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요우미 × 김남수
분량13,801자 / 25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유형대담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열린 <월경과 혼재>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동서양의 차이를 초역사적인 우주적 상상력으로 담론화한 강연, 상영, 공연 프로그램이다. 이 장을 기획한 요우미는 직접 광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노마드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실크로드를 사유의 수단으로 삼아 오늘날 국가, 인종, 경제성장이라는 문화·정치적 규범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난 3월 기획자 요우미와 안무비평가 김남수가 만나 대담을 나눴다.
요우미 베이징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이자 독일의 쾰른 미디어아트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있다. 현재 자신이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방문했던 공간인 실크로드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김남수 안무비평가. 2001년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을 시작으로 평론을 시작했다. 무용월간지 『몸』 편집위원을 거쳐(2003), 퍼포밍아트지 『판』의 창간(2006)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국립극단 선임연구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개발원 아시아문화아카이브 팀장 및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고, 전시 《오픈댄스-달리는 늑대들》, 《고래-시간의 잠수자》를 기획했다. 저서로 『세계신화여행』, 『백남준의 귀환』(공저)이 있고, 평론집 『고함』이 있다.
※ 본 대담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과 두산아트센터 공동주최로 진행된 ‘컨템포러리 토크: 요우미×김남수’ (2016. 3. 5)의 내용을 주최측과 협의 후 정리한 것이다.
김남수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것을 실행한 사람은 근현대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한테 유라시아라는 대륙은 의식과 관념에서 잊혀졌죠. 왜냐하면 아시아의 결정 변수가 대양으로부터 왔거든요. 과거 우리의 활동무대였던 대륙적인 사고방식은 국경이 설치되면서 다 분할되고 혈맥은 끊겼고, 땅이 플랫하면서도 연속적이라고 하는 열린공간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우리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요우미 작가의 그간 프로젝트들을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빅히스토리 관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합니다. 빅히스토리라는 역사학 방법론은 시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없었던 시간까지도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이죠. 현대사상이 인간을 넘어서는 소위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고 하는 입장이 있죠. 그랬을 때 인간이 없었던 시간조차도 역사화 한다는 사실은 지금의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적인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르네상스형 사고방식입니다. 르네상스는 대부흥이 아닌 고전의 회기죠. 태초, 고대, 중세에 만들어진 고유의 독특한 사유가 현대에 도래하면 과거와 근미래 사이에서 새로운 시간의 교차를 만들어내죠. 여기에서 우리가 현재라고 하는 이 감옥, 흔히 현재에 집중하기 때문에 소위 그 ‘시간의 사레’라는 현상에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과거를 포획해 온다든가 미래학자처럼 미래를 견인해오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것이 부분적이었죠. 근데 요우미 작가는 굉장히 전면적입니다. 과거의 시간을 가져오는 ‘앤틱 컬렉터antique collector’ 성격이 강한데, 동시에 미래를 접촉하는 얼리어답터까지 겸하고 있어 제 머리가 혼란스러운 정도입니다. 이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전체 프로그램을 봤을 때 구체적으로는 우리한테는 상당히 익숙한 ‘노마드nomad’라고 하는 주체화 과정에 있어요.
한국사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십여 년 가까이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라는 표현이 득세했고 예술에도 많은 영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말을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판타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우미 작가는 판타지에서 멈추지 않고 리얼리티로 치열하게 진행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어떤 역설이 발생하죠. 즉, 유라시아 대륙을 교통과 통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 몸으로 그것을 체험한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항상 최초의 노마드 개념이 재설정되는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드리고 싶은 질문은, 요우미 작가는 유라시아 대륙 중에서도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여행을 하셨죠. 그 길은 사실상 마르코 폴로, 현장법사, 징기스칸과 동행했던 야율초재耶律楚材, 그외 장춘진인長春眞人, 혜초스님 등이 갔던 길입니다. 아주 유서 깊고, 우리로서는 성지순례를 하는 것처럼 답사를 해야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죠. 어떻게 이 어려운 여행을 하게 됐는지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노마드’로서 어떻게 자신만의 게임작업을 하게 되었는지도요.
