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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정치와 도시권

하승우

도시 정치

‘도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중세 시대 신분제에 얽매여 있던 농노라도 도시로 들어가서 1년이 지나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다. 신분제가 있던 딱딱한 사회에서 도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공간이었다. 이렇듯 과거의 도시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는 어떨까?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일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자유를 주는 공간이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 디트로이트시에서는 자동차 산업으로 대기오염이 심각해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도시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시는 규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공간이다. 중세 시대에는 도시가 자율성을 지닌 공간이었을 수 있지만, 그만큼 그 자율성을 규제하려는 시도도 계속 있었다.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의 『국가처럼 보기』에서는 국가가 도시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서 시민의 자유를 확장시키려 했던 계획이 항상 의도된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시민의 도시’를 선언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곳이 시민의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공간을 배치하는 것과 실제로 시민이 그 공간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도시가 실제로 시민에게 자유를 주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세계화 이후 ‘국가는 작은 것을 다루기에는 너무 크고, 큰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무기력하다’고들 말한다. 가령 지금까지 동네 쓰레기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쓰레기 소각장이나 매립장을 크게 짓는 것이었다.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 지역적 차원에서 보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소각장이나 매립장을 짓더라도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지어야 할지를 검토하거나 소각장이나 매립장을 짓는 대신 자원을 순환시킬 수 있는 시설을 갖춘다면 어땠을까?

내가 사는 옥천군에서는 서울시와 달리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모두 가져가서 태운다. 인구가 5만 명인데 소각장이 인구 10만 규모로 설계되다 보니, 소각장을 돌리기 위해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일정 양을 한 번에 수거해 태우는 것이다.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자원 낭비와 유해 물질 배출 문제가 심각하다. 한편 농민들은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고 그냥 태우고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그동안 주민들이 같은 문제에 대처해 온 나름의 방식을 참고하여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면 좋을텐데, 국가는 그것을 늘 간단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하려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실제로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벤자민 바버(Benjamin R. Barber)는 『뜨는 도시 지는 국가』에서 세계화 시대에 도시의 자율성이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국가가 도시의 자유와 힘을 통제하려고 했다면, 세계화는 다시 도시에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는 국가’라고 해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국가가 동시에 지는 것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뜨는 도시’라고 해서 모든 도시들이 자기 역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하고 변화를 조직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시민

국민과 시민을 구분해서 이야기할 때, 보통 국민은 귀속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주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시민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그 자치단체의 공무(公務)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존재, 즉 도시의 운영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존재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촛불시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촛불국민’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시민이 가진 자율성이나 역동성에 주목한데다 과거로부터 시민이라는 말을 써온 방식 때문일 것이다.

중세와 현대의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비교해 보면, 중세 시대에는 도시를 운영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추첨제나 직접민주주의로 뽑거나, 그 도시의 형편에 맞게 여러 방식을 혼합하여 선출했다. 지금은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대부분 선거를 통해 도시의 권력을 분배한다. 즉 흔히 말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로 도시가 운영된다.

이런 통치 구조는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중세 도시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공간이라고 했지만, 통치 구조가 대의민주주의 체제로 바뀌고 근대 도시가 되면서부터는 도시의 특권이 보편화되었고 그에 따라 인권도 도입되었다. 시민의 권리는 통치 권력에게 보호를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결정권의 범위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점점 더 애매해졌다. 한편에서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율성이 보장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권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18년 지방선거가 2017년 대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방선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지방적·도시적인 것을 국가적인 것의 하부 개념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대통령 선거만 중요하고, 시장 선거는 우리 편이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자기 삶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지방선거임에도, 자율성이나 주권의 범위를 시 차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도시민이라고 이야기하고 도시민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으로 생활하면서 도시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약간의 변형은 거쳐 오긴 했지만,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이 주로 국가의 범주에서 해석되어 왔다.

거버넌스

최근 한국에서 거버넌스를 ‘협치(協治)’나 ‘공치(共治)’로 번역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르게 쓰려면 그렇게 번역하지 말고 그냥 거버넌스라고 해야 한다. 협치라고 하면 진짜 ‘협(協)’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관 간에 협치를 해 본 역사가 거의 없는데 협치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 같다. 공치도 마찬가지다. 같이한다기보다는 항상 관이 먼저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도움을 요청하는 식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시 운영과 관련된 중요 결정 권한을 정부가 독점했다가, 제도 정치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민에게 권한을 내려놓은 지 오래다. 거버넌스의 어원은 조종(調停)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kubernan’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의 마스터키를 같이 잡는다는 의미다. 배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초기 단계부터 같이 논의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민과 관이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권한은 나누지 않고 실행 단계에서 책임과 역할만 나누려고 한다.

