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도시를 움직이는가? 자본과 권력 vs. 시민
정석
분량9,450자 / 19분
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재개발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일까? 도시를 움직이는 두 ‘시장’이 있다. 하나는 mayor이고, 다른 하나는 market이다. 도시에서 어느 쪽이 더 주인 역할을 할까? 시장(Mayor)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만, 마켓의 힘에 휘둘릴 때가 많다. 도시에서 자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재개발이다.
재개발은 도시에서 오래되고 낡아 살기 어려운 곳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재개발은 돈이 되는 곳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열악한 곳이라도 사업성이 없으면 재개발이 되지 않고, 반대로 살만 하더라도 이익이 많이 발생하면 재개발이 된다. 한국처럼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20 – 30년된 동네를 한번에 철거해 아파트를 짓는 나라는 없다. 왜 한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재개발을 하기만 하면 떼돈을 벌 것 같은 망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동네를 돈으로만 보고, 재건축을 한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성남시는 재개발로만 형성된 세계 유일의 도시다. 성남시는 이전에 경기도 광주로 불렸다. 서울의 달동네 주민이 집단 이주를 해서 태평동을 비롯한 성남 구릉지 언덕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 언덕에 20평 남짓하는 땅을 바둑판처럼 나누어서 만든 곳이 성남의 첫 번째 신도시인 성남 구시가지다. 다음으로 분당, 판교, 위례 신도시(위례 신도시는 성남, 하남, 송파에 걸쳐 있다)가 만들어졌다.
성남의 첫 번째 신도시 재개발 사업이 끝날 무렵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한탄했다. 당시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2 – 3억 원의 분담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알았다면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재개발을 통해서 이익을 얻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렇게 재개발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주민들을 분열시키며, 과거를 지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진행 과정이 반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 건물이나 땅을 가지고 있는 개인의 선택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거대 자본이 들어와서 한꺼번에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것만 가능하다. 그 결과 한국의 도시와 국토가 파괴됐다.
재개발이 계속되면 도시에 있는 단독주택과 저층 주거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도시는 생태계와 비슷하다. 생태계가 지속 가능하려면 종다양성이 중요하다. 가장 하위에 있는 식물이 있어야 윗 단계에 있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그리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밑바탕을 만들어 주는 토대가 튼튼해야 한다. 도시의 오래된 건물이 다 철거되고 새로 지은 비싼 집만 남게 되면, 오래되고 싼 집에 사는 사람이나 임대료 낮은 상가나 작업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도시에서 살 수 없다. 재개발이 종다양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도심 재개발도 비슷하다. 광화문에 인접한 지역이 재개발 되고, 명동성당 앞도 다 재개발되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을 유심히 보면 임대 광고가 많이 붙어 있다. 도심 재개발로 새 건물이 들어서면 어딘가 다른 건물에는 공실이 늘어나게 된다. 수요가 있어서 재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개발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나한테 이익이 돼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개발이 계속되면 강자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약자는 살아남기 어렵다.
뉴타운
서울 시민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이명박 시장의 프로젝트는 청계천 복원이지만, 그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것은 뉴타운이다. 그가 뉴타운 정책을 폈던 이유는 강남과 강북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강남은 집값이 엄청나게 올라 있는 데 비해 강북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뉴타운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울시가 뉴타운 구역을 지정하고 발표하는 순간 집값이 두 배로 올랐는데, 이미 지가가 오른 상태에서 주민도 건설회사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더 많은 집을 지어야 했다. 집값이 오르는 것을 원했던 주민들에게는 반가운 정책이었을지 모르나, 주변 지역과 도시에는 큰 부담을 주는 부작용이 있는 정책이었다. 뉴타운을 반대한 사람들은 대안으로 침술 방식을 제안했다. 강북 지역에 선투자로 공원, 공공시설, 주차장을 만들면,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주변 지역에도 민간 투자가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긴 시간이 필요하고 눈에 띄는 변화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부작용이 적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은 결국 뉴타운 방식을 선택했다. 대중의 생각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더라도 단기간에 성과가 드러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2002년 7월 취임 석 달 후에 왕십리, 은평, 길음, 세 개 뉴타운 구역을 발표했다. 뉴타운 사업을 계속 추진하면서 정부에 뉴타운 특별법을 건의했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뉴타운이 확대되었다. 4년 후 2006년 지방선거 때는 너나 할거 없이 거의 모든 정치인이 뉴타운을 공약으로 내놓았고, 많은 단체장과 구청장 후보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0년에는 뉴타운이 애물단지가 되었고, 뉴타운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후보 대부분이 강남, 서초, 강동의 몇 개 구를 제외하고 모두 낙선했다. 2010년 이후에는 서울과 자치구의 도시 정책이 크게 바뀐다. 도시를 조금씩 고쳐 마을 공동체를 살리고 주민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전환된다.
