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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김현정

영어를 처음 접했던 중학교 때 어느 컨트리음악 가사에 나오던 ‘dreamer’를 사전에서 찾아봤었다. ‘몽상가’, 생소한 뜻풀이에 갸우뚱거리며 부모님께 물어보니, 근면 성실한 시대를 사셨던 아버지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놀고먹으며 헛된 꿈만 꾸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그때 그 노래는 케니 로저스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였다. 그래서였나, 그 단어는 노래 가사처럼 여자의 맘을 찢고 떠나가는 나쁜 남자와 같은 잔상으로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의 모양을 되돌아보니, 이 먼지 낀 박제와 같은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건축가의 일이란 게 제 의지로 시작되기보다는 주어지는 일이 대부분이고, 또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강제 종료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용감히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는 그 시작의 기회마저 야박하다. 그러다 보니 실천하는 행동가이기보다는 혼자 즐거움을 만끽하는 소심한 몽상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나보다.

이 즐거움 때문에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어진 조건 검토보다는 사이트에서 벌어질 사람들의 움직임을 먼저 상상한다. 어디로 움직이고, 어떻게 만나고, 어디서 멈춰서 무엇을 볼지,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어떤 공간이 필요하고, 그곳은 또 어떻게 쓰일지. 때로는 이런 상상이 규모나 법규 검토 단계에서 헛된 망상이 되어버릴지언정, 이 습관을 못 버리는 것은 아마도 내가 몽상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증상은 내게 주어진 프로젝트에서만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이상한 빈터, 자투리땅, 건물과 건물 사이, 오래된 빈집, 남이 잘 지어놓은 잘난 건물(혹은 못난 건물), 길 한복판, 심지어 남의 집 창문 안까지. 지하철보다 버스가, 운전석보다 조수석이 즐거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은밀한 취미 생활과도 같은 이 습관은 대부분 건축가의 공통된 직업병일 것이다. 근본적인 욕망의 대상이 땅(혹은 건축할 수 있는 바탕, 그라운드)에 있기에, 프로젝트의 성사와는 무관하게 생활 곳곳에서 상상력을 뻗쳐나간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시작은 어떤 이에게는 멋진 풍경 속에서 홀로 돋보이는 오브젝트이거나, 찰나의 빛이 가져다주는 그림자의 미학이거나, 규칙과 변칙이 만들어내는 리듬일 것이고, 나에겐 유쾌한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방향성이다.

나는 어린 시절 만화잡지를 구독하던 세대다. 그런 이유로 『등장하는 건축가들』을 마주할 때, 만화책 표지 바로 다음에 나오던 등장인물 소개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십 년 전 내가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굵직굵직한 대가들이 등장인물 소개란을 잔뜩 채웠다. 주인공이 전부인 시대였고, 모든 초점은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만화책은 엄마 몰래 봐야 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하드커버의 소장용 애장판으로 나와 책꽂이 한편을 번듯하게 채우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공공건축’과 ‘동네 건축가’가 사회의 필수품목이 되었다. 이제 등장인물 소개란에는 주인공보다는 조연과 엑스트라가 훨씬 많아져서 그들 없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심지어 엑스트라에게도 대사와 이름이 주어지는 시대다.

이쯤에서 나의 소개는 어디쯤, 어떻게 쓰일지 상상해본다. 아직은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설명이 필요 없는 ‘친구1’ 엑스트라일 것이다. 그래도 두어 개 이상 준공작은 있으니 한 마디 정도 지나가는 대사는 있겠지 싶다. 다만, 몇 년이 걸릴지 몰라도 시간이 흘러 이름도 좀 생기고, 인물 설명도 몇 줄 생기기를 바라본다. ‘동네의 유쾌한 몽상가’정도면 만족할 듯싶다.

그라운드

그라운드는 사람과 행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며, ‘object’가 아닌 잘 작동하는 사람 살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작업 목표로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옥상집, 청라호수공원 레이크하우스 등이 있으며, 현재 황둔리 단독주택과 꿈담교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현정은 수원대학교와 경기건축전문대학원에서 공부했고, 매스스터디스에서 10여 년간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5년부터 그라운드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여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ground.or.kr


앞선 실무 경험에서 얻은 것은?: 보는 눈과 사람들

김현정 눈과 사람. 좋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무실이었다. 결과물뿐만 아니라, 작업의 시작부터 이어지는 디자인 스터디, 재료, 리서치 등 모든 과정에서 눈 호강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10여 년간 쌓아온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된 것 같다. 그것이 독립하여 일을 시작할 때 작업에 대한 자신의 평가 잣대가 되곤 하는데, 좋은 쪽으로는 채찍질이 되어준다. 가끔 괴리감에 빠질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한 사무소를 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이 사무소를 거쳐 갔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들이 내 사무소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은 건축적 질문과 고민을 해결해주는 상대가 되기도 하고, 혼자서 하기 힘든 프로젝트의 협업자가 되기도 한다.