거버넌스가 국가적인 통치 양식의 변화로만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자율성을 위해 시민 사회도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계속 제기해 왔다. 국가가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국가가 모든 권한을 독점하지 말고 지역에 결정 권한을 줘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1952년 지방선거가 처음 실시되다 박정희 정부 때부터 유보됐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고 1991년에 지방자치체도가 부활한 후, 1995년에 자치단체장 선거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지방자치제도가 계속 보완되고 있다. 지금은 시장을 뽑는 것이 익숙하지만, 1987년 이전까지 시장은 임명직이었고 지방의회라는 것도 없었다. 지방자치제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결정 권한을 넘겨 받으려고 했던 주민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도가 실행되고 지역으로 결정 권한이 내려오면서 지역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났다. 제도적으로도 주민 참여를 계속 권장하고 있다.

일본은 생활자 정치라고 해서 지역 사회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지역 사람들이 실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더불어 시민단체가 권력을 견제, 비판하면서 사회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풀뿌리 민주주의1라는 개념도 힘을 얻기 시작했다.

주민

과거에는 지역의 예산을 결정하는 것이 시장이나 군수의 몫이었다. 지금의 녹색당 당직을 맡기 전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에서 주민참여예산제도2에 관한 논의를 많이 했다.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예산 편성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지방 재정 운영의 투명성, 공정성, 효율성을 높이는 제도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서울시에서 주민참여예산 조례를 발의하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이음도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많이 얘기하다 2007년에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시의 참여예산제를 직접 조사하고 돌아와 보고회를 열기도 했다. 그때는 굉장히 진보적인 제도로 소개되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지방자치단체마다 주민참여예산조례가 있다. 당시 행정자치부가 이음에서 했던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민참여예산제 표준 조례안을 만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배포했고, 지방자치단체들은 조례를 만들어 형식적으로나마 운영하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통해 시민은 자신의 삶에 더 가깝게 와 닿는 것을 우선으로 예산을 결정할 수 있다. 시민이 직접 결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본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계기도 되기 때문에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지역을 학습하기에 좋은 제도다. 하지만 잘못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간혹 지방자지단체에서 자체 예산으로 진행이 어려운 사업을 공무원들이 주민들을 동원해서 추진하는 경우가 그렇다. 가령 주민참여예산제를 진행하다 보면 CCTV를 설치해 달라는 안이 많이 올라오는데, CCTV가 정말 주민들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인지 의문일 때가 많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주민 참여에서 ‘주민’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주민은 동등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주민 또는 토박이가 행사하는 권한과 이주민 또는 뜨내기가 행사하는 권한이 다르다. 원주민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자리에 이주민이 참여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제주도는 입도 3대부터 발언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그 정도의 시간을 지역에서 보내지 않으면 동네의 중요한 결정에 끼어 주지 않는 것이다. 원주민들 속에서도 권력 관계가 있다. 가령 마을 이장이나 특정 주민들은 다른 주민들보다 많은 권한을 행사한다. 이런 경우 주민 참여는 특정한 주민들의 참여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민은 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면서 생기는 혼란도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어 있다. 농촌에서도 집 앞의 논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별로 없고, 도시에서도 잠자는 곳보다 일하는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잠자는 곳과 일하는 곳 중 어느 곳을 주된 생활 근거지로 봐야 할까. 집은 동대문구이고 일터는 마포구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어디 주민일까. 행정적으로 보면 동대문구 구민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마포구에서 보내니 정작 동대문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일본에서는 자기 지역을 떠나서 일하는 성인 남성들을 ‘반일 시민’이라고 한다. 하루에 반만 그 지역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전일 시민’은 주로 여성 주부다. 일본 가나가와네또(네트워크)의 요코다 가쓰미는 성인 남성이 아닌 전일 시민인 여성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자율적인 결정이 가능하고 그 결정이 지역의 필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의 이야기도 가능하다. 집단 거주 지역인 아파트를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민이 아닌 경우, 지역을 관리하는 사람과 주민의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잠만 자는 주민보다 주거 단지를 관리하는 사람이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사람만을 주민으로 여겼다면, 최근에는 그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할 방법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민이라는 개념은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참여나 거버넌스를 이야기하려면 현재의 주민을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중요하다.

시민 도시

한국 사회에서 ‘플랫폼’이란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구상에도 플랫폼 이야기가 나온다. 플랫폼이 무엇일까? 플랫폼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민이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온라인 정책 제안 플랫폼 ‘광화문1번가’에 접수된 16만 건 중에 99건이 정책에 반영되었다. 몇 건의 제안이 반영되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왜 16만 건 중에서 99건만 반영됐는지, 채택된 제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리되어 반영되었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플랫폼의 기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설명이 없다.