도시 정치
도시 정치의 속내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지하철이다. 지난 총선 때 서울 지역 후보들이 새로 만들겠다고 공약한 지하철역만 60개다. 지하철역은 그만큼 매력적인 공약거리다. 지하철 3호선은 고양, 일산, 원당 쪽으로 크게 휘어져 가다 강남으로 내려와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직선이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는 거리를 우회한다. 나도 같이 태워 가라는 사람들의 요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하철역의 밀집도는 그 지역의 힘을 나타낸다. 신논현역 주변에는 반경 2km 안에 6개 노선 15개 역이 있지만, 수서역 반경 2km 안에는 3개 노선에 7개역밖에 없다.
지하철역 이름에도 많은 도시 정치가 담겨 있다. 처음에 지역명만 명시되어 있던 지하철역 이름에 어느 순간부터 대학 이름이 함께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량리(서울시립대입구)역, 화랑대(서울여대입구)역, 회기(경희대입구)역, 미아(서울사이버대학)역 등이 그 예로, 대학 명칭을 지하철역 명에 넣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것이다. 종교 간 갈등이 지하철역 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봉은사역의 경우는 개신교 단체에서 코엑스역으로 바꾸라고 요구를 했다. 지역 갈등으로 지역명을 병기하는 역도 있다. 천안아산역, 김천구미역을 비롯해, 청주에서도 오송역을 청주오송역으로, 강남에서도 수서역을 강남수서역으로 이름 붙이자는 요구가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오면서 동대문운동장역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바뀌었고, 옛날 공업 단지들이 있던 가리봉역과 구로공단역의 이름에는 이제 전부 디지털이 들어간다.
동서고금의 도시 정치 사례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원도시 이론은 도시와 전원의 장점을 겸비한 전원 같은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고, 근린주거 이론은 마을 중심에 교회와 학교, 공공시설을 밀집해 넣고 그 안에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자는 이론이다. 두 이론에 근거해 미국과 유럽의 도시에서는 2차대전 후에 교외화 현상이 벌어졌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구도시에 모여 살았다. 구도시의 건물 1층은 대개 상점이고, 2층은 사무실, 3 – 5층은 집이었다. 집과 직장이 그리 멀지 않아서 걷거나 자전거로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1층 가게에서 저녁 거리를 사 와 식사를 했다. 이것이 당시 도시의 전형적인 생활 패턴이었다.
그런데 교외화 후 도시 바깥에 주거지가 만들어지면서 차로 도시까지 출퇴근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극히 일부 계층만 자동차를 보유했다면 교외화 이후 지엠, 크라이슬러, 포드와 같은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이끌었다. 교외화와 자동차 대중화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면서 퇴근길 집 앞에서 보던 장을 주말 대형마트에서 보게 되었다. 교외 주거지에는 시장이나 상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주 갈 수 없으니 한 번에 사는 양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것들을 저장해야 하기 때문에 냉장고 용량도 커졌다. 교외화 전후로 생활 양식이 크게 바뀌었다.
어쩌면 교외화는 자동차 산업, 건설 산업, 정유 산업, 유통 산업, 가전 제품 산업의 이해관계에 맞춰진 해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외화가 이상적이어서 교외 주거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외곽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며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출퇴근을 하는 로망을 광고로 선전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멋진 삶인 것처럼. 지금은 누구도 교외로 도시가 확산되는 것을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심부를 콤팩트하게 구축하자는 것이 요즘의 일반적 이론이다.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1이 전국민의 일상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관심받지 않던 허름했던 동네나 거리가 어떤 계기에 의해 주목과 관심을 받으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기존 주민들은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쫓겨나 지역의 구성원과 성격이 변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홍대 앞의 경우 미술, 음악, 건축과 학생들이 학교 주변의 저렴한 스튜디오에 들어가 작업실을 차리면서 그들이 향유하는 스타일에 걸맞은 가게들이 들어와 홍대 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곳이 너무 뜨다 보니 늘어난 방문객을 상대할 수 있는 업종의 가게들로 바뀌면서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올렸다. 그 결과 홍대를 홍대답게 만들었던 예술가들은 주변 상수동이나 망원동으로 물러나게 됐다.
