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질문, 둔탁한 답변
김정헌 × 안소현
분량11,770자 / 25분
발행일2016년 4월 28일
유형인터뷰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이라는, 내용을 가늠하기 어려운 전시 부제는 김정헌 선생이 발산하는 유연함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빛나는 끼”로 그의 작품과 면모를 일축했다. 최근 그의 12년만의 개인전을 계기로 작품에 대한 과거와 오늘의 이야기, 언뜻 부표처럼 떠 있으나 분명한 좌표를 찍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나눈 심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정헌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월남, 부산과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문화연대 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0년부터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2016), 《백년의 기억》(2004) 등이 있고, 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특별상을 수상했다. 젊은 예술가들과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만들어 제천의 한 폐교에서 마을운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림과 말, 그림과 이야기를 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터뷰어 안소현 독립큐레이터. 미학과 미술관학을 공부하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로 근무하였다. 《x사운드: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 《끈질긴 후렴》,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예술의 정치성과 전시 공간의 의미 형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안소현 선생님의 작품을 안과 밖의 경계로 나눌 수는 없지만, 일단 작품 내부, 화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예전에 심광현 평론가가 “사이- 공간을 다루는 작가다”라고 한 바 있고 (<‘백 년의 기억’, 예술-역사의 ‘사이-공간’에 말 걸기>), 그런 측면이 화면에서는 종종 거칠게 표현된 부분과 매끈하게 표현된 두 차원의 대비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신작들에서는 역사와 현재, 도시와 농촌 같은 두 세계를 질감의 대비로 표현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 같다.
김정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예전에는 양면적인 성격이 확실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묘사를 한다는 것에 신경질이 났고, 그래서 큰 붓으로 거칠게 그리면 속이 후련했다. ‘현실과 발언’ 초기부터 그런 면이 있었다. 심광현이 말한 “두 공간 사이의 진자운동” 같은 것은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미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묘사에 대한 중압감이 있다.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사실적으로 그릴 수는 있지만 그 경지를 넘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시각화하고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잘 안 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아예 그것을 상쇄시켜버리도록 큰 붓질로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그와 대비되는 효과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이중적인 것을 한 화면에 배치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럭키 모노륨: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1981)이다. 광고에서처럼 바닥재의 무늬를 자세하게 묘사하려 했지만 그걸 일일이 다 어떻게 그리나? (웃음) 그게 잘 안 되니까 줄로 표현했는데, 그것과 강하게 대비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그리면 안 돼서 그 위에 뭉툭한 붓으로 빠른 손길로 그렸고, 같은 맥락에서 시간성도 대비를 이루는 이중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좀 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려고 했다. 어떤 그림은 툭툭 그린 것도 있고, <아차! 아차산이로구나!>(2015)에서는 자세히 그리려다가 맘에 안 들어서 동그라미 패턴을 그려 넣기도 했다.
안소현 동그라미 패턴이 반복적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달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격파하라>(2015)에서처럼 바로 ‘달’로 파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차! 아차산이로구나>의 회색 동그라미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리신 건가?
김정헌 심심하니까. (웃음) 사실 2004년 《백 년의 기억》 전시부터 동그라미 패턴을 선보였다. 3·1절 고종 승하를 다룬 그림인 <반지와 3.1 독립만세>(2003)에도 나온다. 클리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반복되는 것인데, 뭔가 그림이 좀 아쉬울 때 사용한 방법이긴 하다. <아차! 아차산이로구나!>가 그런 경우다. <섬진강에 대한 비대칭적 사유>(2011)처럼 밑그림을 그린 후 2년간 그대로 두었다가 동그라미 패턴으로 마무리한 경우도 있다. 동그라미는 달로 표현한 경우도 있고, <국가를 향해 쏴라>에서처럼 총알 자국이나 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동그라미는 내가 그림 위에 쓰는, 혹은 ‘중얼거리는’ 캡션이나 텍스트들과 비슷한 이유에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소격 효과랄까. 그것은 이중성 혹은 다의성을 위해 그 아래에 있는 이미지를 전복시키면서 다시 한 번 이미지를 보게 만드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안소현 황세준 작가가 이번 전시에 부친 글에서, 달은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그림 위에 붙인 스티커와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고 했다. 저는 그 말이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다가 그림을 자세히 보니 이해가 되었다. 동그라미는 붓으로 그냥 그린 것이 아닌 것 같다.
