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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면?

김효영, 이해든, 최재필, 김빈, 김샛별, 윤성영, 홍영애, 정영섭, 조윤희

초대 건축가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이 시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준 여섯 팀의 말을 한데 모았다. 건축은 개개인의 삶과 도시에 좋든 싫든 영향을 미친다. 예술처럼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을 만들거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을 사회에 제안할 수 있다. 건축이 사람과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지 끝없이 고민하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효영(김효영건축) 나는 그 사회적 역할이라는 것을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건축이 직접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기보다 예술이 하는 역할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종건 교수님의 『시적 공간』 첫머리에 “정동의 힘에 기대어 시적 상황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제도의 개선 같은 부분을 직접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우회해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나 할까. 건축이 개인을 깨우치는 계몽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예술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이기도 하고, 건축도 할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교종과 선종이 각각 교리와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건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공공성 차원에서 다가가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건축은 개개인의 집이다. 그래서 나는 후자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내가 설계한 집에 사는 개인이 건축 안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다. 개발 시대 대규모 주거 단지를 만드는 일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는 일을 하고 싶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하는 거라기보다는 건축으로(그게 공간이든, 장면이든, 의미든 간에) 다른 순간들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다.

이해든(오헤제) 예전에 온그라운드갤러리에서 <금> 전시 때 참여 작가 좌담을 들었다. 그때 일본 건축가 유리 나루세 씨가 셰어하우스를 설명하면서 ‘물 쓰는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건축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임대를 하고, 돈을 내고, 공유를 할지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구체적으로 실제 공간에서 무엇을 공유할지 선택하고 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건축가다. 그분이 했던 말 중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제안하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라는 말에 매우 공감했다.

최재필(오헤제) 나루세 씨의 셰어하우스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축적 시도다. 물론 건축가 혼자 기획한 것은 아닐 테고 기획자와 함께 생각했겠지만, 그것을 공간으로 구현해내는 건 오롯이 건축가의 몫이다.

마을 냇가에서 함께 빨래하던 시절의 물은 함께 쓰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근대 이후 각 집에 수도가 생기면서 물을 통한 만남의 기회가 사라졌다. 그런 부분을 건축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되짚어보고, 한 공간에서 모여 살아가기 위한 해법을 사회에 제시하고, 잊고 살았던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까지 모두 건축가의 역할이다.

김빈(코어건축) 건축은 자본과 부동산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로서 자신의 작업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하려면 개별 건물만 볼 것이 아니라 도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개인 주택이든 공공건물이든, 모든 건물은 그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는 건물을 지음으로써 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 더 나은 공간을 경험할 기회를 줄 수 있고, 그렇게 더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자신의 건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을 가꾸기도 마찬가지다. 참여하는 건축가는 그걸 통해서 도시를 어떻게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고, 결국에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설 힘도 생길 것 같다. 건축이 본질적으로 자본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넘어서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큰 틀에서 보면 도시적 맥락을 고려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포럼 때 나온 새로운 유형을 만드는 이야기도 그러한 노력에 포함될 수 있다. ‘유형’이라는 말을 써서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전과 다른 뭔가를 하기 위한 노력이다. 크게 바꿀 필요도 없고 조금만 바꾸어도 되는데, 다만 그게 주어진 조건에 맞는 변화여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새로운 유형은 디자인의 일부일 수도 있고, 재료의 일부일 수도 있고, 디테일의 하나일 수도 있고, 전체를 꿰뚫는 컨셉일 수도 있다. 모든 건축가가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관에서 발주하는 공공 영역에서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기는 구조적으로 참 어렵다. 심사부터 시작해서 발주처에 속한 여러 관계 기관을 거치다 보면 진보적인 시도가 나오기 쉽지 않다. 새로운 시도는 민간 영역에서 뜻이 있는 건축주가 나섰을 때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 공공에서는 한계가 있다.

김샛별, 윤성영(아에아) 살기 좋은 땅의 조건 중 하나가 사람들의 인심과 포용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좋은 건축은 좋은 인심을 만들어내고 포용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포용은 곧 인재를 만들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큰 규모나 비싼 재료와는 상관없이 사람이 살면서 긍정적인 상상을 하고, 인심이 좋아지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집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수만 개의 별이 쏟아지는 시골에서, 다른 한 사람은 달과 바다가 훤히 보이는 도시의 산비탈에서 자랐다. 사는 동네나 환경은 달랐지만 공통으로 기억하는 것은, 길에서 약간 물러난 대문은 아침이 되면 항상 열리고, 이웃집 무화과나무는 이 집 것인지 저 집 것인지 모르며 살았고, 반쯤 열린 옆집 대문 너머로 마당을 청소하는 이웃과 눈을 마주치면서 지낸 유년 시절이다.

포용하는 건축이란 가사노동을 잠시 덜어줄 풍경이 있고, 집 안으로 사람을 만나러 들어갈 때 숨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공간이 있고, 타인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허용되고, 이웃을 대하는 배려심으로 조경수를 가꾸는 그런 건축이 아닐까 한다.

홍영애(몰드프로젝트) 요즘 우리 사무실 인근 동네에 지구단위계획, 활성화 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그 계획 안에서 보면 우리 사무소도 동네 자원 중 하나라서 계획 수립 초기에 도시계획팀으로부터 전문가로서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고민 끝에 이 동네에서 우리가 설계사무소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이 동네를 활성화하는 것이고, 그게 더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 동네가 달라지거나 발전할 때 우리도 그 속에서 하나의 요소로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여다.

정영섭(몰드프로젝트) 건축가가 도시 계획 차원에서 역할을 한다고 할 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일이라는 것에서부터 그렇다.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 명의 마스터플래너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도시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건축적인 장치로 사람들이 모이고 장소가 좋아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연구가 필요하다.

조윤희(구보건축) 요즘 건물의 모든 것을 성능과 연결짓고 그것을 규제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사회가 건축가를 숙제 대신해주는 사람처럼 대하게 된 데에는 건축가들의 책임이 크다. 성능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치만 내세우는 설계를 해왔고, 그 결과 사회가 제도와 규제를 통해 성능을 통제하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설계가 제도에 의해 다 결정이 되어버린다. 세세한 부분까지 법으로 규정이 되고 건축가의 운신의 폭은 너무 좁다. 그러다 보니 그저 그런 건물만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건축가(건축계)가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지 않은 데서 다다른 결과다. 건물이 가진 인문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정말 필요한 기술과 성능을 등한시한 데서 온 폐해다. 그래서 요즘 건축가들이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기술을 등한시했던 부작용이 너무나 커져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걸 건축계 내에서 먼저 깨달아서 우리가 그간의 미흡함을 보완하려고 자처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사회가 먼저 움직이면서 건축가가 더 옹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앞세대에서 선생 대접을 받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였고, 나머지는 다 집장사 취급을 받았다. 집장사의 건물은 아예 건축으로 다루지도 않았고, 양극화된 상황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제 그 부담은 우리 세대의 몫이 되었다. 양쪽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거다. 그동안 방치했던, 집장사의 일이라고 치부했던 영역에서 건축의 사회적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축가로서 나 역시 전문성이 부족한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 시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면?

분량4,083자 / 8분

발행일2019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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