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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시대의 감각, 사유와 수행

배형민

전 세계가 전시의 시대에 돌입했다. 21세기 전후를 기점으로 관광 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의 관객 수가 급성장했다.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스소니언과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같이 역사, 유물, 과학 박물관이 관광객의 주 방문지이지만 테이트, MoMA, 퐁피두센터와 같은 근현대 미술관도 매년 400만 명 전후의 관람객 수를 유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 개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지속적인 확장으로 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관객 동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전시가 글로벌 현상으로 확장되면서 비엔날레의 촉진제가 되었고 현재 20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전 세계에서 개최되고 있다. 건축은 확장된 전시 시장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의 붐을 함께 탔다. 이탈리아 국립21세기미술관(MAXXI )이 탄생하고, 프랑스 국립건축박물관이 재정비되고, 미국 현대 건축의 탄생지 시카고에서 건축비엔날레가 출범한 것은 건축 전시의 성장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 정부들이 앞다투어 비엔날레를 창설했고,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건축이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시행착오와 기복도 물론 있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디자인 박람회로 바뀌었지만, 서울시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창설했다. 건축 설계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건축 문화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문화 시장의 규모는 아주 작지만,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맥락에서 한국 건축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향방, 건축 아카이브와 컬렉션의 지속성이 달려 있는 중요한 시장이다.

그렇다면 전시의 시대는 얼마나 지속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 관광과 문화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겠지만, 지구 환경의 문제, 동서양 문화의 전이, 사회 양극화가 전개되면서 그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미세한 건축 전시의 문제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건축 전시에 대한 관심은 관광 문화 산업의 맥락과 함께 사회가 생각하고, 느끼고, 소통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가 만들었던 인쇄 매체의 시대, 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체험의 영역이 넓어지겠지만, 아날로그 양식과 직접적인 신체의 체험들은 여전히 전시 문화에서 중요할 것이다. 디지털 매체와 융합, 공존하면서 새로운 체험 양식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이 글은 건축 전시에 잠재한 이런 특유의 체험 양식에 대한 소론이다. 필자가 참여하고 주도했던 전시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건축 전시의 방법론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건축 전시의 내용은 총체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짧은 글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다른 전시의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건축 전시 특유의 매체 속성을 짚어보면서 전시의 퍼포먼스, 다시 말해서 그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문제, 건축 전시에서 큐레이터의 제도와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국 현대 건축의 형성기는 물론, 최근까지도 여러 건축전에서 실제로 큐레이터가 기획의 중심에 있었던 전시가 많지 않았다. 모든 전시는 누군가가 그 진행을 맡는다. 하지만 작가(건축가 )와 독립된 위치에서 전시의 목적, 방법, 전략, 설치 등을 총괄하는 큐레이터가 있었던 전시는 거의 없다. 큐레이터의 부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국 현대 건축의 짧은 역사보다 더 짧은 것이 한국 건축 전시의 역사이니 건축 큐레이터가 낯선 존재인 것은 당연하다. 큐레이터가 없었던 이유는 전시가 미술관 또는 박물관의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작품을 출연하는 건축가들이나 건축 협회들이 자생적으로 전시를 올렸기 때문이다. 작가가 힘들게 만든 전시 프로젝트에서는 설사 큐레이터의 직함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그는 작가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인 입지를 가질 수가 없다. 작가가 큐레이터와의 긴장 관계 없이 스스로 만든 전시는 자기 홍보가 되기 일쑤다. 우리나라의 건축 단체들이 주관하여 회원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전시가 그 극단적인 모습이다. 조직으로서 미술관과 박물관은 체질적으로 보수적이다. 하지만 건축가와는 다른 아젠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상보적인 긴장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건축 전시에서 독립된 큐레이터가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건축 전시의 생명인 다양성과 혼종성이 발현될 수 있다.

다양성과 혼종성은 큐레이팅의 조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방법론 측면에서도 건축 전시의 핵심이다. 전시는 주제로 출발하든지, 작가(건축가 )를 중심에 둔다. 주제에 충실한 전시는 감흥이 없는 전시가 되기 일쑤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지만 감성적 호소력이 없으면 애당초의 개념도 설득력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책을 읽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작가와 작품을 중심에 둘 경우 왜 전시를 하는지를 알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건축 전시는 실제 건물을 찾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건축 전시는 건물을 경험하는 대체 수단이 아니다. 건축 전시는 개인과 집단의 체험 측면에서 지어진 공간 환경과는 다른 것이고, 생각, 이미지, 공간을 엮어 체험과 지식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건축 전시의 잠재력을 2014년 미지의 북한 건축을 남한의 건축과 함께 다루었던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을 기획하면서 직접 경험했다. 《한반도 오감도》가 황금사자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전했다.