시민민주주의는 시민적 가치에 입각하고, 시민적 동의와 참여를 존중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시민적 가치는 무엇이고, 시민적 동의와 참여를 존중하는 정치 체제는 무엇일까?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의 책 『촛불의 시간: 군주ㆍ국가의 시간에서 시민의 시간으로』에서는 이제 군주의 시간이 끝나고 시민의 시간이 시작됐다고 하면서, 사회를 모순 덩어리로 만든 기성 세대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분노를 이야기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도 “정치는 광장에서 표출된 시민의 분노와 열망을 구체적 변화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 모호한 상황이다. 시민 정치를 호명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정작 시민들은 자신이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의 가치, 열망, 분노 그리고 지향하는 바를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가 여전히 문제다.

한국은 중앙 정치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사회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5개년계획에 부산, 대구, 무안, 청주 공항 계획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국책사업으로 시행한다고 하면 관련 내용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지역 주민의 삶을 이미 결정해 버린 것이다. 한편,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수도권이 자기 지역성이 없는 일종의 메트로폴리스로 변해가고 있는데, 비수도권의 상황도 다르지만 비슷하다. 농촌도 특성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에너지 문제가 심각해지고 식량난이 대두되는 시기가 오면, 그때야말로 거버넌트가 필요할 텐데 한국은 자꾸 변형된 거버넌스만 확장되다 보니 지역에서 주민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시민 정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계속 변형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생활과 노동의 문제를 통합하기보다 분리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 다들 살기 좋은 마을을 이야기하지만 일하기 좋은 마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민 정치는 이미 행정에 포섭됐고, 도시권 논의조차도 행정의 문법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런 경향을 어떻게 반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략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런 전략에는 배제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방법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주체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제 이 목소리를 어떻게 실제 정치로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도시권

유네스코와 해비타트가 2005 – 2009년까지 ‘도시 정책과 도시권’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도시권’은 개인과 사회 집단 모두가 도시에서 존엄하고 안전하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정당하게 요구할 권리다. 도시권의 다섯 가지 주요 개념 축은 이렇다. 모든 이가 도시의 자율성, 자유, 이득을 누려야 하고, 시 정부는 투명하고 공정하고 형평성 있게 운영되어야 하며, 지역의 민주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을 존중하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 경제, 사회, 문화 생활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빈곤과 사회적 배제, 도시의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 정책 프로젝트는 실제로 여성, 청년, 이민자들의 권리, 책임, 참여에 초점을 맞췄다.

도시라는 공간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은 서구 사회에도 존재한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èbvre)는 도시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공동으로 만들어 온 도시 공간을 생산하고 정의할 권리다. 한국에서 좌측 보행이 우측 보행이 되고, 주소 표기 방식이 바뀌는 등 공간의 정의나 부르는 방식 등이 바뀌었는데, 시민들은 이를 전문가나 행정에서 하는 일로만 인식하고 있다. 시민 스스로 공간을 정의하는 권리가 중요하다. 둘째, 도시 공간의 생산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리다. 이것은 말 그대로 도시의 구성하는데 개입할 수 있는 권리다. 셋째, 시민이 자신의 필요를 규정할 수 있는 권리다. 가령 선거 때 마을회관을 지어주겠다고 공약하는데, 주민 입장에서 보면 마을회관이 있으면 좋지만 꼭 필요한지는 의문일 수 있다. 예산이 제약되어 있어서 하나의 시설을 만들면 다른 시설 하나는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주민에게 직접 묻는 것이 주민참여예산제다. 큰 그림을 먼저 그려 놓고 예산 1%로 주민참여예산제를 하면 시민들은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넷째, 이질적인 도시 공간에서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렇기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다. 도시는 개방된 공간이기 때문에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시민이 저마다의 다름을 찾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다. 이 권리는 최근 도시에서 중요해지고 있다.

르페브르의 도시권 개념을 이어받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말하는 도시권은 개인의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꿀 권리이기 때문에 집단적 권리다. 지금까지의 인권 논의에서는 도시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도시를 재구성하는 권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미국의 RTC3는 강제 퇴거에 대항하는 사회 운동을 조직하고 나름의 중요 원칙을 정해놓고 있다. 예를 들면, 경찰과 국가에 의한 괴롭힘을 금지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중앙 정부든 지방 정부든 정부 계획에 반대하려면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목소리를 내려면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모두를 위하는 것이 중요한데, 모두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에 대한 특정화가 필요하다. 보편적인 인권에서 확장되는 권리도 있지만,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싸워야 한다. 이런 것이 시민의 문법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행정의 문법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이 두 문법은 매우 다르다. 시민 정치와 마찬가지로 도시권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가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는 같이 논의해야 할 부분이다.