요우미 제 프로젝트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월경越境과 혼재混在>라는 프로젝트로, 들으신 것처럼 실크로드를 비유적인 사유의 방식으로 사용해서 다시 유목민이 되어서 국경을 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의 굉장히 개인적인 여행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한데, 그보다 먼저 보시는 포스터에 보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의 이름이 나와 있지요. 큐레이터로서 이 작가들이 모두 공연, 영화, 렉처퍼포먼스 등의 형태로 매우 수행적으로 해당 주제를 실행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드립니다.
저는 약 2년 전 5주에 걸쳐 500킬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육로를 따라 중국 중심부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까지 여행했습니다. 제가 따라갔던 루트는 주로 7세기에 현장법사가, 12~13세기에 마르코 폴로가, 19~20세기 초 유럽의 고고학자와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난 자리입니다. 당시 여행에서 받았던 첫인상은, 우리 머릿속에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육로를 걸었을 때 사실 동서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이 굉장히 느리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처럼 느껴졌고, 이는 동서 간의 음식, 건축, 회화, 시각문화 언어, 종교 관습 모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시에, 여행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도 했습니다.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승려, 고고학자, 중세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계속 읽으면서 여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각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몇백 년 전, 천오백 년 전 다른 여행자들과 제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들이 그 공간에 남기고 간 무언가와 제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굉장히 사변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제가 여행을 하는 중에는 시간과 공간이 접히고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고,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월경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 저는 하나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여행자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는 보드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게임 과정 중 서로 교류가 가능하고, 역사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을 펼치기도 하고, 특정 인물이 여행을 해야 했던 추동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명 혹은 충동을 느껴서 여행하게 됐는지, 어떤 유목적인 정신이 깨어나서 게임을 하게 됐는지 생각해보는 게임입니다.
김남수 ‘실행의 노마드’와 ‘생각의 노마드’를 일치시켜 가는 작업, 거기에 수행성performativity’이 있다는 거죠. 노마드라는 건 자유로운 발상, 자유로운 실행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둘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만 앞설 수도 있죠. 그런데 그 생각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면 앎의 세계만 많아지고, 실행의 몫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는데, 그런데 실제 그것을 했을 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옛 선현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구나, 현장법사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것이 단순히 앎의 기억이라던가 환기가 아니고, ‘시간이 겹쳐진다’는 사실이죠.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길 위에 또 다른 시간의 층이 포개어지는 듯한, 그저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소위 ‘중층시간’이라 할 수 있겠죠.
아까 제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을 말씀 드렸는데, 길을 걸을 때 누군가를 그 길을 걸었던 선인들을 생각했을 때는, 또 시간의 어떤 층위가 계속 발생하는 것 같아요. 바그너는 성배를 찾아가는 ‘파르지팔Parsifal’의 모험담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1막 마지막에 “여기서는 시간이 공간으로 바뀐다”고 적었습니다. 공간을 걸어가는데 ‘시간차원’이 열리는 거죠. 저도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유라시아 대륙을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비자 문제가 너무 까다로워 멀티비자를 만들 수는 없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국경은 아시아인이 만든 게 아니거든요.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로 정복자들이 이해관계와 욕망에 따라 국경을, 그것도 심지어 직선으로 만들어놓았죠. 원래는 국경이라는 게 없었죠. 국경이라고 하면 국가체제가 있는 곳이고 또 그것을 지탱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있죠. 그런데 요우미 작가는 ‘결코 노마드는 낭만이 아니다’는 것이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자본주의 문제를 현대적으로 사유를 해왔어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사유를 해왔는데 바로 노마드 자체를 그 조건 속으로 되던지는 겁니다.