“우선 렘(Rem Koolhaas)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근대성의 흡수’ 라는 공통의 주제를 국가관에 요구함으로써 남북한 건축을 다루어야 하는 명분을 찾았다. 건축 역사와 비평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지금 남북한 건축에 대한 학술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간의 교류가 없고, 북한 건축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는 가능하다. 불완전한 지식을 가진 상황에서도 전시의 열린 공간이 남북한 건축을 한 자리에 모아 비교, 병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시 공간의 힘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시에 들어올 남북한의 작품과 작가들이 산만하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필자는 전시 책자의 구상과 편집을 시작했다. 책의 논리, 말의 논리를 따라 전시 콘텐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관의 소주제들이 도출되었다. 그런데 책의 논리로 만들어진 개념들이 다시 전시를 바꾸어놓았다. 전시 공간을 구획하는 방식, 작품의 배열과 위치 등이 책의 개념에 의해 바뀌게 되었다. 램이 우리에게 던진 과제가 말과 사물, 개념과 공간의 순환 고리를 작동시켜 남북한 건축에 대한 최초의 전시회, 남북한 건축을 동시에 다루는 책을 만들게 했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는 예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시와 책을 만들게 했고, 한반도의 건축을 포함하여 근대성과 건축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비엔날레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언어가 만드는 순차적인 논리에 의지하는 학술서보다는 《한반도 오감도》의 폭넓은 매체 양식이 남북한 건축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더 효과적으로 열어줬다. 《한반도 오감도》가 받은 관심과 평가와는 별개로 전시 큐레이터로서 기뻤던 것은 다른 종류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생산적인 교감이었다. 말을 다루는 학자,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 이미지를 다루는 그래픽 디자이너, 퍼포먼스를 다루는 안무가가 자신의 전문 영역을 주도하면서 상대의 작업을 이해하고, 서로 비판하면서 제안을 주고받는 과정이 건축 전시 기획의 묘미다. 건축 전시의 기획 과정은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하는 여러 감각과 인식 체계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말과 사물, 이미지와 소리가 어우러지는 과정을 설치 단계마다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건축 전시 기획자로서의 기본적인 즐거움이다.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14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매스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에 이어 2017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도시전이 DDP 디자인 전시관에 설치되는 과정에서 공간의 감각이 중첩 전환되는 모습을 보면서 누렸던 체험이다. 전시는 벽에 검은색 페인트만 칠해져 있는 블랙 박스, 또는 모호한 하얀 곡면 벽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사진이 설치되면서 깨끗한 모더니즘의 시각성이 돋보이는 상태로, 큰 사진 위와 옆에 작은 이미지, 모니터, 모형, 가구, 그래픽 정보가 가득 더해진 상태로, 마지막으로 동영상과 연동된 소리가 붙으면서 완성되었다. 시각과 함께 어우러진 청각이 전시의 총체적인 인식과 경험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꼈다. 모두 작동하는 공간을 위한 장치들이다. 이런 감각과 개념의 분포를 통해 전시장 내에서 수행성을 가진 건축 전시가 펼쳐진다. 관객이 피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와 참여를 동반하는 건축 전시 특유의 속성이다.