오래된 한옥 마을인 북촌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서울시가 한옥을 고치고 옛 골목길을 정비하는 비용을 지원해주면서 지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에서 한옥 값이 오를 것을 간파하고 계속해서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한옥을 사고팔았다. 결국, 2001년 평당 500만 원이었던 북촌 한옥 값이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평당 5천만 원 가까이 올랐다. 한옥 값이 계속 오르자 정작 한옥이 좋고 북촌이 좋아서 살던 사람들이 밀려났다. 부자들이 한옥을 사서 주말 주택으로 사용하거나 가끔 와서 파티를 하는 용도로 사용하다 보니 평일 저녁에 불 꺼진 한옥이 많아져 유령 마을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서촌도 비슷하다. 경복궁과 청와대 주변이다 보니 여러 규제로 인해 급격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서촌 역시 핫플레이스로 각광 받으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의 조짐을 보였다. 다행히 다양한 서촌 주민 모임이 마을 전체의 공동 이익을 위해 작년에 연대를 결성했다. 그 안에서는 임대료를 과격하게 올리지 말 것과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연대하자는 등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지역에 건물을 새로 짓는 문제로 공동으로 서명 운동도 하고, 통의동에 있는 작은 공원을 지키기 위한 주민 운동도 벌였다.
연남동의 경우 경의선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숲길을 만들면서 그 일대가 ‘연트럴파크’라고 불릴 정도로 바뀌었다. 동네 애물단지였던 철길이 땅 속으로 들어가면서 보물단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업종의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다.
성수동은 서울의 중공업 지역으로, 공장 대부분이 이전한 뒤 쇠퇴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성동구와 서울시에서는 성수동을 수제화 특화 지역으로 살려 보려 노력했고, 2014년 도시재생 시범사업 구역으로 선정이 되면서 100억 원 정도의 재정이 투여돼 재생 사업이 벌어졌다. 여기에 유명 연예인들과 기획사가 들어오면서 지가와 임대료가 올라갔다. 성동구청장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 조례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새로 신축을 할 때 건물의 일부 공간을 안심 상가로 확보해 기존 가게들이 그곳에서 일정 기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버퍼 공간을 확보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은 쓰나미와 같다. 자본과 부동산 시장이 마음먹고 목표물을 정해 들이닥치면 막을 도리가 없다. 쓰나미 같은 자본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이익이 되면 뭐든 하는 자본 시장의 속내를 잘 알아야 한다. 또한 공공에서 자본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행정에는 개발 용도와 규모를 제어할 수 있는 도시 계획 규제 같은 공적 권한이 있다. 또 재정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규제와 지원이라는 이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 자본 시장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행정 기관이 규제를 강화하면 시장에서 강한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다.
스펙터클 정치학
도시의 스펙터클2은 대중을 현혹시킨다. 스펙터클의 원조는 콜로세움이었을지 모른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검투사끼리 목숨을 건 결투를 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몰아 놓고 사자를 풀어 놓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서 군중은 흥분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었다.
독재자는 스펙터클을 잘 이용한다. 히틀러에게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곁에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권위와 정치를 건축으로 아주 명확하게 구현해서 대중에게 보여 주었다. 히틀러 집무실로 가는 복도는 층고가 높고 길어서 방문한 사람은 그 복도를 걷는 동안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집무실 문을 열면 안쪽의 큰 책상에 거대한 유리창을 뒤로 한 채 히틀러가 앉아 있었다. 햇빛이 비치면 히틀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 안에서 히틀러 앞에 선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건축적 형태와 장치를 통해서 군중의 심리를 움직였다.
공산주의도 스펙터클을 활용한다. 김일성 광장에서 김일성 생일에 이루어지는 거대한 퍼레이드는 공산주의 국가와 도시의 스펙터클이다. 북한 사람은 평양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가장 이상적인 사회주의 정신을 구현한 도시라고 자랑한다. 그리고 그 도시 설계의 주역을 김정일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건축예술론』이라는 책을 써서 도시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장하고 원칙을 제안했다. 그 원칙에 따라 평양이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평양도 개발되는 지역이 점점 달라졌다. 2009년 평양 방문 때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 도시 서울에도 스펙터클이 있다. 청계천 복원은 군중의 마음을 강렬하게 흔들었던 스펙터클 뉴스였다.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하고 그들의 마음을 예리하게 읽은 이명박 시장의 대단히 정치적인 행보였다.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인공수로를 만들었을 뿐 하천 복원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명박 시장이 아니면 누가 이러한 일을 했겠냐고 하기도 한다. 이후 2007년 10월 이명박 시장은 타임지 아시아판에 황금용으로 지칭되며 소개됐고, 얼마 후 대통령에 당선됐다.