변화의 조건들

공공성 후퇴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승자독식의 사회로 각자 살아남도록 길들여져 왔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구조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 구조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작은 실험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형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세 개혁이 필수적이다.

1991년부터 지방자치제도를 실행해 왔지만 지방 정부의 재정 자립도는 계속 떨어졌다. 농촌 대부분은 재정 자립도가 20% 이하다. 현재 지방 정부의 세수로는 재정 자립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80:20으로 되어 있는 국세와 지방세의 조세 구조를 60:40으로 바꾸겠다고 공약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조세 개혁을 하면서 지방의 권력 구조를 견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규정도 같이 바꿔 나가야 한다. 실제로 주민투표나 주민소환제 같은 것이 잘 집행되지 않고 중앙 정부의 필요에 의한 것만 집행되어 왔다. 앞으로는 지역 주민에게 권력이 이전되어야 한다.

이렇게 도시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시민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시민이 자기 자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공동체 토지 신탁을 지원할 수 있는 법률도 제정되어야 한다. 국가와 경찰의 권한 남용을 처벌하는 법률과 기업이 일으킨 재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법률도 필요하다. 구조적으로 이런 조건들이 뒷받침되어야 실제로 시민이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변화를 단번에 만들 수는 없겠지만, 변화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동반되면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개인 문제의 사회화를 위한 동맹

한국에서 심각한 문제는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의 부주의나 실패로 여긴다.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 정치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생활하는 시민의 특수한 욕구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대표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사회 문제가 아닌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개인적 문제로 몰아가다 보면 이 문제는 결국 ‘건물주가 착한 사람이어서, 혹은 나쁜 사람이어서’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개인 문제를 사회화하는 강령이 필요하다.

개인 문제를 사회화하려면 공유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몫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미 도시에는 공유재가 많다.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공간을 소유하고 있다. 그 공유지의 상당수는 도로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을 위한 공간이나 임대 수익을 받는 공간으로 소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공간은 지역 주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 주민은 정작 그런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자체 홈페이지에 가면 그 정보를 찾을 수 있다. 땅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예산을 사용하게 되면 필요한 시설을 만들 수 있다. 도시 공간을 생산할 수 있으면 권리도 따라 생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혀 그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땅도 없고 돈도 없으니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 몫으로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추상적인 담론 속에서 얻어질 수 없다. 아주 집요하고 꾸준하게 추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권력은 이런 시도를 막기 위해 언제나 분할 통치를 하려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동맹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고, 도시를 바꿀 수 있는 의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 물론 SNS를 이용해도 좋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SNS를 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이야기하지만, 공동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뭔가를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비슷하다고 본다. 도시는 외로움의 공간이지만 농촌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간이다. 농촌은 군청에서 비료 등을 지원받기도 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군청과 대립하지 않으려고 한다. 혼자 싸우다 ‘찍히는’ 것을 염려한다. 여럿이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동선이 연결될 접점을 찾고, 그것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마을 만들기를 할 때도 각자 하루 동안의 동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어디서 동선이 겹치는지를 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의 동선이 도서관에서 겹치는 지역에서는 공장 화학물질에 대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겠지만, 교육이나 보육에 관련된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일 것이다. 구청에 땅이 있으니 다같이 노력하면 공립 어린이집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회화를 위해서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을 만들기와 같은 모임에 가 보면 다들 아름다운 관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싸우면 안 되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면 안 되고,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면 협상할 기회가 생기지만, 갈등 자체가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협상의 기회조차 생기지 않는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자기의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동참할 수 있다. 자꾸만 본심을 꺼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본심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면, 도시에서의 삶과 권리를 위해서는 개인의 문제를 드러내고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공통의 의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양한 접점을 연결시켜 조직과 단체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공통의 문제를 의제화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개인의 노력으로 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의 환경과 책임 속에서 함께 풀 것인지에 따라서 답은 달라질 수 있다.

시민 정치와 도시에 대한 담론은 국내에 이미 많다. 하지만 쓰지 못하는 담론은 의미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도시를 어떤 식으로 바꿔 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다. 앞선 이론들을 보고 따라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필요나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먼저다. 최초에 정리해 놓은 개념은 살아가면서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남이 보기에 좋은 그림에 우리가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조금씩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나도 바뀌고 공간도 바뀐다.


하승우

녹색당에서 공동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 태생으로 서울에 살다가 결혼 후 경기도 용인시를 거쳐 3년 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지금은 시보다는 군에, 도시보다는 농촌에 더 관심이 많다.

시민 정치와 도시권

분량12,458자 / 25분

발행일2017년 12월 19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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