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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넥스트 도어 넥스트 스텝

김상호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목소리와 움직임은 곳곳에서 이어져 왔다. ‘전선에서 알리다’라는 제목을 내걸었던 베네치아, 후쿠시마 대지진 후 대응에 나선 일본 건축계, 사회 기여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 프리츠커 등 여러 맥락과 방향으로 퍼져 나왔다. 사회문제를 도시와 연결지어 이슈를 제기하는 것은 건축이 현실에 개입하는 하나의 경로이고, 오래된 건축의 과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건축 전시의 탐구 대상으로서 당위성과 정당성을 얻는다.

사회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건축전시가 성공적이었는가, 문제 해결에 유효했는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어떤 문제의 발견과 조사가 건축의 출발선상에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건축은 시민단체의 구호나 예술가의 선언과 달리 자신이 꺼내든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놓을 책임이 있다. 들어 올린 피켓을 세워둔 채 돌아서는 것은 적어도 건축에서는 직무유기에 해당할지 모른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 혹은 그것을 감지한 개인의 전망을 건물로든, 디자인으로든, 장치로든 풀어내는 것이 건축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해결을 위한 발판을 놓는 일이고, 막연했던 문제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건축의 능력이고 기능이다.

많은 건축전시가 문제 위에 주저앉아 있곤 한다. 온갖 심각한 사회 이슈가 등장하고, 그럴듯한 선언문이 벽에 붙고, 근거 자료들이 시각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버린 전시를 종종 보게 된다. 대체로 해법처럼 보이는 제안이 뒤따르긴 하지만, 그 긴밀성과 현실성에 대한 판단은 전시의 시각효과에 가려 뒷전으로 유보되곤 한다. 그래서 전시장을 나와 곱씹어 보면 물음표가 떠오르는 경우도 많다. 전시의 프레젠테이션 기법이 탁월할수록 물음표가 덩달아 커지기도 한다. 건축의 효용 대신 효과만 취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전자는 난해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 후자를 피상적으로 소비하는 탓도 있다.

〈넥스토피아〉 전시는 공동체가 와해된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응해 온 건축 작업들을 소개하면서 팽배해지는 ‘독존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함께 사는 것’의 의미를 환기하고자 했다. 앞서 지적한 건축전시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이 전시는 다행히 피해간 것 같다. 꾸준히 끌어온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연장한 기획이 있었고, 전시를 계기로 비슷한 위기의식 위에 쌓여온 건축의 성과들을 만난 덕분이기도 하다. 여섯 건축가 저마다의 단단한 생각과 실천이 전시 주제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된 셈이다.

이 책은 〈넥스토피아〉 전시의 주제와 내용을 확장하면서 주제와 내용, 내용과 내용 사이에 성글게 남아있는 공간에 몇 개의 그물망을 친다. 전시에서는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을, 혹은 서로 이어지기를 기다렸을 법한, 개별 작품에 잠재한 이야깃거리들을 포획해낸다. 큐레이터와 참여 건축가들이 전시장에 담았던 생각과 이를 실마리로 삼은 필자들의 글을 엮어내고, 이를 통해 다가오는 미래 도시에 필요한 고민의 지점들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1부는 넥스토피아의 확장, 2부는 앞선 전시의 기록이다.) 1부에 더해진 여섯 편의 글은 전시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좁게는 전시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 즉 가족에서부터 인구, 사회, 공간, 도시로 확장되는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변화와 그 대응을 둘러싼 논의들이다. 넓게는 전시 자체와는 무관하게 상상해봤을 법한 유토피아와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까지다.

전시가 문제 삼은 공동체 해체는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정주가 시작된 이래 공동체는 도시에 뿌리내려왔기 때문이다. 도시는 땅 위에 세워진다. 숨 쉬는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내지만, 이를 되짚어 보면 결국 (도시)공동체 문제의 밑바닥에는 토지문제가 깔려있다. 전시에서도 문도호제의 ‘점유감각’이 토지 소유와 주거 공동체의 관계를 직접 다루었고, 전시의 두 번째 연계 포럼도 ‘토지의 경제학’을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책에서는 이 논의를 이어받아 토지제도의 영향 아래 일어나는 도시의 물리적 변화 가능성을 짚어 보았다. 이를 통해 도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건축의 상부구조의 일각을 드러내고자 했다. 전강수 교수는 ‘도시와 불평등, 그리고 토지보유세’라는 제목의 면밀한 보고서에서 토지와 자본의 파괴적 메커니즘을 밝히면서 이를 완화할 수 있는 통제 도구를 제안한다.