김상호 제주 다음 사옥이라는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휴직했고, 독립으로 복귀하면서 첫 프로젝트로 작은 다세대주택(옥상집)을 설계했다. 어떤 느낌이었나?

김현정 어려웠다. (웃음) 아마 독립하는 사람들 모두 느낄 거다. 전화 한 통화로 모든 게 해결되는 시스템 안에서 일했다. 건축주를 설득할 필요도 없고, 지적 측량이 끝난 데이터를 받아 컴퓨터 앞에 앉아 디자이너 역할만 하면 됐다. 그런데 나와보니 땅부터 같이 보러 다녀야 하더라. 그 과정이 새로워서 흥미로웠던 반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애를 먹었다. 한 번도 지적 측량에 관해 문의해본 적도 없었고, 맨 처음에 설계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사무소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는 내 역할만 하면 됐다. 팀 매니저여도 주어진 환경에서만 고민하면 됐고, 대부분 큰 프로젝트를 맡았던 터라 세세히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막상 독립하고 보니 그 전 사무소에서 만났던 상황이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클라이언트가 다르고, 설계 환경이 달랐다. 제일 그리웠던 건 팀워크다. 1부터 100까지 혼자 하려니까 생산력의 한계에 부딪혔다. 인프라의 차이다. ‘이 얼마나 모자라고 어설픈가’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렇다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개선할 시간도 인력도 부족하다.

현재 관심사는?: 행위 유도 디자인

김현정 혼자 푸는 퀴즈 같은 것인데, 애매한 모습의 건물을 풀어보는 재미다. 분명 그냥 사무실인 것 같은데 백색 등이 아닌 은은한 노란색 등이 켜진 모습이나, 창문을 통해 드러나는 내부 상황을 상상하며 즐기곤 한다. 내게는 그런 장면 장면이 중요하다. 청라호수공원 프로젝트에서도 ‘여기쯤 섰을 때 이런 장면이 보이면 좋겠다’ 식의 개인적 취향이 설계에 많이 묻어났고, 옥상집에서도 ‘거실에 앉으면 위아래 층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면 좋겠어’ 같은 나만의 욕심을 부렸다.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 설계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행위를 먼저 설정한 다음 형태를 정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다.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은유적으로 의도를 감추는 게 더 멋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다가 원래 취지가 덮여버리는 게 싫다.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도 표지판의 도움 없이 자연스럽게 길을 정해 지나갈 수 있길 바랐다.

배윤경 그런 태도는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남과 달라지고 싶다’, ‘차이를 두고 싶다’라기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 ‘내가 좋아하는 걸 누군가도 좋아해 주겠지’, ‘어딘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야’ 같은 보편성 말이다.

김현정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들도 생각해주길 바라는 약간의 강제성(?)이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 작업을 들춰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방식이 누군가에게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을까?’, ‘내가 디자인한 건물을 이용하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구나. 이게 오만일까?’, ‘그렇다고 이 모든 걸 지워버리면 남는 것이 없는데, 그럼 다른 걸 찾아야 하나?’ 이번 자리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세대주택 옥상집의 수직 공간 개념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청라호수공원 레이크하우스의 동선과 조망 개념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지향점이 있다면?: 내 이야기

청중A 앞으로 5년 후를 내다봤을 때 ‘나는 이런 작품을 하는 건축가였으면 좋겠다’ 내지는 ‘어떤 특성의 건축가면 좋겠다’고 하는 지향점이 있을까?

김현정 이전 사무소에서의 10년 경력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 내 작업으로만 채워도 풍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더 다양한 것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내 것’이 나오지 않을까. 여러 카테고리의 작업이 쌓이고 난 후에야 그 안에서 일관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5년 후에는 출신 학교나 이전 회사 이야기 없이 내가 시작한 ‘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지은 이야기가 풍성해지길 바란다.

