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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판을 만드는 일

정다영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을 시작하며 2019년 1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건축큐레이팅워크숍(이하 CAW )이 첫 문 을 열었다. 미술과는 다른 건축을 위한 큐레이팅 방법론을 고민해보고자 만들어진 이 자리는 6회 강의로 구성한 정기 워크숍을 거쳐 올해 여름 ‘도시 큐레이팅’ 을 주제로 한 후속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건축 분야 기획자들이 주로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건축가와 타 분 야 실무자들까지 모여 풍성한 논의를 나눴다. 그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함께 탐색했던 내용을 확장해보고자 이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

전시의 시대에 도래한 지금 ‘큐레이션’ 과 ‘큐레이터’ 와 같은 말들이 공중을 떠돌고 있다. 뮤지엄에서 예술의 수호자로서 작품과 관객을 ‘치유’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큐레이터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 건축 큐레이팅은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전통과 다가오는 미래를 향한 실천의 경계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큐레이팅’ 앞에 ‘건축’ 이 붙는 순간, 이 결합은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길을 더듬는 상황에 빠져든다. 건축 큐레이팅에 대해 건축계가 공유할 만한 공동의 지식과 전문성, 규율이 쌓이지 못한 채 휘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 분야의 기획을 직능으로 삼는 사람이 부족하고 그런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 부재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설계 외의 다른 형태의 건축 실천이 활발해진 오늘날, 건축 큐레이팅은 더 깊은 연구와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짓지 않는 건축, 건축 큐레이팅은 한국에서 이제 막 진지한 논의를 얻는 시점에 놓여 있다. 건축 큐레이팅의 이론과 역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연대하기 위한 자리가 필요해 보인다.

전시로 시작하는 건축 큐레이팅

건축 큐레이팅을 실천하는 기본적이고 가시적인 일은 ‘전시’ 다. 좁은 의미의 큐레이팅은 전시를 생산하는 일이다. 건축 전시는 여전히 건축 큐레이팅의 주요한 영역이며 최근 건축가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파빌리온 계열의 건축가’ 를 비롯해 미술관 등의 전시 공간에서 건물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건축을 수행하는 ‘또 다른 건축가들’ 이 두드러진다. 대규모 부지와 자본이 부족하고 건축 생산과 삶의 양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건축은 제삼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무거운 건축이 대지를 벗어나 가벼운 콘텐츠의 형태로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전시를 기반으로 한 건축 큐레이팅은 여기에 유효한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건축 전시는 공고한 제도 위에서 오랜 큐레토리얼 경험과 이론을 축적한 미술 전시와 그 방법론과 평가 도구가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어휘가 부족하다. 어휘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건축 큐레이팅과 관련된 주변부를 통과해야 한다. 자료를 발굴하고 축적하는 ‘아카이빙’ , 건축의 다양한 시각 매체를 분석하고 그것을 공간과 지면에 배치하는 ‘편집과 디자인’ 등 전시를 매개로 한 활동들은 건축 큐레이팅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 된다. 따라서 이 책은 건축 큐레이팅을 살피는 주요 대상을 ‘전시’ 로 삼았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크 게 네 개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분은 명확히 분리되어 있기보다 느슨하게 연결되면서 아홉 편의 글이 이어진다. 건축 전시 자체에 대한 여러 비평적 지대를 살피는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이어서 건축가와 건축 편집자가 건축 기획을 바라보는 입장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고, 전시장 내부와 바깥에서 진행한 건축 전시의 사례들도 분석해본다. 건축을 경계로 디자인과 미술 등 인접 지대를 오갈 때 촉발되는 이슈들이 뒤를 잇는다. 끝부분에는 이 책의 발간 계기가 된 CAW 정기 워크숍의 강의 주제를 기록하고, 발표자들과 함께한 좌담을 정리해 담았다. 필자들은 큐레이터와 역사학자, 평론가, 에디터 등 최근 한국에서 건축 전시를 생산하는 주요 주체로 떠오른 이들과 건축가의 전통적인 업역에 그치지 않고 건축 지식의 외연적 확장을 도모하는 건축가들을 초대했다. 또한 시각문화연구자, 그래픽 디자이너 등 인접 분야 전문가로서 건축과 맞닿는 여러 탐색 지대를 열어줄 수 있는 분들에게도 글을 청했다.