요우미 노마디즘을 낭만화하면 안 된다는 부분을 감사하게도 강조해 주셨는데요. 현재 그런 경향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정치적인 맥락에서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계획만 봐도 낭만적인 접근이 정치적 맥락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고속철도 아이디어에는 아마 한국도 연류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경향을 다시 생각해보고 또 질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크로드가 과연 이동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중요했던 것일까? 장소 간의 사람, 물자 이동 측면에서만 중요했던 것인가를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장소와 장소간 그리고 문화와 문화간에 상호작용, 교류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아프리카 국경에 관한 사례는 중앙아시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가 특정한 어떤 시공간과 다시 연결을 맺어 보려고 할 때 꿈이라던지 어떤 월경적인 사변이나 상상 등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국가주의라던지 민족주의 그 다음에 위에서부터 그냥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역사에 많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자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 중에도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요. 일단 중앙 아시아에 보면 모든 ‘‐스탄Stan’ 나라들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들의 국경을 나눈 것을 보면 사실 최근에 국경이 지어졌을 때 문화나 언어,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굉장히 단순하고 편협하게 마르크스 스타일로 정치 경제 부분만 고려해서 국경을 나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지키스탄 경우는 산지농업, 우즈베키스탄은 저지대 농업, 키르기지스탄은 산지 유목문화, 카자흐스탄은 초원 유목문화, 투르크메니스탄은 거의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 농업 등 이런 정치, 경제적인 요소로만 국경을 나눈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시아문화전당예술극장 개관페스티벌 때 참여했던 작가 중에도 우즈베키스탄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작품이 있는데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인 조치들이 젊은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 국경, 월경을 다르게 본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품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로렌스 아부 함단Lawrence Abu Hamdan이라는 아티스트의 <함성의 계곡 속, 언어의 골짜기>에서 ‘함성의 계속’은 실제 지명입니다. 이곳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의 국경지대 지명입니다. 이곳은 원래 전통적으로 이슬람교도 중에서도 드루즈인Druze人이라는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살던 고향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국경 때문에 인위적으로 갑자기 분단된 것이죠. 아시다시피 이 국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넘기 힘든 국경 중 하나입니다. 아부 함단 작가가 기록한 것은 드루즈인이 일상적으로 매일 실행하는 어떤 행동입니다. 그들은 계곡 양편에 매일 모여 스피커로 친구와 가족의 안부를 소리 질러 묻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언어가 정말 물질적인 어떤 매개체 자체로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언어를 통한 월경’이라는 개념을 좀 더 은유적으로 접근해 번역의 문제를 다룹니다.

언어를 통한 월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가로 슬라브 앤 타타르Slavs and Tatars라는 콜렉티브 입니다. 이들은 베를린장벽 동쪽부터 만리장성 서쪽까지 이 작업을 한다고 본인의 작업을 설명합니다. 바로 유라시아인데요. 이들은 작품에서 음역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중앙아시아의 몇몇 언어들, 그리고 코카서스 지역의 언어들이 구소련이 행했던 어떤 정치적인 국가화 과정 속에서 레닌이 얘기했던 “중앙 아시아의 혁명은 언어들을 라틴 문자화 하는 것이다. 로마자화 하는 것이다” 라는 언급 때문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시리아, 아제르바이젠 그 모든 지역의 다른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언어들이 하나의 문자체계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다 로마자로 통일되었다가 이후에는 키릴문자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슬라브 앤 타타르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변화 과정에서 뉘앙스들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혀를 긁는 것 같은 ‘하’ 소리가 나는 음소인데, 이것이 로마자 문자체계에는 없기 때문에 음소가 담고 있는 뉘앙스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작가들은 이 음소가 굉장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어떤 성적인 내용도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문자체계로 옮겨지면서 문자가 단순화 되었을 때 어떤 관능성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언어와 신체적으로 맺는 연결관계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고, 이 또한 제가 볼때는 월경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김남수 요우미 작가가 ‘월경Transgression’의 개념을 쭉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과거의 월경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월경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월경은, 예를 들어 시리아 난민이 발생을 했어요. 국가가 이 윤곽이 터져버려가지고 그냥 지구촌에 수백 만 난민이 발생하자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는 난민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가, 월경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직설적으로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난민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인기를 얻곤 하죠. 독일의 경우도 국민들은 내심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데 국제 정치의 대의명분 때문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난민들이 실제 유럽문명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도 보게 되고요. 그래서 월경이라는 문화적인 ‘충돌’과 또 시간이 지나면 ‘접변’ 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혼재syncretism’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게 휠씬 더 유연하고 또 폭력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요.
