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기획: 미술관 안 젊은 건축가
정다영
분량5,772자 / 11분
발행일2019년 3월 25일
유형비평
“그들은 건축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예술 세계의 전시나 공간 구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신세대 건축가들을 저 혼자 ‘파빌리온 계열’이라고 부릅니다.”1
구마 겐고(Kengo Kuma)는 자신이 쓴 책 『나, 건축가 구마 겐고』에서 건축가의 유형을 “20세기형 건축가”와 차세대 건축가인 “파빌리온 계열”로 구분한다. 주로 30–40대 건축가인 파빌리온 계열의 건축가들은 최근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건축 전문 제도기관은 아니지만 건축과 디자인, 영화를 포함한 시각예술 전반을 연구하고 전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에서 파빌리온 계열 건축가들의 작업을 선보이는 중요한 기관 중 하나다. 화제가 되었던 프로젝트 중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공동주최하고 현대카드가 후원하여 개최했던 ‘젊은건축가프로그램(YAP)’이 있다. 이는 2013년 서울 도심에 새롭게 건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 한복판에 여름용 파빌리온을 짓는 프로젝트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일 년에 한 번, 총 네 차례의 작품을 선보인 YAP는 추천인을 통해 만 45세 이하의 젊은 건축가들을 추천받고,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심사해 최종 후보군을 선정했다. 후보군은 각자 설계안을 프레젠테이션하고, 심사위원들이 최종안을 선정했다. 주최 측과 후원사의 명성과 이들의 지원 그리고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역사적 장소를 비롯한 여러 장점이 이 프로그램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많은 젊은 건축가가 응모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의 젊은 건축가를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였다. YAP 당선작은 한여름 가장 흥행한 ‘전시’로 미술관 관람객 수 증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건축이 미술관 안에서 긍정적으로 깊이 각인되는 특별한 시기가 해마다 3개월 정도 지속된 셈이다.
선행되어야만 하는 경험
YAP 이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건축 프로젝트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 건축이 미술관으로 들어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의 10개의 소장품 부문 중 건축이 단독으로 존재하지만2, 이는 미술관의 의지라기보다 소장품을 수집할 당시 국전에 건축이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가 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라는 가시적인 사업을 통해 건축을 선보인 일은 드물었다. 2019년 올해 개관 50주년이 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에서 한국 건축가를 단독으로 조명한 첫 개인전이 1990년에 열린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그 이후에는 건축학회 등 관련 단체들이나 외부 전문가와 협업하여 올린 전시가 간혹 개최되는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를 선정해 개인전을 올리는 <올해의 작가상>에 당시 50세였던 건축가 승효상이 2002년 작가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건축은 그렇게 10년에 두세 번의 전시를 통해 미술관이라는 자장 속에 개입했다.
이런 일들이 더욱 빈번해진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건축이 건물을 짓는 것을 떠나 다양한 실천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다.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장소와 자금이 부족하다는 악조건은 또 다른 돌파구를 모색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거칠게 말해 파빌리온 계열의 건축가들은 건축을 둘러싼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오늘날 파빌리온은 “가치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현대미술과 마주하고” 있는 장으로서 현대미술이 관람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치로 고안되고 있다.3 미술관은 시각예술문화 전반을 포섭하려는 야심 찬 기획 속에서 파빌리온을 포함한 여러 사업에 젊은 건축가들을 초청했다. 물론 세계적으로 건축과 미술의 경계가 흐려지고 그 둘 간의 협업이 잦아진 것도 자연스러운 배경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 신축 등 기관 규모를 증대시키면서 필자와 같은 건축 전문 큐레이터들을 채용하며 건축 분야의 활성화를 꾀했다. 하지만 미술가와 건축가의 활동무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어떤 건축가를 섭외하느냐가 미술관에서는 중요했다. 큐레이션의 맥락을 이해하고 유연한 예술적 실천이 가능한 건축가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 기준 중에는 건축가의 젊음이 중요한 준거였다. 물리적으로 젊다는 것에는 유연한 사고와 여러 제약 조건을 관대하게 이해하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지금은 익숙해 보이는 파빌리온 프로젝트조차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미술관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전시라는 것은 무릇 전시장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미술관 건물 밖에서 무언가를 짓는다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례라는 것은 미술관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맥락이다.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것은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것을 뜻했고, 기존 매뉴얼로는 작동할 수 없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 체계를 만드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작가와의 계약 방식, 작품의 설치 과정, 작품 관리원들의 배치, 작품의 운영 방식 등 기존 미술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의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건축가뿐만 아니라 담당 큐레이터에게도 무척이나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전부터 그들은 이 불확실한 기획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퇴적되지 못하는 시간