김정헌 그렇다. 문방구에서 파는 동그라미 틀을 사용해서 아크릴물감과 응고제를 섞어서 틀 밑으로 퍼지지 않게 그린 것이다. 어떤 것은 달의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기도 하다. 최진욱 작가가 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나?
안소현 동그라미 패턴이나 나무뿌리가 “미심쩍다”고 했다. 이중적인 의미였는데, 최진욱 작가는 선생님의 과거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만큼 공백기를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최근작들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했다.
김정헌 최진욱이 그 정도 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웃음)

안소현 <자본의 배를 탄 국가>(2015)를 비롯해 나무뿌리에 대해 해명하실 기회를 드리겠다. 과거 <광주 5·18과 난초>(2001)에서 그랬던 것처럼 뜬금없는 사물들이 등장하여 그 사물에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김정헌의 스타일인 것 같다. 나무뿌리를 굳이 ‘국가’라고 칭한 이유가 무엇인가?
김정헌 ‘광주 5·18’이라고 하면 선명하고 구체적인 형상과 도상이 떠오른다. 그 광주의 형상들에 난초를 정말 뜬금없이 갖다 붙인 거다. <금강산도 식후경>(2016)의 자장면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먼저 생각해 냈는데 (특별한 것은 아니고) 비실비실하던 난초가 갑자기 꽃을 피운 것을 보며, 광주의 정신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광주비엔날레에 전시한 그림 <그해 오월 광주의 푸르름>(1995)에도 플라타너스를 공중부양하듯 갖다 붙였다. 광주 문제라고 하면 여러 상처와 슬픔이 뒤엉켜있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뒤섞여 있는데 녹색으로 그것을 치유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 국가라는 것은 5·18보다 더 막연하고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때 마침 눈앞에 기괴한 나무뿌리가 있어서 그에 비유한 것이다. 내가 엉뚱한 사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두고 ‘왜 하필 그런 뜻인가’ 라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최진욱이 작업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미술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곡괭이 선생>(1995)에서는 농기구를 의인화했는데 ‘왜 하필 곡괭이인가?’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나무뿌리의 기괴한 형상이 내가 생각한 국가와 맞아서 그린 것이다. 벌겋게, 그리고 약간 섹시하게 그렸다. 최진욱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 자기도 칠십이 되어 보라 그래. 정년퇴직도 안 해놓고…. (웃음)

안소현 그에 비해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희망도 슬프다>(2015)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창문 모티프를 볼 때 특정 사건을 떠올리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창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다.
김정헌 1980년대에 가족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큰 창문 안에 그린 그림이 <행복의 모습>(1982)인데, 그건 실제로 내가 살던 집을 보고 그린 것이다. 내게 창문은 가족이나 가정이다. 창문도 나무뿌리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황세준이 언급했듯이 창은 안에서 다른 세상을 내다보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가족은 국가나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가정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데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바다 그림들은 모두 세월호와 연결되어 있다. 가정의 노란 불빛은 <노동자의 밤>(1995)에서 남자가 귀가해서 초라한 밥상을 앞에 둔 장면이나 <행복의 모습>에 있는 바깥의 LPG 가스통과 대비되는 실내 장면에도 나타난다. 사회가 불안하고 위기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단순한 대상으로 압축해 표현하고 싶었다. 이런 이미지들에는 문학의 시어처럼 기호의 측면이 있다.


안소현 늘 혼자 궁금해하던 것이 있다. 작품들에 구름은 왜 항상 두 개만 있나?