실크로드가 나뭇잎의 잎맥처럼 되어 있는데 나뭇잎 하나를 이렇게 보시면 중앙 잎맥이 있는데 거기서 계속 번져나가잖아요. 인체에 비유하면 모세혈관과 미세신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린 거기에 대해 몰랐거든요.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알 수도 없고, 거기 가서 그 마을에 할아버지를 붙잡고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죠. 그런데 직접 가면 거기 다 있어요. 요우미 작가의 월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월경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월경을 하는지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우미 ‘혼재’ 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이 아까 말씀하셨던 동서양의 구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지금 독일에 거주하면서 그곳 예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유럽의 어떤 지적 전통을 조금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놀라는 것이, 소위 ‘서구’라는 것은 스스로를 규정할 때 항상 타자가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비서구 사회 혹은 동양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외부를 필요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개념적인 경향이 지금의 난민 상황을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럽은 항상 ‘자신과 타자’, ‘자아와 타자’, ‘유럽과 외부’라는 구분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서구라는 것 자체를 본인들이 실제로 본인이 아닌 무언가를 기반으로 자신이 아닌 것을 기반으로 ‘서구’ 라는 개념을 만들고 지어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몽테스키외나 헤겔, 마르크스 등의 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트워크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의 관점 또는 수평적인 관계 혹은 서로 간의 어떤 접속적인 연결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와 타인 혹은 유럽과 비유럽 혹은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 간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고요.
이 네트워크의 이미지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말씀드리면 조금 더 은유적인 접근인데요.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얘기할 때, 보통 역사적으로 굉장히 무역량이 많았다고 생각을 하시는데 그래서 실크로드를 기본적으로 교역 네트워크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고학 자료를 실제로 들어서 설명을 할 때 많이 놀라곤 하시는데, 그 실크로드 상에 위치했던 중요한 지점에 남아있던 조세 기록들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실크로드 위의 교역량이 하찮을 정도의 수준으로 굉장히 적었다고 합니다. “한 15마리의 낙타가 3kg의 보석, 3kg의 향료 정도를 싣고 다녔다.” 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기록이고요. 역사 시기 대부분에 무역량이 그렇게 작았습니다.
그래서 이 실크로드의 네트워크는 사실 굉장히 좀 자연 발생적이고, 즉흥적이고 소규모였습니다. 그래서 조직적이거나 어떤 열강이라던지 혹은 거대한 사업적인 목적을 가진 개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고요. 소규모 무역상들이 만들어 냈던 네트워크 였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분산된 신경체계 같은 네트워크였고, 저는 오늘 이런 실크로드의 이미지를 실제로 닮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물론 이 얘기를 할 때 가장 먼저들 떠올리시는 게 인터넷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인터넷이야말로 위에서 부과된 통제체계에 불과한 것이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데서는 저희의 정보들이 계속 저장되고 노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무한한 자유가 있고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이 있는 것 같지만 인터넷은 실제로 그러한 체계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또 소계되는 ‘비트코인Bitcoin과 블록체인Blockchain’에 관해 논의가 있을 예정인데 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어떻게 은밀한 소통 체계로써 또 은밀한 금전거래로써 화폐없이 디지털 화폐로만 이루어지는 금전 거래로 이렇게 이런 인터넷 체제에 대항하고 있는지 이야기 할 예정입니다. 이 비트코인도 실제로 지금 중국정부를 비롯한 많은 정부들이 자체적인 디지털 화폐를 만들려고 하면서 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이런 면에서 어떤 네트워크의 정치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남수 실크로드를 이렇게 길을 연결을 할 때 동쪽 끝에는 중국이 있어요. 그리고 장안이라는 도시가 있고 서쪽 끝에는 로마가 있고,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이스탄불이죠. 이걸 연결하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하나는 장안으로 수렴되고 또 하나는 로마로 수렴되어 길 위의 모든 것들은 그냥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유라시아에 제국이 많았죠. 그렇기 때문에 제국 안에서는 네트워킹이 모두 수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깥과는 항상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부풀어 오르면 중국으로 수렴이 되고 여기도 제국이고 로마도 제국이니까 수렴되는 곳이 여럿이 되는 거죠.