구상하고 있는 조직의 모습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팀워크

김현정 현재는 공식적으로 일인 사무소다. 상황에 맞게 단기 인턴이나 프리랜서를 고용하거나, 디자인 팀과 협업도 많이 한다. 이렇게 운영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개인적으로 일에 시간을 100프로 배분할 수 없다 보니 소화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점조직 같은 운영 방식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향후에 여건이 되면 일인 사무소는 탈피해서 좀더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소규모 디자인 팀을 만들고 싶지만, 지금과 같은 협업 관계는 계속 유지할 예정이다.

팀으로 일하는 것이 훨씬 좋다. 혼자서 일할 때의 문제는 리뷰가 안 되는 점이다. 혼자서 되새김질하다 보면 분명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팀원이 있으면 내 생각을 보여줄 때 한 번 더 다듬게 된다. 도면도 혼자만의 스케치로 만족하지 않고 옆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게 된다. 사례 조사도 덧붙이고, 다이어그램도 그린다. 그런 과정 없이 하다 보면 어디선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청중B 같이 일하는 사람이 어떤 역할을 맡아주면 합이 잘 맞을 것 같나?

김현정 역할을 분리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각각 진행하는 게 더 좋겠다. 역할을 분리하다 보면 아무래도 위계가 생기고,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물론 한 사람이 지원자 역할을 자처한다면 모르겠지만, 둘 다 비슷한 성향이라 디자이너가 되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양보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결국 리뷰도 균형이 무너진다. 그렇게는 아무래도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다. 프로젝트를 각자 진행하면서 서로 관망자 입장으로 리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면 프로젝트가 2개 있어야 하는 맹점이 있다. 프로젝트가 하나라면 한 사람이 굉장히 인내해야 하지 않을까? (웃음)

청중C 앞으로 사무실을 어떤 방향으로 운영 또는 경영하고 싶은가?

김현정 구성원을 정한 팀이 될지, 점조직처럼 때마다 모이는 디자이너 결합체가 될지 고민해야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규모를 키우고 싶은 욕심은 있다.

한편으로는, 일과 육아의 균형이다. 아직 이 욕심도 버리지 못했다. 예전에 어느 여성 소장이 말하길, ‘하나는 버려야 한다. 둘 다 잡으려다가는 둘 다 놓칠 것’ 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일주일에 3일 일하고 2일은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이 생활에 불만은 없지만, 프로젝트 수를 늘릴 수 없다는 한계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계속 팀을 욕심내는 것 같다.

현상설계에 관심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은 사무실은 다양한 설계를 할 기회가 많지 않다. 다세대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 말고 문화시설이나 업무시설도 해보고 싶다. 그런 기회를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공모전을 찾아 나서는 편이다. 1년에 3건 정도는 꾸준히 하는 것 같다. 투자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규모로 따지면 용인 도서관 프로젝트 정도가 최대이고, 청라 레이크 프로젝트 같은 단일 용도 건물에 주로 도전한다. 그 정도는 투자하는 편이다.

현상설계의 매력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골라서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지을 수는 없을지언정, 마치 학교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것처럼 주제를 선택해서 즐겁게 설계할 수 있다. 발표 나기 전까지 당분간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웃음)

인터뷰어 & 패널

  • 김상호(정림건축문화재단 실장)
  • 배윤경(건축 칼럼니스트)

청라호수공원 레이크하우스

배치도
단면도
동측 입면도
서측 입면도
남측 입면도
북측 입면도
1층 평면도
2층 평면도

건축 개요

  • 위치: 인천시 서구 청라동 106-2
  • 주용도: 관광휴게시설
  • 대지면적: 693,177.50㎡
  • 건축면적: 736.00㎡
  • 연면적: 895.99㎡
  • 건폐율: 0.106%
  • 용적률: 0.129%
  • 층수: 지상 2층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 마감: 칼라 강판, 청고벽돌,  알루미늄 커튼월, 목재 데크
  • 의뢰방식: 설계공모
  • 공사비: 19억 8천만 원
  • 설계기간: 2017.7–2018.1
  • 공사기간: 2018.3–2019.1
  • 설계: 김현정, 원성필, 천상은
  • 구조설계: 터구조
  • 기계설계: 건창기술단
  • 전기설계: 엘림전설
  • 경관조명: 세전사
  • 시공: 남학기업
  • 건축주: 인천시 경제자유구역청
  • 사진: 신경섭

그라운드

분량6,441자 / 13분 / 도판 18장

발행일2020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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