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로서의 굿-즈
김남시
분량3,600자 / 10분
발행일2016년 1월 26일
유형비평
얼마전 나는 김용익 작가와의 페이스 북 논쟁을 통해 굿즈에 대한 생각을 표명한 바 있으며, 이는 김용익 작가가 ‘크리틱-칼’에 기고한 글<굿-즈 2015>에서 굿-즈를 “장터의 미술”로 규정한다. 최 작가에게 ‘장터의 미술’은 결코 긍정적 의미가 아닌데, 그에게 장터의 미술은 “대개 상화라고 불릴만한 그림들과 공예품이라고 불릴만한 아트 상품들을 트럭에 싣고, 히피 같은 행색의 작가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벌이며 파는”, “한 눈에 보아도 야망을 가진 아티스트로서는 상종할만한 공간은 아닌” 그런 미술이기 때문이다. 굿-즈는 “본격적인 파인아트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판매하고자 벌인 장터”라는 점에서 최 작가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장터미술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최진욱 작가에게는 굿-즈가 하나의 ‘불가능한’, 자기 모순적인, 심지어 ‘궁핍한 변명’ 혹은 ‘사기’의 혐의가 짙은 행사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로 작동한다.
최진욱 작가는 파인아트와 대중적 구매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파인아트는 애초부터 대중적 구매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며”, “판매와 관람은 동일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나아가 “대중은 얼마든지 파인아트를 관람하고 즐길 수 있지만, 구매는 긴 시간을 두고 구매 계획을 세우지 않은 한 살 수 없다.” 파인아트 작품은 “일반 대중이 구매하기에는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파인아트 작품을 ‘만원에서 십만원 정도’의 싼 가격에 구매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되는 순간 미술은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작가에게나 관객에게나.”
실제로, 파인아트 작품을 제작하는 전업 작가에게 ‘만원에서 십만원 정도의 싼 가격’으로 그의 작품을 구매하게 하는 것은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곧 전업 작가임을 포기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작가들이 그렇게 싼 가격에 작품을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제도적 권력 –예를 들어,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문화재단이나 예술위원회 등-이나 시장권력에 굴복하고 만다면, 최진욱 작가의 우려대로, 이는 결국 파인아트를 고사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진욱 작가는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 그런 미술작품을 만원서부터 십만원 사이로 판다는 것은 이중으로 사기를 치는 것과도 같다. 대중은 자신들에게 그런 식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미술을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중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미술일수록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미술은 역설적이게도 관객과 작가가 서로 반복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나는 최진욱 작가와 의견을 달리한다.
“대중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미술”, 그러니까 쉽게 접근할 수 없고, 구매하기 힘든 미술을 숭배한다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냉소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생각은 예술의 모더니즘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당대 복제기술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이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오려고’ 하는 대중의 열렬한 관심사”를 충족시켜준다고 지적한다. 아우라의 성배 속에 고고하게 머무르는 대신, 사물을 가까이 끌어오려는 대중에게 작용하는 예술의 신경감응적, 혁명적 잠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관객과 작가의 반목’을 진정한 ‘파인아트’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최진욱 작가의 태도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와 구별된다.
나는 ‘굿즈-세대’는 소위 순수예술에 대한 이러한 태도 혹은 그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술을 통한 소통의 관점에서도 김용익 작가나 최진욱 작가 세대와는 다른 입지점에 서 있다. 예를 들어 최진욱 작가는 “미술의 상업화나 아트상품과 같은 손쉬운 소통”은 제대로 된 미술의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미술은, 위에서 말한 판매 불가능성과 결합된 ‘소통 불가능성’ 위에서 피어나는 창조의 결정체 같은 것이다. 소통 불가능이라는 절망 속에서 손쉬운 소통의 나아가는 것은, 그에게는 미술의 진정성에서 눈을 돌리는 회피에 다름 아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굿-즈처럼 아트 상품이 아닌 파인 아트를 장터에서 팔겠다는 시도가 최진욱 작가에게는 미술이 처한 난관에 대한 “해답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진욱 작가는 파인아트로서의 미술은 ‘장터’가 아니라 ‘화랑’에서 거래되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에게는 굿-즈와 같은 ‘장터’보다는 “좋은 작품을 적절한 가격에 팔려는” ‘합정지구’ 같은 화랑이 “현재 상화와 아트상품, 골동품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미술시장을 되찾아 오려는 “미술인들의 목표”를 이루기에 더 적합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최진욱 작가는 굿-즈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대중들이 모여 있는 ‘장터의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업실에서 작가의 고독한 창작의 산고를 통해 제작된 작품은 화랑이라는 제도화된 통로를 통해,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거래되어야 한다. 이 전형적 모더니스트적 시각에서 볼 때 굿-즈 같은 장터는,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명분하에 (모더니즘적 순수성의) 미술을 파괴시키는 곳이다. 화랑의 중개로 만난 컬렉터에게, 싸지 않은 작품을 판매해 본 경험 밖에 없는 모더니스트 작가에게 굿-즈라는 장터는 너무 난삽하고 어지러우며, 시끄러운 북새통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나는 굿-즈가 예술을 둘러싼 행위의 가능성을 전시와 판매 둘로만 축소시키는 제도화된 장소, 화랑보다 훨씬 더 풍부한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굿-즈가 ‘장터’였기 때문이다.
장터는 물건을 팔거나 사려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이 펼쳐지는 장소다. 아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 활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 곳에는 물건을 팔거나 사려는 사람 뿐 아니라, 장터를 구경하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 위해 혹은 구걸을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 백화점이나 편의점처럼, 판매를 위해 정해진 규격과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당사자들의 의지에 따라 지극히 다양한 거래방식이 가능하다.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에서 미학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김남시
‘장터’로서의 굿-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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