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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시의 시간성

박정현

전봉희는 2013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목천건축아카이브의 구술집 시리즈 서문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전 세대의 건축가를 갖게 되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표현이다. 30대에서 80대까지 세대별 건축가가 모두 있다는 이 간단한 사실에서 많은 것을 추출해낼 수 있다. 현대 건축 초기의 주요 인물 가운데 박길룡(1898~1943 )은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박동진(1899~1980 ), 이천승(1910~1992 ), 장기인(1916~2006 ) 등은 모두 80세 이상 생존했다. 그러나 말년의 그들이 건축가로서 당대 담론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박동진은 1950년대에, 이천승은 1960년대 이후 담론의 장에서 목소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세대로 불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예외적인 소수였다. 공교롭게도 나상진, 김중업, 김수근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50, 66, 55세에 타계했다. 그동안 한국에는 나이 든 건축가가 없었다. 2010년대 들어서 70~80대가 된 일군의 1930년대생 건축가들이 처음이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의 대학에서 현대 건축을 공부하고 1960년대 이후 독립해 자신의 사무실을 일구었으며, 설계 현장에서는 멀어졌더라도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세대다. 국가의 경제 성장과 개인의 생애 주기가 일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양식 건축 등과 구분되는 ) ‘현대 건축’ , (몇몇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불리는 ) ‘세대’ 등의 의미를 따진다면 이들이 어쩌면 온전한 한국 현대 건축 1세대다. 드디어 한국에서 현대 건축이 늙기 시작한 것이다. 이 늙음은 정확히 젊음과 공명한다. 2010년대 젊은 건축가 현상은 이전과 비교하면 무척 낯선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건축사는 젊은 건축가들의 연대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되었을 때 김수근은 20대 후반이었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했을 때도 아직 30대였다. 김중업은 42세에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설계했다. 이희태가 국립극장 설계를 맡았을 때도 45세에 불과했다. 김기웅이 독립기념관, 김석철이 예술의전당 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을 때도 채 40이 되지 않았다.1 1980년대 말 새로운 기치를 내건 건축가 모임, 4.3그룹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30~40대 건축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 지금이라면 젊은건축가상 응모 대상자들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저들을 두고 젊은 건축가라고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모두가 젊을 때 젊음은 젊음으로 호출되지 않았다. 젊음은 나이 듦을 배경으로 할 때만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대 건축이 나이 든 2010년대 그리 젊지 않은 40대 건축가는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젊음과 늙음의 분화는 건축가의 세대 구분뿐 아니라 여러 현상을 낳았다. 먼저 아카이브가 등장했다. 아카이브 자체야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건축가의 작업과 생애를 충실히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와 전시를 꾸려나가야 한다는 (또는 나갈 수 있다는 ) 인식의 확산은 분명 지난 10년 사이의 일이다. 국내에서 건축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 아카이브와 목천김정식문화재단의 목천건축아카이브 모두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목천건축아카이브가 원로 건축가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향후 연구를 위한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카이브는 기관의 특성상 전시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당장의 전시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동인이자 아카이브의 결과이기도 했다. 여기서 최근 몇 년간 한국 건축 전시의 한 줄기인 아카이브 기반 전시의 특징이 드러난다. 아카이브의 생성과 동시에 이루어진 전시는 해석적이기보다 발견적이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2013),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2014),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 건축가 김종성》(2014), 《김태수: Working in Two Worlds》(2016), 《윤승중: 건축, 문장을 그리다》(2017), 《김중업 다이얼로그》(2018) 등 해당 건축가 개인을 회고적으로 조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요 건축 전시는 충분한 해석의 토대 위에 서 있기보다 새로운 자료의 발견을 공유하고 비평과 역사 쓰기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전시는 비평의 결과가 아니라 시작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들 자료를 가장 오래 들여다본 이는 역사가도 아키비스트도 아닌 큐레이터였다. 개인이 아닌 여러 집단의 성좌를 다룬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2017)도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다양한 흐름과 담론의 지도 역시 익힌 것이라기보다 날것에 가까웠다. 최초 소장자의 손을 처음 떠난 수천 장의 문서 더미는 온전히 해석되지 못한 채 쇼케이스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는 2010년대 한국 현대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이자 성과였다. 늙은 현대 건축의 젊었던 시절을 추수하는 일은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다.

