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이라 쓰고 ‘검열융성’이라 읽는다
이원재
분량4,017자 / 1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6년 1월 26일
유형오피니언
검열 융성의 시대유감 _ 검열의 당사자가 된 예술가들의 명단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연극, 시각예술, 영화, 문학에 이르기까지 검열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공공지원 통제를 통한 정치적 표현을 억압하려는 시도가 목격되고 있다. 표현물 자체에 대한 검열에서 창작자의 작업과 삶에 대한 통제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점점 일상화되고 있는 예술검열이 오히려 예술의 사회성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난 11월 27일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70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다. 최근 문화예술계의 화두로 떠오른 ‘예술검열’ 때문이다. 예술검열에 대한 자유로운 견해들이 오고 가는 와중에, 박근혜 정부 초기에 검열을 당했다는 한 연극인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외롭고 두려웠는데, 이제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아서 든든하네요.” 물론 여기서 ‘비슷한 처지’란 다름 아닌 ‘검열당한 예술가의 처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이미 그 자리에는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국립국악원 사태의 피해자들을 비롯하여 미술가, 연극인, 영화감독 등 상당수의 ‘검열당한 예술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검열당한 예술가들의 말처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지난 3년 동안의 신문기사들을 대충 스크랩해도 박근혜 정부에서 ‘예술검열’은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반복되었다. 2013년 9월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상영 과정에서 논란이 된 것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기념 전시회에서 임옥상 작가의 <하나 됨을 위하여>에 대한 청와대 검열 논란, 광주비엔날레 관련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 전시유보 결정, 박근혜 대통령 풍자 그림을 배포한 이하 작가 연행, 영화 <다이빙벨> 관련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전태일 청소년문학상’과 ‘근로자문화예술제’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상 수여 거부, 국가인권위원회 기관지 『인권』에서 소설 『소수의견』의 작가 손아람 기고 글 배제 등 언론에 오르내린 예술검열 사태만 열거해도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더욱이 최근에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근형 연출가가 2013년에 발표한 연극 <개구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 대상에서 배제되고, 이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웹문서 조작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예술검열을 했다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공연예술센터는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팝업씨어터의 <이 아이> 공연을 방해했고, 국립국악원은 <소월산천> 공연에서 박근형 연출가가 맡은 부분의 배제를 요구했다가 문화예술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문화융성은 고사하고 검열융성의 시대가 찾아온 셈이다.
‘정치검열의 귀환’ 그리고 ‘예술검열의 사회화’
물론 예술검열은 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존재해 왔다. 사실 “예술의 역사가 곧 검열의 역사”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은 수많은 권력들의 검열에 저항하며 사회적으로 진화해 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검열융성’에는 뭔가 다른 불편함이 있다.
먼저 박근혜 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정치검열’을 다시 귀환시켰다. 소위 민주화 정부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정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검열 양태가 다시, 노골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군부독재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의 예술검열에서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검열은 거의 사라져 가는 추세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쟁점들은 정치적 요소보다는 대부분 성 표현물 수위, 청소년 연령, 문신 및 대마 비범죄화 등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강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예술검열은 문화적 권리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과 합의는 고사하고, 군사독재의 유물인 정치검열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 박근혜 대통령 풍자 등과 같은 1차원적인 정치적 표현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예술검열’과 ‘예술지원’을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새누리당 집권 이후 예술검열 장치는 표현물에 대한 통제만이 아니라 공공지원의 통제를 통해서 더욱 깊게 작동하고 있다. 과거의 예술검열이 영상물등급위원회를 비롯하여 표현물을 다루는 심의기관으로 제한되어 진행되었다면, 최근에 발생한 예술검열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한국공연예술센터 등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술창작 지원기관들의 행정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예술검열이 예술가의 정치적 입장, 미학적 태도에 대한 검열을 넘어 창작 환경을 비롯한 예술가의 삶 전반에 대한 통제 과정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국가권력의 예술검열이 표현물 자체에 대한 통제를 넘어 예술가의 창작과 삶에 대한 통제로 확장되면서, 예술검열의 주체와 성격 역시 변화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다양한 예술검열 사례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검열주체는 다름 아닌 예술행정가들이다. 과거의 예술검열이 안기부나 국정원 같은 공안기관의 통제 속에서 진행되었다면, 이제 예술검열은 예술을 지원하는 전문기관의 행정 관료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사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검열주체들은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하여 예술을 지원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예술행정 관료들이며, 이들은 자신의 검열 행위를 단순하게 부정하는 것을 넘어 자각하지 못하거나 스스로를 피해자로 호명할 정도로 ‘예술 지원행정을 통한 예술검열 장치’에 깊게 내면화되어 있다.
‘예술검열’ 하는 ‘예술행정’의 추락
마지막으로 박근혜 정부의 의한 무차별적이고 일상화된 예술검열은 결과적으로 ‘예술검열의 사회화’와 ‘예술행정의 파국’에 도달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강요하는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예술검열은 예술가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예술행정 전반에 걸쳐 검열에 무감각해지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국악원, 한국공연예술센터 등의 예술검열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 예술검열이 얼마나 깊고 넓게 사회화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술가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줘야 하는 예술행정기관의 주체들이 오히려 심사위원을 종용하고, 함부로 무대에 난입하고, 작품에 참여하는 작가의 배제를 요구할 정도로 예술검열은 일상화, 사회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각한 예술검열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예술행정은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예술검열은 단순히 예술가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예술행정을 비롯하여 예술생태계 구성원 전체의 사회적 윤리와 책임을 파괴한다.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내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예술전문기관들이 직면하고 있는 예술행정의 추락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술검열의 사회화가 진행될수록 예술행정은 물론 예술생태계 자체의 사회적 가치와 존중감이 소멸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행정의 추락이 예술의 몰락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예술은 5년의 임기가 없다. 예술가의 삶도 5년 주기로 계획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예술을 통제하고, 파행적인 예술행정을 통해 예술검열을 일상화하는 시대에서도 예술은 존재한다. 박근혜 정부의 예술행정이 파행을 거듭한다고 해서 예술가들이 호흡을 맞춰줄 이유도 없다. 늦은 밤, 예술검열에 분노하며 모인 예술가들은 말했다. “정부의 예술가 통제 수단으로 전락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을 거부하자”, “박근혜 정부의 예술검열을 빼곡하게 기록하고 단행본으로 출간하자”, “예술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위한 예술행동을 함께 하자”, “예술검열 고발센터를 운영하자”, “예술검열에 저항하는 페스티벌을 개최하자”… 이미 검열의 역사를 예술의 역사로 고쳐 쓰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예술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원재
문화운동가 그리고 문화연구자. 시민의 문화권리를 위해 1999년 설립된 사회운동단체 ‘문화연대’에서 16년째 활동하고 있다. ‘창의성의 기본은 지구력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 개혁, 청소년보호법 폐지, 인터넷내용등급제 반대 등 표현의 자유 운동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문화융성’이라 쓰고 ‘검열융성’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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