배형민은 건축 역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서 건축 전시의 시대가 도래함과 동시에 그것을 사유하고 감각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건축 전시는 개인의 미감이나 취향 문제가 아니라 건축 박물관 설립과 같은 당위적인 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입장은 실제로 제도 기관에서 건축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정다영의 글과 연결된다. 정다영은 건축 전시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소장품 체계와 실행 방법론, 행정적·제도적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축비평가 박정현은 최근 한국 건축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아카이브 기반의 전시와 파빌리온 설치라는 두 유형을 짚어보며 건축 전시의 시간성에 대해 질문한다.

건축가 최춘웅은 건축 설계와 건축 전시 모두 독자적인 형식과 규율을 가진 건축 지식을 생산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각 영역은 어느 하나에 포섭되거나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평행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건축 편집자인 김상호는 건축의 정보를 분석하고 가공하여 도출되는 편집된 건축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동시에 이러한 편집된 건축을 펼치는 장이었던 지면이 해체되고 다른 방식의 기획적 실천들이 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시각문화연구자 윤원화는 미술관 건물 그 자체가 전시 대상이 된 사례들을 중심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라는 형태로 건축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큐레이터 이성민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공공예술과 건축 큐레이팅을 교차시켜 나오는 질문들을 검토해본다. 

건축가 정현은 2010년 이후 건축계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계 전반에 새롭게 출현한 시각 담론과 그것을 가시화한 크고 작은 전시와 사건을 서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 전시들이 건축 큐레이팅과 연결되는 접점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설명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동신은 CAW에 직접 참여하며 느낀 몇 가지 단편을 중심으로 건축과 디자인 등 비미술 전시를 기획할 때 발생하는 거리 감각에 관해 이야기한다.

부록으로 수록한 CAW 라운드테이블은 전시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모색해야 할 건축 큐레이팅의 확장을 위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도시의 물리적 환경부터 미시적인 사물이 가진 공간감에 이르기까지 건축의 스케일 감각을 활용하는 일이 건축 큐레이팅의 유효한 방법론이 될 것을 전망한다.

2010년 이후 한국 건축의 어떤 방향들

2010년 이후 한국 건축계 상황을 살펴보면 건축 전시나 큐레이팅 이슈들이 확실히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목천김정식문화재단의 건축 아카이브, 건축 교육 · 연구 · 출판 · 전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출범, 건축 전문 큐레이터와 아키비스트의 활동이 두드러진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 전시의 활성화 모두 2010년 즈음이 기점이었다. 그 밖에도 오픈하우스서울이나 건축평단, 미지행 등 기획과 연구, 비평,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비제도권 집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건축 큐레이팅 실천에서 전시장을 벗어난 이들의 활동과 역할 또한 CAW가 앞으로 살펴보려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한국 건축계에서 제대로 평가된 적은 없지만, 이 현상들이야말로 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하나의 징후로 보고 공동의 지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건축 큐레이팅이 지금 시대의 한시적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쌓여있는 것보다 앞으로 열어젖힐 일이 더 많이 남아있고, 그래서 도전해볼 만하다.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산과 조건, 지금 실행 가능한 일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1910년부터 건축디자인 분과를 두고 건축 전시와 큐레토리얼 연구를 실행해온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 있는 미국과 한국의 상황은 무척 다르다. 콜럼비아 건축전문대학원의 ‘ 건축 비평, 큐레토리얼, 컨셉추얼 프로그램(Critical, Curatorial, and Conceptual Practices in Architecture )’ 처럼 건축 큐레이팅 과정이 교육 기관에 제도화된 그쪽과 이쪽의 사정은 대등하지 않다. 그들이 수행한 일들이 우리에게 참조점이 될 수 는 있겠지만 목표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실천을 짚어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그런 다음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꿈을 항해하기 위한 지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그런 그림을 설계할 수 있는 합의된 어휘를 발굴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모아 글을 받고 책을 엮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한 국 건축의 또 다른 방향성을 살펴보는 단서로도 유용할 것이다.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역사적이거나 이론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니다. 미술사 기반의 큐레토리얼 이론을 탐색하는 책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간 기획에 무언가를 보태려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건축과 큐레이팅이 만나 만들어지는 중간지대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촉발되는 의미를 공론화하는 것이다. 건축 큐레이팅은 그간 건축계와 미술계 어느 지대에도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주변부에 가까웠다. 이 책이 그 주변부가 가진 힘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했다면 소임을 다한 셈이다. 중간 지대를 무엇으로 채울지는 각자의 관심과 전문영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건축을 매개로 일을 만들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 책이 각자의 실천 도구로 유용하게 쓰이기 바란다. 기획이란 원래 누군가를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의 판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판을 만드는 일

분량4,606자 / 15분

발행일2019년 8월 29일

유형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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