시간의 누적을 전제하는 아카이브가 현대 건축의 나이듦의 징후라면, 당대성을 확보하면서 건축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것은 젊음에게 요청된 과제였다. 건축사협의회(이하 새건협)는 설립 직후부터 신진 건축가를 발굴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고, 2003년 ‘KAI 신인상’ 을 제정했다. 2008년 첫 수상자를 낸 젊은건축가상의 전신이다. 해마다 3~4팀의 수상자를 냈음에도, 한동안 이 상과 수상자에 주목한 이들은 드물었다.2 생물학적 나이가 젊음을 인증했으나 작업으로는 윗세대와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많은 건물을 지어볼 기회를 누렸다. 수상 기념 작품집을 완성작의 사진과 도면으로 채우는 것도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사정은 2011년 전후로 달라진다. 지금까지 부차적인 일이라고 치부되어 온 인스톨레이션, 공공예술 프로젝트, 리서치 작업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채우지 못한 이들의 젊음은 오히려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완공한 건물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건축가의 결격 사유가 되지 않았다. 잠정적이나마 ‘젊은’ 이라는 기표에 ‘확장된 장’ 이라는 기의가 머물렀다.

환원주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세대론에 대한 평가는 양분된다. 2008년 경제 위기나 인구론적 변화 등의 여파로 읽는 이도 있고, 허구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대론의 이론적 엄밀함과 별개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카이브의 등장과 젊은 건축가의 호명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건축가가 세대별로 분화되었다는 뜻은 세대별로 다른 요구를 요청받았다는 것이기도 하다.3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MoMA와 함께 개최한 젊은건축가프로그램은 이런 분위기를 재확인했다. 젊은 건축가들은 전시, 이전과는 다른 건축 전시, 무엇보다 설치나 파빌리온에 능해야 했다. 이 능력은 그 세대 내 건축가들 사이에서 분명한 분화를 이끌었다. 미술관이 원하는 건축가가 따로 있었다. 이론이나 비평에 능한 건축가의 자리는 이제 전시에 능한 건축가가 차지했다. 다시 전시는 담론의 결과가 아니라 담론을 추동한다.

건축 전시는 언제나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건축부가 신설되어, 건축은 동양화, 서양화, 서예, 공예 등 미술과 함께 전시됨으로써 하나의 예술 장르로 영역을 확보해나갔다. 한국에서 건축이라는 기율(discipline)의 시작은 전시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4 1966년 개최된 도시계획 모형 전시회는 남한 전체를 대지로 삼은 개발 체제에서 건축, 산업, 토목, 도시는 각자의 쓸모를 모형으로 시각화했다. 관료 체제만 전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야심 찬 건축가들 역시 전시를 자신의 욕망을 부풀려 보이게 하는 렌즈로 삼았다. 김중업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7년 전시회를 열어 신화를 직접 써나갔다. 유학 후 미국에서 활동해온 김태수는 1982년 자비로 전시를 개최해 자신의 건축 프로젝트를 국내에 발표했다. 

한국 최초의 건축가 개인전으로 평가되는 《김중업 건축 작품전》 / 사진: 김중업건축 박물관 소장

길게 이어질 수 있는 이 전통적인 건축 전시 목록 뒤에 아카이브와 파빌리온이라는 최근 전시를 계속 기입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목록(온전하게 작성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과 최근 움직임 사이, 아카이브와 파빌리온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2010년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모종의 구분선이 필요하다. 이 가설적인 선으로 우리는 앞과 뒤의 ‘시간성’ 을 가늠해볼 수 있다. 지난 세기 건축 전시의 시제는 미래형 또는 미래완료형이었다. 국전이라는 권위를 통해 건축은 회화나 조각과 유사한 지위를 지닌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는 비슷했을지라도 예술의 존재론적 위치는 크게 달랐다. 국전에 출품된 건축 작업은 예술 – 예술가 – 예술작품의 순환고리에 따라 해석의 깊이를 더해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작업의 절대다수는 곧 실제로 지어질 것을 상정한 계획안이었다. 한편으로는 건축주의 의뢰와 무관하게 건축가 스스로 그린 장래의 도시와 건축도 많았다. 전시의 주목적은 다가올 것을 선취해서 권력과 대중에게 제시하는 일이었다. 이때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건축은 도래할 미래를 물리적으로 구축하는 매체, 현실태가 아닌 잠재태의 구현이었다. 이는 현대 건축에 주어진 역할이었고, 발전 체제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대 건축이 처한 달라진 상황은 바로 시간성의 변화로도 나타난다.