우리 몸에도 신경망이 있잖아요. 서양식으로는 이게 ‘신경계’라고 하는 거고, 동아시아 타입으로는 ‘경락’이라고 하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길들이 있다고, 또 그 소위 ‘기’라고 하는 특유의 표현을 가지고도 설명을 하는데, 거기서 둘 체계 사이에서 얘기가 아니라 유라시아를 하나의 신경망으로 생각할 때 그 상인들이 막 북쪽으로도 가고 남쪽으로도 가잖아요. 동서로만 가는 게 아니지요.
교역량이 적은 것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시장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에서 다 만들어졌다고 하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실크로드라는 것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라고 하는 신경망이 있는 것 같아요.
아프리카 모로코에 가면 마라케시라는 유명한 옛 도시가 있어요. 일만 년 전에 만들어진 그곳 시장에 대해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시장에 가면 물건 값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주인하고 흥정을 하다보면 공연이 하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장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직접 작업을 해가지고 만든다. 즉 다른 데서 물건을 떼어다가 걸어 놓는 방식이 아니다.” 하여튼 굉장히 아름다운 시장의 풍경을 막 그리는데 그 시장이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라비아의 바자라고 하는 시장, 사마르칸트의 시장, 신장 위구르, 그리고 쭉 이어져 가지고 장안에 이르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집니다. 그게 매우 아름답기도 하고 월경에 관한 관점에서 저는 요우미 작가의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 요우미 작가의 선언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월경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장이 있는 곳은 대체로 오아시스라는 곳인데 우리는 유목민에 이렇게 현혹이 되잖아요. 유목민을 낭만화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만 기록하지 않죠. 근데 오아시스에 들르면 그 시장에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줄 수가 있어요. 근데 오아시스에서는 또 정주민이 있잖아요. 정주민은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이렇게 씁니다. 그들은 앉아 있으니까 복잡하게만 이야기를 이렇게 엮어 가죠. 무슨 서사시를 쓴다 던가 그래서 토인비 같은 사람은 진정한 혼재라는 것은 오아시스에서 유목민과 정주민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그 새로운 아이디어하고 좀 복잡하게 만드는 능력이 사실 좋게 작용을 할 때 일어난다고 하면서 굳이 ‘정주stationary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쓰죠. 오아시스에 앉아 있는 책상머리 지리학자는 사실은 말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리 철학자’가 되는 셈이죠. ‘지오필로소퍼Geo-philosopher’ 요우미의 혼재와, 월경과 혼재의 선언문은 지오필로소퍼로서 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론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중에 또 한국인 예술가 박소영 씨가 남북한이 윤곽으로 굴레처럼 되 있는 것을 돌파하는 이야기를 해서 반갑기도 하고요. 혼재는 종교에서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등 중앙아시아는 종교의 용광로인데, 십자가를 메고 있는 부처상이라던가 타지키스탄의 샤먼을 불러 영업을 하게 만드는 우즈베키스탄이라던가, 지리철학의 혼재가 일어나는 광경을 많이 보시고 또 작업 속에 직접적으로 천명하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요우미 지리철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박소영 작가의 작품은 한반도 산맥이 가지고 있는, 산이 가지고 있는 어떤 ‘숨’을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한반도에 사는 그 자체로 이미 국경을 횡단하고 있는, 월경하는 존재인데요. 다음 주에 버스를 타고 무등산 절에서 ‘한반도의 산’ 산맥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사운드 체험 공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을 소개해 드리면 <신스마키낸> 이라는 콜렉티브의 작품이 있습니다. 굉장히 스펙타클한 지질학적인 현상에 대한 작업인데요. 야말Yamal반도에 있는 싱크홀에 대한 작업입니다. 야말반도는 러시아 최북단 북극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 지름이 30~40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분화구가 갑자기 몇 년 전부터 생겼습니다. 아무런 어떤 설명이나 원인이 없이, 우연히 어쩌다가 생긴 현상인데요. 이 지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유목민을 알아보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지구가 안에서 밖으로 뒤집히는 현상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요. 유목민은 그들이 오래 전 하던 그 관습, 즉 어린 소녀가 신부가 되어서 그 구멍 속에 땅밑으로 보내면 노했던 땅이 진정을 한다는 관습을 이야기합니다.
