 일부는 50대 건축가들보다 더 4.3그룹 시절의 진지함을 가진 팀도 있다. 하지만 팀의 개성, 회사 운영 방식, 프로젝트 방향 등이 다 달라서 우리 세대를 규정하긴 어렵다.
김도란 앞세대와 비슷한 길을 걷는 동세대가 대다수라고 느껴진다. 대외적 이미지는 통통 튀는 이름으로 젊은 이미지를 어필하지만, 운영 방식이나 추구하는 작업 방향은 다들 진지하다.
류인근 작업을 보여주는 매체가 달라져서 가벼워 보일 뿐이다. 소셜 미디어나 공개 석상의 말투나 행동 때문에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작업만 놓고 보면 앞세대 못지않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요즘 우리 세대 건축가들은 전방위적으로 순수하게 일하고 있고, 진보했다는 느낌이다.
박정현 동년배 건축가 중에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나? 서로 자극을 주고받고 상호 참조하는 관계일 수도 있겠다.
류인근 교류는 많다. 그런데 또래 건축가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조금 다른 곳에 선 느낌을 받는다. 설계 과정도, 생각도 다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내가 건축을 하나의 상품으로 여기는 점이다. 나는 건축이 영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여느 제품들처럼 그 자체로 완벽하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상인데, 같이 일하는 요앞 동료들도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회사 입장이라기보다는 내 개인의 입장이다.
나는 건축이 좀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연배가 좀 있는 선배들은 이런 표현 자체를 싫어한다. 그들은 건축을 마치 종교처럼 바라본다. ‘이 순수한 건축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나를 노려본다. 김수근이나 김중업의 작업도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내가 백 년 천 년 갈 건물을 의뢰받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웃음) ‘영원한 건축’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힘들다.
IDR: 각자의 방식
이승환 건축가로서의 진지함, 고민의 깊이는 건축가라면 다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건축가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사회적 조건이 시대마다 다를 뿐이다. 지금 사회의 고민들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고민과 다르다. 또 기술적인 토대도, 가치관도 달라졌다. 기술의 변화,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 등 여러 조건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같은 세대의 경우 프로세스의 디테일은 다르지만 고민의 출발점이 같기 때문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요앞건축이 앞세대의 무거움을 떨어내고 편하게 건축을 하면서도 디테일에 엄청난 노력을 들이는 모습, 푸하하하프렌즈가 보여주는 똘끼, 양수인 소장이 보여주는 톡톡 튀는 전방위적 활동 등을 보면, 자신을 어떤 영역에 가두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즐기는 것 같다. 이론적 깊이가 필요할 때도 있고, 여전히 그 바탕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도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군가가 별생각 없이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작업은 좋지만 깊이가 없는’ 건축이라고 쉽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들어낸 결과물 자체가 건축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서가건축: 자유로움
박혜선 앞세대 건축가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무겁게 건축 작업을 했다. 공공적인 측면에서 많이 노출되어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서 그랬는지, 편하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우리 세대는 거기로부터 많이 자유롭다.
동년배 건축가들과의 공통점이나 동질감은 크게 못 느낀다. 각자 너무 다르다. SoA, 유닛A 처럼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팀들이 있지만, 하는 일과 관심사가 완전히 다르다. 가끔은 전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 같을 때도 있다. 사무소마다의 차별성들이 생기고, 주력하는 영역도 달라지고 있다. 좋은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무소가 건축의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니까.
오승현 이제 원로가 되어가는 먼 앞세대는 김수근-김중업 시대와 다른 건축 담론을 만들기 위해서 기댔던 철학 사조 같은 것이 오히려 어깨의 짐이 된 것 같다. 지금 우리 세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각자 하고 싶은 건축을 마음대로 하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결과물에 드러낸다. 스펙트럼이 넓어 진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하다. 책상에 앉아서 하루 종일 설계를 하기보다 현장을 직접 발로 뛰는 건축가가 많아진 것 같다.
moc: 미디어 접근성
신주영 이전 세대 건축가들은 오랜 실무 경험 끝에 본인 사무소를 개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어렵게 이름을 알린 건축가는 존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젊은 세대 건축가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건축가들끼리 서로의 작업을 수시로 엿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세대 건축은 앞세대와 달리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기보다 실무적이고 경계가 없어 보인다.
동세대 건축가들은 주로 근생이나 다세대주택 같은, 수사를 붙일 여지가 적은 일을 많이 한다. 적은 설계비로 남다른 건물을 원하는 건축주와 수주에 갈증을 느끼는 건축가의 만남이라는 현실적인 상황도 있겠지만,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에 비해 편해졌기 때문에 집장사의 영역이었던 동네 건축도 기회의 영역이 되어 가고 있다.
김상호 부산, 경남 지역의 동세대 건축가들 공통의 관심이나 고민이 있다면?
신주영 아직은 다른 건축가와의 교류가 많지는 않아서 공통적인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생계유지와 좋은 건축가로서의 생존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세대 건축가들의 작업을 보면 초반에 했던 작업과 유사한 규모나 용도가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그것이 사무소의 정체성으로 굳어져 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의도한 것이라면 더없이 좋은 현상이지만,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적으로 수주하기 힘든 현실이나 어떤 한계를 넘을 기회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산이나 지방 도시는 인구가 확연히 적다 보니 프로젝트 수주 경로나 건축의 다양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환경을 능동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다.
소수건축: 대중과의 접점
김미희 과거에는 건축을 공부한 사람에게 건축설계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던 것 같다. 교육 과정에서도 개인의 다른 재능은 보지 않고 오직 설계 능력으로만 평가받았다. 앞선 세대일수록 설계 능력에 치중했던 것 같고, 그것을 다른 가치와 비교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그러다 보니 소위 작품이 좋은 건축가만 남았고, 건축가는 작업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만 치중했고, 그럴수록 다양한 건축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결과적으로 사회와 접점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건축가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동세대 건축가들은 이제 닫힌 문을 열고 나오는 것 같다. 작업실에서 자기 작업에만 골몰하지 않고, 다양한 건축주들과 함께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각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건축가의 역할이 과거보다 점차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고석홍 앞세대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대신 일반 대중에게 건축의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줬더라면, 지금 세대가 좀더 나은 출발점에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앞세대 덕분에 좋은 건축물과 수준 높은 공간은 지어졌지만, 정작 대중은 그것을 접하지 못했고 그 가치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부동산의 관점에서만 집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집을 짓고 싶은 한국의 몇 퍼센트는 있었으니,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건축가의 일도 많아지고 도시도 더 나아졌어야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기회를 개인의 성취에만 빠져서 흘려보낸 것이 앞세대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건축가와 일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고,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인터뷰어 & 패널
- 박정현(건축비평가 / 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 김상호(정림건축문화재단 실장)
앞세대와 차이, 동세대와 공통분모
분량4,331자 / 8분
발행일2020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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