김정헌 아, 그것도 그냥 습관이다.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부터 구름을 두 개 그렸는데… 글쎄, 왜 두 개일까? 농부가 있는데 머리 위의 구름이 두 개다. 그때 구름은 신문기사를 오려 붙여 세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위에 흰색을 덧칠했다. 그 전시는 동산방 화랑에서 열렸는데, 화랑 주인이 전시를 하자 해놓고 겁이 덜컥 난 모양이다. 형사들이 들락날락하고 뭐라고 하니까. 그 전시의 다른 작가들이 시뻘건 그림들을 걸어놨다. 내 구름이 신문을 오려 붙인 거라 ‘세상이 어떠어떠하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었는데 일부러 그 기사를 선택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동산방 주인은 형사들이 와서 뭐라고 하니 그 기사를 지워달라고 했는데, 힘들게 연 전시이니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아 완전히 지우지는 않고 그 위를 붓으로 한번 왔다 갔다 했다. 그때부터 구름이 꼭 두 개인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구름도 암수가 있는 거지. (웃음)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

안소현 요즘 작가들은 특정한 발언을 제지당한다기보다 스스로 발언을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최근 검열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도 자기도 모르게 하는 자기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 요즘 작가들에게는 저항하고 분노해야 하는 상황보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에 억압되어 있는지 되물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에 있는 ‘구름이자 말풍선’은 물론 특정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고 또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이라는 표현보다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현재 선생님의 작업에 더 잘 맞고 유효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미술이 비판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또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미술의 몫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어떤 전략을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요즘 사건들이 끝없이 터지고 있지만 특정 사건에 대해 표현하기가 어쩐지 쉽지 않다.
김정헌 맞다. 사건이 너무 많아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5.18 같은 큰 사건들이 있었고, 작가들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예술가도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리얼리즘의 복권》 전은 임옥상, 신학철, 이종구, 황재형 같은 작가들이 참여한 다소 상업적인 전시이긴 하지만, 여하튼 임옥상 작가가 신작들을 전시했는데 그중 백남기 노인 사건을 그린 것이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충격적인 사건이고 임옥상이 도화지 수십 장에 분절해 그려서 물대포 장면을 잘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사건마다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것을 하더라도 어쨌든 공감이 되고 소통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제일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각적인 개입은 그야말로 임옥상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하기는 좀 힘들다. 예술가는 어쨌든 시각적인 소통을 시도해야 하지 않는가.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은 구름만이 아니고, 원근법이 잘 맞지 않게 하거나 앞쪽이 짧고 뒤쪽이 길게 하는 등 여러 시각적 방법을 통해서 시대적 모순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들 ‘아몰랑 구름’에 매몰되긴 했지만…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 즉각적인 분노를 폭발적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전에 나도 그런 것을 해보려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 나는 이렇게 교묘한 글귀를 써서 표현하고, 둔탁한 패러디를 하고 그런다.
안소현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힘을 뺀 것 같고, 또 선생님의 원래 스타일도 그런 것 같다.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부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좌표가 되기도 하는데, 그 자체는 가볍게 떠있지만 아래에는 무거운 것이 가라앉아 있다. 황세준 작가는 그런 것을 ‘거리 조절’이라고 표현했다. 1997년의 좌담에서 당시 미술의 엄숙주의에 반발하려 했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런 것을 의식하시는가?
김정헌 그렇다. 내 동그라미 패턴은 부표다. 거의 체질화된 것 같다. 예전에는 농촌, 농부, 마을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거기에 역사적인 것이 도입되면서 동학의 도상들을 그렸고, 그런 주제가 (전시장의 <곡괭이 선생> 작업을 가리키며) 저 곡괭이 같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1997년의 좌담회 기록을 보면 박이소 (당시 이름 박모)가 내 그림을 ‘bad painting’, 다시 말해 ‘일부러 못 그린 그림’이라고 한 바 있다. 전시에서도 100개의 패널을 마치 실패한 그림들처럼 만들었다.
그때 ‘미술이 과연 뭘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미술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문장을 당시 표제어처럼 자주 사용했다. 미술이라는 것이, 이미지라는 것이 그럴듯하게 그린 것이건 막 그린 것이건 여러 방법으로 관객을 거의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구태여 뭔가를 묘사하려 하거나 내면의 무언가를 보여주려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거친 패널 위에 이미지 100개를 만들어서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미지를 조합해서 보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게 그때의 콘셉트였다. 그 전시를 계기로 이영욱, 박찬경, 박이소 같은 날카로운 친구들이 모여서 좌담을 할 때, 박이소가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배드 페인팅’이라고 표현한 건 제일 잘 이해한 거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잘 그리려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그림은 재빨리 그리다 보면 이미 바탕이 된 경우가 있다. <섬진강에 대한 비대칭적 사유>(2011)도 답사를 다녀와서 거의 단색으로 그린 것인데, 그걸로 부족해서 동그라미와 호밋자루를 더한 것이다. 하여튼 먼저 생각한 주제가 있더라도 표현을 하면서 많이 바뀐다. ‘이걸 그려야겠다’ 한 것이 끝까지 관철되는 경우가 잘 없다. 물론 광주비엔날레의 경우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주제 대로 큰 작품으로 채워야 해서, 몇 가지 아이템을 정하고 정치, 5·18 등의 주제를 정하고 그린 것이긴 하다.