이 영상 작품은 싱크홀의 장면들 다음에 유목민들을 만나서 이야기 했던 장면들이 어떤 작가들의 특별한 코멘트 없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유목민들이 했던 역사적인 관습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은 일단 제쳐두고, 그것을 보면서 들었던 제 생각은 지구가 안에서 밖으로 뒤집히는 것처럼 그에 대항하는 현상 혹은 그와 유사한 현상으로 ‘지구가 밖에서 안으로 덮여오는 그런 현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런 시공간의 어떤 연속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것이 과연 ‘다양한 시간대의 차이를 없애는 그런 과정일까?’ 혹은 ‘시간만이 아니라 어떤 다양한 종류의 의식까지도 하나로 뭉쳐버리는 그런 과정일까?’ 아니면 ‘이것이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체험이 가능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됐고요.
이 프로젝트는 역사에 관해서도 사실은 선적인 측면에서 ‘역사란 우리 뒤에 있는 무언가이다’ 라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선적인 역사를 굉장히 급진적으로 붕괴 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양한 시간이나 공간 혹은 다양한 의식체계를 한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남수 제가 ‘지오필로소퍼’라는 표현을 쓴 것은 ‘월경’을 기반으로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것이고, ‘혼재’라고 말할 때 요우미 작가가 드는 비유는 ‘히말라야 산맥’입니다. 제가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히말라야는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지구의 작품인 거죠. 예술작품이에요. 왜냐면 인도라고 하는 판과 유라시아라고 하는 판이 어느 시기에 쾅 부딪혀서 엄청난 심해가 갑자기 정반대인 육지로 바뀐 거죠. 뒤집어 진 겁니다. 인도 대륙을 보세요. 제가 ‘대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시카고대학의 세계사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인도는 대륙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대륙이다.”
현장법사가 장안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갔던 이유는 뭘까요? 인도에 뭐가 있기 때문에, 특유의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담긴 불경을 구해야 했기 때문일 겁니다. 서유럽을 다 합쳐도 인도보다 작다고 합니다. 근데 우리 환영 속에는 인도가 굉장히 작습니다. 서유럽과 비교해 일도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우미 작가는 이제 중국인이에요. 근데 수렴하는 방식, 소용돌이가 안으로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분산형으로 바깥으로 원심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지오필로소퍼’ 역할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제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가지고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유라시아 대륙을 재설정, 재맥락화, 재발명 하겠다’는 이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선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목민이 왔다갔다 하면서 만들어냈던 그것은 빅히스토리 입장에서 봤을 때 지구가 지향해온 생성 방식, 즉 진화죠. 20세기부터 21세기 우리는 지구의 건강을 위협하면서 진화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잖아요. 지구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요. 그런데 요우미 작가의 우주적 상상력은 지구의 결을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저는 거기서 어떤 자연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무언가 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우미 제가 왜 중국이면서도 구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물어보셨는데요. 저도 물론 많은 중국인들이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마드를 생각했을 때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많은 중국인들이 그렇듯이) 어떤 동심원으로 봐라 봤을 때는 굉장히 정적이고 숨막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중국인으로서 그걸 겪으면서 굉장히 답답하게 느꼈고, 저는 그래서 거기에 회전을 거듭해서 조금 더 원심력을 가진 운동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늘 저의 사고와 사고과정이나 프로젝트에 담겨 있는 역사를 뛰어넘는 초역사적인 흐름을 완벽하게 짚어내 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분량13,801자 / 25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유형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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