도시를 위한 시민의 역할
자본 시장에 대응해야 하는 진정한 주체는 주민이다. 문제는 주민이나 시민도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마을의 큰 분쟁은 이웃과 행정 사이에 벌어지곤 하는데, 사실 주민과 행정이 한 팀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의 이익,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서로 결집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러면 개발 이익을 추구하며 들이닥치는 자본 시장에 어느 정도 대응할 힘이 생긴다.
지역 주민은 공무원을 포섭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의 행정 처리에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공무원은 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정해진 규정이나 법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하면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다. 무리하게 뭔가를 요구하기보다 일을 잘 해내면 좋은 성과를 얻거나 승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는 편이 낫다. 공무원의 생리를 잘 알면 충분히 한 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도시를 만들려면 좋은 시장을 뽑아야 한다. 좋은 시장이 좋은 정책, 좋은 시정을 펼친다. 시민은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쩌면 시장보다 시정이, 시정보다 시민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뽑아만 놓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정치와 자본이라는 권력이 그에게 압력을 가해 도시를 우리 뜻과 다르게 만들 것이다.
시민 자신이 도시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민이 가진 힘은 머릿수뿐이다. 모래알 같은 국민들이 투표를 하면 대통령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자본과 정치, 권력이 도시를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을 내버려 두지 말고, 시민들이 나서서 진정으로 좋은 도시를 만들자.
청계천 복원
청계천은 한양 도성 가운데로 흘렀던 내수이다. 옛 청계천은 쓰레기, 가축 분뇨가 바닥에 쌓이는 도시 하수도나 다름없었다. 태종, 세종, 영조 때 청계천 바닥을 걷어내는 대규모 준천 사업을 했다. 영조 때는 준천사를 설치하고 연인원 20만 명을 동원해서 하천 바닥을 정비했다. 그때 드러낸 흙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청계천변에 자그마한 산이 하나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를 거치면서 청계천은 완전히 복개되었다. 복개된 하천 위로 청계고가가 건설되었다. 이후 청계고가는 구조적 안전 문제로 계속 보수 공사를 하다가 철거해야 할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청계천 복원 논의가 시작됐다.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2000년 9월에 처음으로 청계천 살리기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때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가 만들어졌는데, 환경, 하천, 도시, 교통 전문가들이 모여 청계천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그 중심에는 박경리 선생이 있었다. 복개된 청계천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마치 부모를 고려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이제는 청계천을 덮은 콘크리트를 걷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2001년에 두 번째 심포지엄이 열렸다. 2002년 민선3기 서울시장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을 때였다. 시장 후보들에게 청계천 복원을 의제로 던졌는데, 이명박 후보가 이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임기 중에 청계천 복원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당시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청계천을 복원하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명박 시장은 시장에 당선된 후에 바로 청계천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3년 7월 착공했다.
청계천 복원에는 여러 가지 쟁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하천 복원으로, 제대로 된 하천으로 복원하려면 상류를 복원해야 했다. 또 하나의 쟁점은 역사 복원이었다. 청계천에는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교, 석축 등 역사 유적들이 있어서 이들을 원위치로 복원할 것을 역사학자들이 주장했다. 광통교가 있던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데, 교차로 한가운데에 돌로 된 이 다리를 원위치해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는 지금의 청계천 폭보다 길어서 수표교를 옮겨 오려면 양쪽에 토지를 매입해야 했다. 이런 쟁점들을 해결하고 임기 내에 사업을 완료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명박 시장은 생태 복원과 역사 복원 요구를 모두 무시했다. 청계천 복원 시민 위원들은 집단 사퇴했다. 공사는 강행됐고, 2년 뒤인 2005년 10월에 청계천 개통식을 했다.
정석
서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를 거쳐 2014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도시 설계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서울연구원에서 북촌, 인사동, 걷고 싶은 도시, 마을 만들기 등 여러 도시 설계 연구를 수행했고, 저서로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2013, 효형)와 『도시의 발견 – 행복한 삶을 위한 도시 인문학』(2016, 메디치) 등이 있다.
무엇이 도시를 움직이는가? 자본과 권력 vs.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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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7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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