아카이브가 단순한 과거의 집적체여서는 안 되고 다가올 미래를 물어야 한다는 데리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으고 통일하고 분류하고 동일시하는 아카이브의 시제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5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원용해 아카이브가 생겨날 때의 급진성과 생겨난 후의 보수성을 함께 강조하며 아카이브는 ‘혁명적이며 전통지향적’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아카이브가 후자로 기우는 것을 우려하고 전자의 성격을 요청하는 것에 가깝다.6 기본적으로 아카이브의 시제는 과거다. 오늘의 가까운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는 전시에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이로써 미래를 탐문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과제다. 지난해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의 전시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이 대표적인 예다. 1960년대 발전 체제가 낳은 싱크탱크이자 용역 엔지니어링 업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소환하는 이 전시에서 아카이브의 시간성과 새로운 계획의 시간성은 어긋나면서도 중첩되어 있었다. 한국관의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를 오갔다. 과거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아카이브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아카이브의 그물에 쉬이 걸리지 않았고, 동시에 과거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도약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다 철거되는 가설 임시 구조물, 확정된 프로그램 대신 가변적인 이벤트, 특정 분과에 속하지 않는 성격 등 파빌리온은 현대 건축에 대한 진단이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다. 분명한 목적에 따라 탁월하게 조직된 공간은 도시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 한 공동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여긴 이념을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태도는 현대 건축의 핵심 교의였다.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온전히 눈 감지 않는 한 이 이데올로기를 온전히 폐기하기란 불가능하다. 파빌리온에는 이 믿음이 현대에 맞게 재조정되어 투사된다. 경직되고 실효성이 떨어진 현대 건축이라는 처방전 대신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전략이라는 평가 말이다. 도시의 빈 공간을 한여름 마당, 팝업 스토어, 디스코텍, 토론의 현장 등으로 바꾸는 파빌리온은 ‘지금, 여기’ 를 포착해내는 장치다. 매 순간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시의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가볍고 융통성 높은 파빌리온은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 다. 100년 전 건축가들이 꿈꾼 사회적 응축기의 자리에는 지어지고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가설 구조물이 들어섰다. 모더니즘의 드높았던 이념에 비추어 파빌리온이 대응하는 요구는 즉흥적이고 부차적인 문제라는 말이 아니다. 파빌리온의 시간이 현재의 반복임을, 한정된 시간 동안 존재하는 파빌리온에서 미래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파빌리온 건축가들에게 과제는 오늘을 주조하는 것이지 내일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건축 전시는 과거와 현재를 주시한다. 서울시가 주도하는 현상설계 당선작을 비롯한 공공 프로젝트들을 전시하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예전의 건축 전시처럼 가까운 미래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유형의 건축 전시가 예전의 활력을 잃어버렸음을, 좀처럼 긍정적인 평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래에 드리운 과거와 현재의 긴 그림자는 건축만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큰 특징이다. 담론과 이론의 영역에서 한때 존재했던 “‘약한 메시아주의적’ 희망” 은 사라졌고, “그 어떤 새로운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침울한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 했다. “미래에 발생할 중요한 사건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중요한 사건으로 초점이 이동” 했다. 이 진단 자체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현대의 한가운데서 현대 이후를 예언한 니체는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9 더 이상 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없는 시대, 모두가 뒤로 눈길을 건네는 지금, 앞으로 내던진다는 의미의 ‘프로젝트(project)’ 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과거를 충실히 기록하는 아카이브와 현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파빌리온이 이 시대의 건축 전시의 양상을 대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또 이 두 시간성을 담는 전시가 사후적이기 마련인 비평에 선행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상황이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쌓아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야 한다. 2010년대도 저물고 있다.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2013), 『건축의 고전적 언어』(2016) 등을 번역했으며, 『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 3그룹』(2014), 『아키토피아의 실험』(2015),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2015) 등을 공저했다. 2011 광주디자인 비엔날레, 《Out of the Ordinary》(2015),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2017),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 전시의 시간성

분량6,875자 / 2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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