한편, ‘넥스토피아’라는 제목은 당연히 유토피아라는 말에 기대고 있다. 유토피아의 등장 이후 곳곳에서 끊임없이 소비되는 ‘– 토피아’라는 어근, 혹은 어미, 혹은 돌림자가 몰고 다니는 어떤 클리셰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예술의 비판적 시각으로 찔러보고 그 둔탁한 덩어리에 한시적이나마 긴장을 일으킴으로써 책의 이야깃거리로 삼아 보았다. ‘숨겨진 유토피아의 공간’이라거나 ‘토피아라는 이름의 신기루’라는 막연한 가제를 글쓰기 단서로 필자에게 제안하면서, 적어도 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현실 도시를 소재로 삼아줄 것을 주문했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서브토피아가 점령한 세계에서’라는 제목의 자전적 도시공간 비평을 통해 정주에 이르기까지의 길었던 이주의 여정을 돌아본다. 이 두 글이 책의 프롤로그다. 이어지는 세 글은 본격적인 본론에 해당하는데, 지방 도시, 오래된 건물, 공동의 공간이 각각의 주제다.

SoA의 우포 자연도서관 프로젝트는 우리의 농촌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줬고, ‘지방 도시 살생부’라는 책 이야기로 진행된 첫 번째 연계 포럼은 우리 지방 도시의 살풍경과 암울한 시한부 미래를 경고했다. 때마침 지난겨울에는 평창동계올림픽이 강원도 지방 도시에서 열렸다. 경기장과 관련시설, KTX 연결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13조 8천억 원을 쏟아부었다. 이에 앞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2년 여수엑스포,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이 있었다. 축제의 막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도시는 땅이 대신 빚더미에 올랐다. 과연 이 도시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어디쯤일까? 그들은 다가오는 미래의 그림자를 얼마나 예상했을까? 건축 칼럼니스트 배윤경의 글 ‘지방 도시의 지속 불가능성’은 이면이 깔린 TV 프로그램과 어둠침침한 영화 속에서 발견한 우리 지방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는 한편, 지속 가능한 지방 도시를 호언장담했던 네덜란드의 실패한 도시 정책을 반면교사로 소개한다.

전시를 꾸리는 과정에서 몇 개의 공통 이슈가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기존 건물을 사회 공동의 자산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가장 밀접한 전시 내용은 구 샘터사옥을 리노베이션한 공공일호이고, 부산 망미동 공장 기숙사 리모델링 계획과 우포 자연도서관 프로젝트도 그렇다. 개인 차원까지 포함하면 일원동 단독주택 리노베이션도 여기에 해당한다. 황지은 교수는 ‘건축공간 생애주기의 순환’에서 오래된 건물을 마냥 허물지 않고 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도시를 예인하게 된 최근의 변화를 되짚으며, 오래된 것에 깃드는 가치를 사회가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이야기한다.

또 하나 공통 이슈는 공유·공동 공간인데, 이에 대해서는 참여 건축가들이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라면 누구나, 한 가족의 단독주택에서부터 불특정 다수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이 마주치는 공동 영역의 수준과 경계를 분명하고도 미묘하게 감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실제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관점에서 쓴 남수현 교수의 ‘넥스토피아적 공공영역을 향하여’는 도시의 길, 제도적 공개공지, 비워진 공공공간 등이 내포하고 있는 비물리적인 비장소성, 그것이 왜곡하는 ‘공공’이라는 허상을 지적한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개인 영역과 공공 영역 사이의 우선순위였다. 전시를 준비하던 회의에서도, 인터뷰 영상 촬영 현장에서도 공유공간과 공동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이 분분했다. 요는 공유나 공동체를 앞세우는 윤리적 태도에 대하여 프라이버시와 개인의 영역이 분명하게 정의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는 비단 공간뿐 아니라 사회관계와 실생활의 접점에서도 불거지곤 하는 이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개인의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이런저런 ‘공동’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개인주의’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삶의 디폴트값이 필요함을 도시공동체 속에서 확인했다. ‘독존주의’에 물음표를, ‘함께 사는 삶’에 느낌표를 찍으며 출발한 〈넥스토피아〉로서는 뜻밖의 답장 하나를 받아든 셈이다.

『건축신문』은 변신 중이다. 신문에서 포켓북으로의 전격적인 방향 전환은 당연히 매체의 성격, 태도, 체재에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간 달려온 속도를 줄이면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해마다 네 차례씩 숨 가쁘게 신문을 발행한 지 5년이 지나서 옆을 돌아보니, 공고한 줄 알았던 건축 매체와 담론의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위기를 기회 삼아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출판 매체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어느새 공익 재단으로서 건축계에 기여할 수 있는 최우선 미션이 되어버렸다.

『건축신문』은 당분간 솔직히 말하면 시행착오, 좋게 포장해서 실험을 몇 차례 더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떤 식으로든 이어갈 몇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놓았다. 새로운 건축가가 지속적으로 사회에 유입되는 채널을 유지하고, 건축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건축신문』의 흔들리지 않는 역할이 될 것이다. 그것이 전통적인 매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든, 거기서 벗어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든, 해체 후 재구성된 어떤 운영체제이든, 지금으로서 그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김상호 건축신문 편집장

서문 – 넥스트 도어 넥스트 스텝

분량4,673자 / 9분

발행일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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