요즘에는 기억력도 안 좋아서 하루 지나면 생각이 사라지기도 하고, 이 생각이 나면 이렇게, 저 생각이 나면 저렇게… 그렇게 해서 자동으로 거리조절이 된 거지, 일부러 거리조절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체질화된 것 같다.
<고풀이>(2015)라는 그림의 경우에는 그 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을 때 황세준이 보고 그대로 좋다고 해서, 참 취향도 여러 가지다, 했다. (웃음) 그 무렵 민속박물관에서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 책에 실린 굿의 이미지를 보고 ‘고풀이’나 소주병에 나뭇가지를 꽂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덧그리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 전시를 보고 생각을 얻기도 한다. 금강산 이미지에서는 거리를 만들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마침 강홍구의 전시에서 자장면의 이미지를 보고, ‘너의 자장면을 가져다 그려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얼마든지 하라고 해서 <금강산도 식후경>(2016)이 나온 거다. 비무장지대를 그린 <이상한 풍경>(1999)은 성조기, 오성기 액자까지 내가 직접 만들어 넣었지만, 어느 전시에서 선보였는지 기록도 없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림인데, 이번에 젊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다시 보니 나도 좋더라.
안소현 선생님은 그림에서는 그렇게 거리조절을 하시는데, 예전에 연극 <꿀떡꿀떡낄낄낄-유신의 소리>에서는 연기를 진짜 못하시더라. 일부러 못하신 건 아닌 것 같았고, 민정기 선생님과 같이 하시니 비교가 됐다. 물론 박찬경 선생님보다는 잘하시는 것 같더라. (웃음)
김정헌 아마추어가 그 정도면 잘한 거지. 내가 못해야 민정기가 진짜 배우가 되는 거다. 박찬경은 뭘 좀 할 줄 알고 시켰더니 영…. (웃음)
민중미술 작가로의 규정과 한계
안소현 이제 민중미술 자체보다는 그런 ‘규정’에 대해 여쭤보려 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민중미술’이라는 규정이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셨지만, 선생님께 민중미술 작가라는 이름은 항상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제 민중미술은 특정 시기에 나타났다 사라진 하나의 역사로 기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작가는는 그렇게 어떤 역사적 운동이나 경향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 젊은 작가들에게 그런 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예를 들어 ‘포스트민중미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때, 그 대상이 되었던 젊은 작가들이 격하게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김정헌 민중미술도 아니고,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 하면 더 싫어하지. ‘탈’-민중미술이라고 해줘라.
안소현 ‘포스트’에 ‘탈’의 의미가 있어서, 저는 그 말을 ‘문제의식을 공유하되 방법이나 접근 방식을 다르게 취하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했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김정헌 작가는 무언가로 규정되는 것을 다들 싫어한다.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민중이냐, 그래서 나 스스로 ‘민중 부르주아’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지금도 비슷하다. 진짜 민중이라는 의미로 규정한다면 그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게 어디 있나.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주도한 것도 없다. 내 별명이 ‘고아원 원장’인데 그런 티가 나는 정도다. 지금도 미술사적으로 민중미술 운동이 있었고, 내가 그중에 주도적인 여러 인물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작가를 ‘민중미술 작가’ 라고 규정해버리면, 작가들은 여러 층위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어하고 다양한 면모를 갖고 싶어하는데 원치 않을 수밖에 없다. 아마 젊은 작가들은 더 심할 거다. 주변에서 ‘민중미술 키즈’라고 부르면 얼마나 화가 나겠나. ‘포스트’라는 말도 애매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저항미술의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에 ‘민중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성할 때, ‘민중’미술협의회로 하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민족이 그 당시로서는 비교적 넓은 의미여서 선택했던 것이다. ‘민미협’을 만들긴 했지만, 단체를 조직해서 운영하는 것이 진짜 민중미술은 아니라고 본다. 민중미술이 예술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단체와 관련 없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밑바닥에서부터 같이 시대적인 의식으로 공유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민중미술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우리 시대의 삶의 변두리에, 스스로 낮게 위치해서, 세상이 불편하게 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 중심에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약간 불량배 같은 기질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후배들이 꽤 있더라. 약간 데카당한 태도를 가진. 민중미술이건, 민족미술, 혹은 둘다 아니건 작가들의 기본 자세는 권력으로부터 좀 멀어… 내 스스로 권력에 가까이 가놓고… (웃음), 하여튼 태도는 그랬으면 좋겠다.