건축 전시는 주제와 작가 선정만큼이나 전시의 조직, 과정, 현장이 그 성격을 좌우한다. 특히 건축 전시가 도시를 대상으로 삼거나 일상의 도시 공간 속으로 진입할 때 그 지평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근대가 설정한 제도와 규정의 틀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당한 일이기도 하다. ‘건축 전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 필자는 그 가능성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초대 감독을 지내면서 직접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서울시가 주관하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탄생의 논리에서부터 광범위한 도시 문제를 대면하고 시정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비엔날레를 전제로 했다. 건축과 예술의 기획이 정치와 정책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이념을 미련 없이 뒤로 하고, 총감독으로서 현실에 개입하는 비엔날레를 구상했다. 특히 주요 부문인 ‘현장 프로젝트 서울’ 은 일시적인 전시 설치로 기능하기보다 비엔날레 기간을 넘어 작더라도 지속적인 도시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기획했다. 결과적으로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에서 《생산도시》의 일부 영역이 현재까지도 계속 작동하고 있고, 도시전은 세계 도시 간 교류를 위한 지속적인 플랫폼으로서 가능성이 확인되고 있다. 부분적인 성과였지만, 도시에 관한 전시가 어떻게 기획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총감독으로서의 답이었다. 누가 관객이며 누구를 위한 전시인가 하는 질문에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시민과 함께 장소를 만드는 행위라고 답했던 것이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현장과의 관계, 주제의 설정 방식에서 베니스비엔날레와 대비된다. 베니스비엔날레는 거주 인구 27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서 개최된다. 1,000만 인구의 서울과 달리 베니스를 점유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관광객이다. 비엔날레 기간은 특히 방문자가 주민을 압도한다. 관광은 소모적 공간 점유의 전형이자 전시 시장을 키운 가장 큰 요인이다. 베니스는 박제된 박물관 도시가 되어버렸다. 연중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베니스, 독특한 비장소로서 베니스는 아름다운 패러독스의 도시다.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베니스에 오는 관람객은 주로 국제적인 전문가 커뮤니티의 일원들이다. 베니스라는 국제적 허브에 세계 건축계 인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건축으로 만나고”(People Meet in Architecture, 2009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주제 ),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 2011)를 확인하고, 건축의 “기본 원칙”(Fundamentals, 2014)과 “자유 공간” (Free Space, 2018)에 관해 논한다. 2년마다 감독이 바뀌면서 예년 주제와 관계없이, 베니스라는 현장과 관계없이 감독이 설정하는 이슈와 방식으로 전시가 펼쳐진다. 베니스비엔날레와 대조적으로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일상의 도시와 함께하는 건축 전시를 추구했다. 이러한 기획은 비엔날레의 커뮤니티가 과연 시민과 함께 장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탐색이었다.

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생산도시》, 세운상가 로보틱스 랩 / 사진: Kyungsub Shin Studio, 사진 제공: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건축 전시의 감각과 사유, 수행은 큐레이터 개인의 기획 방법론이나 취향 이상의 문제다. 앞서 독립적인 건축 큐레이터의 역할을 역설했던 것도 곧 건축 박물관과 같은 조직의 당위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2019년 현재 공적 제도 속에 건축 큐레이터가 정규 직책으로 자리 잡고 있는 기관은 국립현대미술관밖에 없다. 조직은 큐레이터를 통제하기도 하지만, 작가(건축가)와의 관계에서 일정한 독립성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큐레이터의 전문성을 보장해주고 키워주는 건축 박물관의 설립은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건축계의 숙원 사업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건축 박물관은 건축이 집을 짓기 위한 과정으로서 건축이라는 근대적인 규정을 넘어서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제도와 기율의 지평에 자리 잡는 박물관이어야 한다. 오감과 사유가 열려 있는 조건에서 건축 작업을 하고, 글을 쓰고, 전시를 올려야 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 상황이다. 전시의 시대는 위기의 시대며 탐색의 시대다. 환경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함께 안은 채로 전시의 시대가 흐르고 있다. 건축과 예술이 서구 중심적으로 고착되어 있던 시대가 저문 상황에서 우리의 현실, 새로운 세계와 맞닿아 있는 말과 사물, 감성과 생각을 찾아가고 있다. 공간, 텍토닉스, 퍼포먼스, 어버니즘 같은 건축의 굵직한 주제들을 통째로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주로 서구의 건축 담론에서 발전시켜온 이런 생각과 가치를 열린 사유와 감각으로 포섭하고 비판하고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대의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잊어버린 것들을 상기시켜야 한다. 좋은 건축과 좋은 글과 마찬가지로 좋은 전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감각과 사유의 혼종, 지속적인 참여와 수행은 건축 전시 특유의 힘과 잠재력이다. 필자가 참여하고 주도했던 전시들은 어떤 메시지를 설파하거나 선언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의 고민을 더 보편적인 감각과 사유의 틀 속에 담아 관객과 함께 고민하는 탐색의 도구를 만들고자 했다.

* 이 원고는 2015년 4월 22일 『건축신문』 13호에 게재되었던 「건축 전시의 감각과 사유」를 확장한 글이다.


배형민

건축 역사가, 비평가, 큐레이터이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다.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두 차 례 풀브라이트 스콜라를 지냈다. 대표 저서로 『Portfolio and the Diagram』(2002), 『한국건축개념사전』(2013), 『감각의 단면 – 승효상의 건축』(2007), 『의심이 힘이다 – 배형민과 최문규의 건축대화』(2019), 『아모레퍼시픽의 건축』(2018) 등이 있다. 2008년과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큐레이터를 역임했고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수석 큐레이터 등 여러 국제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 시대의 감각, 사유와 수행

분량6,760자 / 15분 / 도판 3장

발행일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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