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 작업자의 글: 질문으로부터 배운 것
윤솔희
분량1,978자 / 4분
발행일2020년 2월 29일
유형서문
관찰자로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꼽으라면 포럼이 시작되기 10분 전 발표자 주위를 감도는 묘한 긴장감을 말하겠다. 창 너머를 바라보며 거듭 물 잔을 들이키는 건축가의 표정에는 갓 완성한 발표 자료를 되뇌어보는 아득함, 아직 비어 있는 자리를 눈으로 셈해보며 번뜩 스치는 걱정, 밀려드는 청중들 사이에서 지인을 찾은 반가움 등이 빠르게 오버랩되며 지나간다. 마치 첫 소개팅 자리처럼 어색함과 기대감이 공기 중에 녹아 있다. 만약 이런 자리에 능수능란한 고수였다면 이와 같은 풋풋함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 짜릿한 반전은 포럼이 시작된 후 사위가 어두워지는 순간부터다. 발표가 시작됨과 동시에 앞서 비친 어리숙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사무소 소개부터 설계 의도, 양념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버무린 발표가 술술 이어진다. 그저 이런 자리가 드물었던 것뿐 다들 준비된 선수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번째탐색은 ‘당신은 어떤 건축가입니까’라는 단순명료한 질문으로 재야의 젊은 건축가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낸다. 질문을 받아든 입장에서는 이 두루뭉술한 질문이 다소 당황스러울 법한데, 건축가는 오히려 ‘이번 계기로 지난 시간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후기를 남긴다. 이 시간이 그저 남들 앞에 서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포럼 시작 전에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은 곧 이어질 본격적인 ‘탐색’을 향한 기대감이었을지 모르겠다.
늦었지만 나는 이 책을 위한 녹취록 정리를 맡았음을 밝혀두어야겠다. 이를테면 염탐꾼처럼 발표자 모르게 포럼 속 대화 녹음 파일을 수차례 반복해 들으면서 말을 글로 옮겨 쓰는 일을 했다. 10팀의 한숨, 농담, 때로는 서로 대답을 미루는 팀원 간의 긴밀한 속삭임까지 더듬어가며 살필 수 있었다. 동시대를 사는 30~40대 젊은 건축가라는 공통분모는 프로젝트 수주, 클라이언트와의 마찰, 관계자와의 이견 조율 등 여러 측면에서 비슷한 고민을 낳고 있었다. 눈길을 끄는 건 같은 문제라도 저마다 전략과 활로가 다르다는 것. 엇비슷한 대목에서 누군가는 수용을, 설득을, 대항을, 또는 다시 없을 거래를 제안하며 문제를 헤쳐나갔다.
발표자와 청중은 오가는 질문 속에 그 서로 다른 지점을 발견하며 나와 비슷하거나 다른 생각을 공유하는 데 한껏 빠져있었다. 특히 발표자의 문장에서는 유독 생동하는 표현이 가득했던 점을 잊을 수 없다. ‘어렵다’, ‘모르겠다’, ‘불안하다’ 처럼 꾸밈없는 속마음과, ‘깨달았다’, ‘느꼈다’, ‘배웠다’, ‘해보겠다’ 처럼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툭 터놓은 진심에 공감했고, 힘을 얻었다는 후기가 SNS에 오르기도 했다. 나도 매번 적지 않은 팬심이 발동해 ‘내 어찌 이제야 이들을 알았을꼬’ 하는 탄식과 함께 지인에게 이들 좀 보라는 오지랖까지 부려봤으니, 그 2시간 남짓한 이야기의 힘이 실로 강력하다.
이런 관계는 청중과의 상호작용이 있기에 만들어지는 법이다. 포럼 시간의 절반은 청중을 위한 몫이라고 해도 좋다. 건축가의 일이 궁금한 대학생, 내 집 설계를 공부하러 온 일반인, 응원 나온 친구 건축가, 요즘 젊은 건축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선배 건축가 등 비슷한 듯 다른 관심이 한데 모였다. 이들은 마치 대지에서 농작물을 캐듯이 사방에서 질문을 던졌고, 건축가는 ‘저도 몰랐는데 그렇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하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발표석과 청중석의 거리가 가까워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2018년 여름 ‘우리가 잘 몰랐던 새로운 건축가를 알아보자’며 시작된 두번째탐색이 3년 차를 앞두고 있다. 그새 이 자리에 이름을 올린 건축가도 20팀이 됐다. 표현은 달랐지만 녹음 파일 속 건축가들이 공통으로 전한 메시지를 여기에 덧붙인다: ‘이제 시작입니다. 더 고민하고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어떤 건축가입니까?’라는 물음표는 출발선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필요했던 지침, 나아가 독려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녹취록 작업자의 글: 질문으로부터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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