안소현 또 다른 권력인 자본에 관해서 여쭤보고 싶다. 민중미술이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값이 오른다고 하더라. 그런 점에서 저는 김정헌이 오랜 시간 작업을 해서 그의 작품이 결국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렸다더라는 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하고, 그래서 좀 더 새로운 작업과 전시를 보고 싶기도 하다.
김정헌 시장에서 어떻다더라 하는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더라. 나도 시장과 관계없이 내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왔고 판매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자본의 행세를 하는 화랑에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지난번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있었던 《민중미술의 복권》 전시는 화상이 완전히 상품처럼 작품들을 꺼내놓은 전시였다. 요즘 갤러리 화상들은 노골적으로 상품 가치가 있다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이 싫은 것이다. 물론 누가 내 작품을 사고 싶다 한다면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며 판매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전시라는 것이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잘 모르겠다. 전시를 열면 “이 자가 아직도 내 전시에 안와봤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웃음) <어린 왕자>를 보면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사는 별이 있는데 어린 왕자에게 자신에게 와서 찬사를 바치라고 한다. 전시회를 열면 자연히 작품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게 되고 내가 그 허영심 많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12년만에 개인전하면서 병들었다. 아이고, 또 전시를 하면 내가 잘난 척하고 꺼떡꺼떡 할텐데 내가 그런 내 꼴을 어찌 보나 싶다.
거꾸로 내가 물어보고 싶다. ‘베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표절이 아니라 패스티쉬나 패러디라고 하던데 나는 “빌려다 쓴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젊은 세대를 미리 빌려다 쓰기도 하고 과거를 빌려다 쓰기도 한다. 빌려다 쓰기는 괜찮은 방법 같다. 인류의 삶 자체도, 진화도 그렇게 잘 된 표현을 빌려다 쓰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겸재 정선의 금강산을 되살리고, 오늘의 자장면을 넣은 것이다. 내가 자주 이야기 했지만 발터 벤야민은 인용구만으로도 된 책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 체계가 정립되어 있었겠는가. 나는 그림쟁이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문학이건 미술이건 남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없더라. 이 질문이 구름이 왜 두 개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좀 더 나은 질문 아닌가? 근데 구름이 세 개면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웃음)
안소현 겸재 정선 같은 고전을 가져오는 것은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지고 일반적이 되었다. 다만 선생님께서 다른 작업으로부터 어떤 것을 빌려오게 되면 빌려온 대상의 형식이나 성격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김정헌이 가져왔다’라는 사실이 일종의 선언처럼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저는 궁금증을 많이 풀었고,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질문을 하시면 좋겠다.
이경희(편집자) 선생님의 작품명과 이번 전시 제목이 독특하다. 작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좋겠다.
김정헌 내가 제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림에 보면 표제처럼 제목을 화면 안에 적는 경우가 많다. 설명을 길게 할 수 없으니까 제목에 압축한다.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처럼 광고 카피를 이용한 예처럼, 제목은 이야기 그림에 들어가는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성공하기도, 또 다른 것은 실패하기도 한다. “아차, 아차산이로구나!”, “주목! 태백산의 주목 나무를 주목하자”는 지금 내가 봐도 유치하다. 하지만 내 작품이 심각한 것도 아니고, 제목이라도 웃겨야 하지 않겠나. “국가를 향해 쏴라!”, “인양하라!”처럼 영화 제목 비슷하게 지은 것도 있다. (그 말투로) 내가 고문으로 있는 단체의 젊은 친구들에게 SNS에서 “고문으로서 알린다. 내 개인전이 열리고 있으니 와서 보라!”고 했더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비장하게) “아, 오라하셔서 왔습니다!”라고 하더라.
안소현 작품을 보면서 선생님의 매체가 회화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화실에서 조용히 혼자 작업하는 작가들과 달리,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활동을 하시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소통이 작품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쉽고 압축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신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성희.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김정헌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그림에 드러나는 것 같다. 인터뷰가 너무 길어졌으니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이제 마무리할까 한다.
날카로운 질문, 둔탁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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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16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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