YAP는 기존에 MoMA가 1998년부터 MoMA PS1에서 성공적으로 만들어 온 <Young Architects Program>의 형식적 틀을 대체로 따른다. 이 형식은 1932년에 세계 최초로 건축디자인분과(Department of Architecture and Design)라는 제도를 구축했던 MoMA의 역사적인 토대 위에서 고안된 것이다. MoMA가 YAP를 네트워킹 형식으로 다른 국가로 확장하는 시도는 이 프로그램이 계속된 선례와 유의미한 경험들을 만들어 그 자체가 연속된 국제적인 건축 지원 프로그램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2017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공모 형식을 개발해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이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은 YAP 이전에 이와 관련된 선행 경험들이 있다. 2011년 청계광장에서 열린 양수인의 <있잖아요>, 2012년 서울대공원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조각공원에서 진행한 김찬중의 <아트폴리 큐브릭>이 그것이다. 한편 서울관에서 YAP가 열릴 즈음 과천관에서는 ‘회랑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2017년에는 와이즈건축의 장영철, 2018년에는 서승모가 휴게 공간 겸 실내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례가 있을지언정, 젊은 건축가들의 미술관 내 활동을 일시적으로 성사된 이벤트가 아니라 건축 분야의 유산으로 퇴적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건축가의 젊음과는 무관한, 미술관이 건축을 취하는 정책적 입장과 관련이 있다. 특히나 젊은 건축가들은 미술관 안에서 종종 문제 해결사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혹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발생한 미술관의 사업적 공백을 간결하게 메우는 역할도 요청받는다. 발주처인 미술관은 이들에게 단순히 시각적인 감상만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의뢰하지 않는다. 복잡한 제약조건들이 딸려 있으나 특정 기능과 결부된 미술관의 요구를 건축가들이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해결해주길 원한다. 다시 한번 구마 겐고의 말을 인용해보자.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 그가 수십 년간 축적한 것을 잔뜩 모아야 겨우 공간과 전람회의 밀도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공간 구성을 하는 경우, 경험이 없어도 꽤 쉽게 완성도가 높은 공간을 만들 수 있죠. 그것은 그야말로 건축이 지닌 전투 능력의 결과입니다.”4
“건축이 지닌 전투 능력”은 꼭 건축 전시나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미술관의 전시 디자인을 실험하거나 새로운 운영 방식을 모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과 다른 건축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지난 10년에 가까운 경험들은 분명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여러 참조점을 획득하게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미술관에서의 건축이 체계적인 계획을 갖고 쌓아 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원’ 혹은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온전하고 지속적인 기획을 문제 해결사의 역할에서 찾을 수는 없다. 한 연구자의 말처럼, 미술관에서 건축의 시간은 “누적되는 발전의 시간이라기보다 언제나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시간에 가까웠다.”5
불완전하지만 보다 확실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문장 속 부사를 바꿔봄으로써 어떤 전환의 시기를 만드는 것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젊은 건축가들이 미술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기대하는 것보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탐색하는 일로 말이다. 미비할지언정 건축이 미술관에서 하나의 독립된 수집 체계를 갖고 소장품과 아카이브로 축적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은 원로나 작고 건축가 위주이나,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1년에 1–2회 건축가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10년 전과는 확실히 다른 양적 성장이다. 미술관이 건축을, 혹은 건축이 미술관을 일종의 동사처럼 경유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다음 단계로 건축이 미술관에서 어떤 방향으로 축적될 수 있을지, 혹은 미술관이 건축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구상할 수 있을지 제도적인 구조의 틀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젊은 건축가가 미술관에서 호출되는 방식을 더 개선하고 생산적인 담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출발선일 수 있다. 미술관에 들어온 건축 작품을 전시라는 무대로 올리는 제반 과정뿐만 아니라 전시 사후의 작품 경로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작품의 라벨링을 어떻게 작성하느냐의 미시적인 차원부터 이 작품이 전시가 끝나고 다시 작가(건축가)의 품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른 소장가에게 갈지 그 작품의 이력에 대해 건축적인 방식의 새로운 유형을 고안하는 일이 숙제로 남아 있다.6
넓게 봤을 때 이 모든 것들은 건축 기획이라는 통합적인 사고의 맥락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실무를 시작한 건축학도들에게 미술관은 흥미진진한 작업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2000년대 파빌리온 계열로 호출된 젊은 건축가들의 뒤를 이어 ‘차세대 파빌리온 계열’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처한 조건은 지난 10년 동안의 시간과는 또 다르다. 건축이 건물이 아닌 형식으로 구상되고 실현되는 일련의 과정을 ‘건축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학교 교육에서부터 건축 큐레이팅의 실천적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기획의 여정을 맨몸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할지언정 이제 조금은 더 확실해진 기획의 배경 속에서 흥미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젊은 건축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서 가치를 획득하는 일이 아닐까.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공간』에서 기자와 편집자로 일한 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며 건축 부문 전시 기획과 연구를 맡고 있다. 아카이브와 도큐멘테이션을 매개로 건축과 시각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큐레이터로 건축의 다양한 확장과 그것을 이론화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 동료들과 함께 정림건축문화재단의 <건축 큐레이팅 워크숍>을 기획했다. 기획한 주요 전시로 <아트폴리 큐브릭>(2012),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2013),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2014), <아키토피아의 실험>(2015), <보이드>(2016),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2017), <김중업 다이얼로그>(2018) 등이 있다.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를 비롯해 여러 책을 다른 연구자와 함께 썼다.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해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전을 선보였다. 현재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디자인문화 연구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불확실한 기획: 미술관 안 젊은 건축가
분량5,772자 / 11분
발행일2019년 3월 25일
유형비평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